2005년 10월 9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15:29-39
일곱 광주리의 떡과 물고기
신앙에 대하여서 알지 못하거나 또는 신앙생활에 대하여서 특히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서 부정적인 입장의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나?’라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가장 기초적인 생활권이라고 할 수 있는 먹고 마시는 것, 그것을 해결해주지도 못한다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현실적인 정당함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서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말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그러한 현실적 당위성을 피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한 질문에 즉 '그들의 질문에 온유함으로 답변을 준비하라고 하심'(벧전 3:15; 골 4:6)에 따라서 그 말씀하심을 찾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9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2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9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곳 즉 두로와 시돈을 떠나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큰 무리가 절뚝바리와 불구자와 벙어리 소경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 앞에 두매 고쳐주시매 이스라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2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셔서 함께한 무리들이 사흘이나 되었으매 굶겨 돌려보내지 못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떡이 몇 개 있느냐는 말씀하심에 제자들이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축사하시고 떼어주심에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어 배불리 먹게 하고 그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거두었으니 먹은 자가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심이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을 모으신 것이 일곱 광주리가 되었음에 대한 것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독 신앙에 대하여서 부정적으로 말하면서 현실성이 없다는 개념으로 그 당위성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표현이 ‘신앙생활하면 그것이 밥 먹여주나’, ‘교회 나간다고 옷이 나와 밥이 나와’ 등등의 신앙에 대한 현실성이 없음에 대한 임의적 판단으로 그것을 반론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러한 기준에서 현실을 말하며 그것을 기준으로 당위성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지혜 없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가져온 떡을 가지고 사흘 동안 함께한 자들 그 큰 무리들에게 떡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심은 아주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현실적인 실제적인 것으로써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자신이 생명의 떡으로서 구주로서의 모습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것에서. 현실적이라면, 그럼 지금이라는 현실에서도 그러한 기적을 나타내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하여서는 계시의 반복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인 당위성을 얻는다는 것에서 비로소 그 정당함을 얻는다면 가능한 것이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존적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 나타내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기적의 반복의 여지를 강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것의 부당함도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가운데서 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럼 앞서 오천 명을 먹이신 것과 동일한 형태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과 그러한 반복이라고 함이 지금의 자신들의 반복의 요구를 정당화 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 배고픔이라고 하는 현실을 감안한다고 하는 것이 본문의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그들의 계시적 반복이 요구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반복이라고 하는 것이 여럿의 가능성을 위한 것으로 열려진 것이 아니라, 주의 증거로서 그 신실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은 증인으로 세울 때에는 둘 이상 세우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이 반복적 의미는 바로 증거로서의 객관성을 가진 또한 율법의 가르침에 따른 둘 이상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을 인식하는 증인으로서의 모습으로써 모습들로서 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며 이해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증거의 내용으로써 나타내시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구체적으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현상적인 측면에서의 역사성으로만 본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하신 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시는 것으로 도의적인 차원의 어떤 기적적 의미로서 받을 수 있는 것이 그당시 현실적인 판단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즉 주의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하심을 나타내시는 삶의 연속성에서 본문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하심을 현실적인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 사건으로써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증거와 사실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먼저 사흘동안 주님을 따라 다른 자들을 굶겨 보내지 못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위해 기적을 베푸신 것은 주님의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성도들을 실제적으로 나타내는 현실적인 증거자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의지적 개념과 상관이 있음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말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동안 무덤에 머무실 때에 그와 함께한 자들 주님 안에서 죽고 주님 안에서 부활의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주님을 믿는 성도들을 예표적이면서도 실제적으로 증거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굶겨보내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생명의 떡이 되어주신다는 것으로써 말씀하시며 그들을 위해 진정한 영생이라고 함의 생명을 나타내시겠다는 자기 계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36절에서는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생명의 떡, 영원의 생명을 위한 떡으로써, 영생을 얻을 주의 말씀으로 존재의 생명의 정당함과 그 존재를 지탱하게 하는 말씀을 예표하는 그 현실적인 것으로써의 떡과 물고기는 '제자들'을 통해서 나누어주었습니다.
어쩌면 상식선에서도 주님의 일을 돕는다는 차원에서 당연한 자연스런 모습이지만 우리가 이미 합당하게 기억하고 전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을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사역 가운데서의 그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주의 뜻하심의 실제를 현실적인 실제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이후에 아주 잘 표현하고 있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 1:6~9)
즉 주님과 함께한 사도들과 그들의 신임을 입을 수 있는 자들이 그 사역을 돕고 그들을 통하여서 생명의 떡으로써 물고기와 떡이 나누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바로 예수님을 믿으며 주의 사도들의 전한 바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실재와 실제라는 생명 자체와 그 사실을 받게 되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천명을 먹이신 사역과 아주 좋은 비교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사도들의 손에 의해 주님께 드려졌다는 것과 사도들과 그의 신임을 받은 제자들을 통하여서 그 영생의 말씀이 그 영생과 함께 그 사실의 누림의 축복이 아주 평범하게 주의 택한 백성들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말씀을 통하여서 주께서 받으시고 그 말씀을 통해서 주의 복음이 전파되어지며 주님을 믿어 주님과 법적으로 죽었으며 주님의 부활하심에서 자신의 존재의 정당함을 믿으며 찾는 자들이 주의 성도들이며 주의 먹여주시는 종들이심을 말씀하시길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오병이어를 통한 기적이나 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아주 현실적이라고 함을 말씀드렸던 것을 좀더 분명히 말씀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현실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합리적으로 말하여 변호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실재가 역사성의 형태를 취하는 것으로써 나타난다고 할 때에 우리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방향이라고 함을 분명히 해야하며 역방향의 인식은 정당함을 항상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얻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현실을 위한 신앙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 자존적 정당함으로 현실의 실재를 주관하시고 나타내신다는 것과 그것에서 현실의 사실성을 말함이 형태적으로는 편협함을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과 절대 보편성에 있어서는 진정한 보편적 생각과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상대적인 상식적인 측면에서의 당위성에서 본다면 편협한 사고인 것으로 판단이 가능하지만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과 보편성이 재가되어지는 성경의 안목과 그 사실의 판단은 그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적인 사실들이 재가를 받아 현실이 진정한 사실로 규정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위해 신앙을 조작하거나 필요성에 따라 해석함은 그 정당함이 결여된 것으로 상식적으로도 하나님 앞에서도 편협한 사고와 비판되어질 수 있는 사고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현실을 위해 하나님이 떡을 오늘날도 주지 않는다는 정황에서는 하나님의 자기의 기뻐하심이 판단받을 수 있다고 하는 '신앙이 밥먹여주나'는 말의 속에 담긴 당위성은 부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럴뿐만 아니라 주님은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것에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눅 22:35)
말씀을 맺습니다.
현실적인 실제에 대하여서 이해.. 본문 16절에서 오해의 소지를 지적 5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란 말씀을 기억합니다. 즉 주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시고, 사천 명을 먹이신 가운데서 그들이 필요한 현실적인 것도 챙겨주셨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제자들이 떡 가져오지 못함을 놓고 아쉬워하고 고민하게 되는 가운데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교훈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무엇인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현실적인 실증적으로 나타나야 되며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요 진정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이 평생 먹을 것을 다 짊어지고 다니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주께 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서 지냈던 것과 사르밧 여인의 한줌의 가루로 섬김을 받게 하셨던 것과 같이 초라하지만 그들은 다함이 없는 가운데 기근의 때를 면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과 같이 그 베풀어주시는 상을 기뻐하며 사천 명을 먹이시고 남기신 일곱광주리의 고기와 떡을 예비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일용할 양식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항상 예비해주시는 것이며,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실재적으로 실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음을 진정으로 사실로써 고백하며 또한 사도들의 고백과 같이 동일한 고백속에 주님께 대답하며 우리의 치열한 삶 속에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먹고 마심으로 실족하지 않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감당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마15:29-39
일곱 광주리의 떡과 물고기
신앙에 대하여서 알지 못하거나 또는 신앙생활에 대하여서 특히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서 부정적인 입장의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나?’라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가장 기초적인 생활권이라고 할 수 있는 먹고 마시는 것, 그것을 해결해주지도 못한다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현실적인 정당함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서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말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그러한 현실적 당위성을 피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한 질문에 즉 '그들의 질문에 온유함으로 답변을 준비하라고 하심'(벧전 3:15; 골 4:6)에 따라서 그 말씀하심을 찾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9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2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9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곳 즉 두로와 시돈을 떠나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큰 무리가 절뚝바리와 불구자와 벙어리 소경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 앞에 두매 고쳐주시매 이스라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2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셔서 함께한 무리들이 사흘이나 되었으매 굶겨 돌려보내지 못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떡이 몇 개 있느냐는 말씀하심에 제자들이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축사하시고 떼어주심에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어 배불리 먹게 하고 그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거두었으니 먹은 자가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심이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을 모으신 것이 일곱 광주리가 되었음에 대한 것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독 신앙에 대하여서 부정적으로 말하면서 현실성이 없다는 개념으로 그 당위성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표현이 ‘신앙생활하면 그것이 밥 먹여주나’, ‘교회 나간다고 옷이 나와 밥이 나와’ 등등의 신앙에 대한 현실성이 없음에 대한 임의적 판단으로 그것을 반론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러한 기준에서 현실을 말하며 그것을 기준으로 당위성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지혜 없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가져온 떡을 가지고 사흘 동안 함께한 자들 그 큰 무리들에게 떡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심은 아주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현실적인 실제적인 것으로써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자신이 생명의 떡으로서 구주로서의 모습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것에서. 현실적이라면, 그럼 지금이라는 현실에서도 그러한 기적을 나타내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하여서는 계시의 반복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인 당위성을 얻는다는 것에서 비로소 그 정당함을 얻는다면 가능한 것이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존적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 나타내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기적의 반복의 여지를 강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것의 부당함도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가운데서 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럼 앞서 오천 명을 먹이신 것과 동일한 형태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과 그러한 반복이라고 함이 지금의 자신들의 반복의 요구를 정당화 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 배고픔이라고 하는 현실을 감안한다고 하는 것이 본문의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그들의 계시적 반복이 요구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반복이라고 하는 것이 여럿의 가능성을 위한 것으로 열려진 것이 아니라, 주의 증거로서 그 신실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은 증인으로 세울 때에는 둘 이상 세우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이 반복적 의미는 바로 증거로서의 객관성을 가진 또한 율법의 가르침에 따른 둘 이상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을 인식하는 증인으로서의 모습으로써 모습들로서 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며 이해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증거의 내용으로써 나타내시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구체적으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현상적인 측면에서의 역사성으로만 본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하신 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시는 것으로 도의적인 차원의 어떤 기적적 의미로서 받을 수 있는 것이 그당시 현실적인 판단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즉 주의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하심을 나타내시는 삶의 연속성에서 본문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하심을 현실적인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 사건으로써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증거와 사실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먼저 사흘동안 주님을 따라 다른 자들을 굶겨 보내지 못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위해 기적을 베푸신 것은 주님의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성도들을 실제적으로 나타내는 현실적인 증거자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의지적 개념과 상관이 있음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말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동안 무덤에 머무실 때에 그와 함께한 자들 주님 안에서 죽고 주님 안에서 부활의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주님을 믿는 성도들을 예표적이면서도 실제적으로 증거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굶겨보내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생명의 떡이 되어주신다는 것으로써 말씀하시며 그들을 위해 진정한 영생이라고 함의 생명을 나타내시겠다는 자기 계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36절에서는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생명의 떡, 영원의 생명을 위한 떡으로써, 영생을 얻을 주의 말씀으로 존재의 생명의 정당함과 그 존재를 지탱하게 하는 말씀을 예표하는 그 현실적인 것으로써의 떡과 물고기는 '제자들'을 통해서 나누어주었습니다.
어쩌면 상식선에서도 주님의 일을 돕는다는 차원에서 당연한 자연스런 모습이지만 우리가 이미 합당하게 기억하고 전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을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사역 가운데서의 그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주의 뜻하심의 실제를 현실적인 실제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이후에 아주 잘 표현하고 있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 1:6~9)
즉 주님과 함께한 사도들과 그들의 신임을 입을 수 있는 자들이 그 사역을 돕고 그들을 통하여서 생명의 떡으로써 물고기와 떡이 나누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바로 예수님을 믿으며 주의 사도들의 전한 바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실재와 실제라는 생명 자체와 그 사실을 받게 되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천명을 먹이신 사역과 아주 좋은 비교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사도들의 손에 의해 주님께 드려졌다는 것과 사도들과 그의 신임을 받은 제자들을 통하여서 그 영생의 말씀이 그 영생과 함께 그 사실의 누림의 축복이 아주 평범하게 주의 택한 백성들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말씀을 통하여서 주께서 받으시고 그 말씀을 통해서 주의 복음이 전파되어지며 주님을 믿어 주님과 법적으로 죽었으며 주님의 부활하심에서 자신의 존재의 정당함을 믿으며 찾는 자들이 주의 성도들이며 주의 먹여주시는 종들이심을 말씀하시길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오병이어를 통한 기적이나 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아주 현실적이라고 함을 말씀드렸던 것을 좀더 분명히 말씀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현실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합리적으로 말하여 변호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실재가 역사성의 형태를 취하는 것으로써 나타난다고 할 때에 우리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방향이라고 함을 분명히 해야하며 역방향의 인식은 정당함을 항상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얻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현실을 위한 신앙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 자존적 정당함으로 현실의 실재를 주관하시고 나타내신다는 것과 그것에서 현실의 사실성을 말함이 형태적으로는 편협함을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과 절대 보편성에 있어서는 진정한 보편적 생각과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상대적인 상식적인 측면에서의 당위성에서 본다면 편협한 사고인 것으로 판단이 가능하지만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과 보편성이 재가되어지는 성경의 안목과 그 사실의 판단은 그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적인 사실들이 재가를 받아 현실이 진정한 사실로 규정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위해 신앙을 조작하거나 필요성에 따라 해석함은 그 정당함이 결여된 것으로 상식적으로도 하나님 앞에서도 편협한 사고와 비판되어질 수 있는 사고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현실을 위해 하나님이 떡을 오늘날도 주지 않는다는 정황에서는 하나님의 자기의 기뻐하심이 판단받을 수 있다고 하는 '신앙이 밥먹여주나'는 말의 속에 담긴 당위성은 부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럴뿐만 아니라 주님은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것에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눅 22:35)
말씀을 맺습니다.
현실적인 실제에 대하여서 이해.. 본문 16절에서 오해의 소지를 지적 5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란 말씀을 기억합니다. 즉 주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시고, 사천 명을 먹이신 가운데서 그들이 필요한 현실적인 것도 챙겨주셨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제자들이 떡 가져오지 못함을 놓고 아쉬워하고 고민하게 되는 가운데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교훈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무엇인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현실적인 실증적으로 나타나야 되며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요 진정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이 평생 먹을 것을 다 짊어지고 다니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주께 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서 지냈던 것과 사르밧 여인의 한줌의 가루로 섬김을 받게 하셨던 것과 같이 초라하지만 그들은 다함이 없는 가운데 기근의 때를 면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과 같이 그 베풀어주시는 상을 기뻐하며 사천 명을 먹이시고 남기신 일곱광주리의 고기와 떡을 예비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일용할 양식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항상 예비해주시는 것이며,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실재적으로 실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음을 진정으로 사실로써 고백하며 또한 사도들의 고백과 같이 동일한 고백속에 주님께 대답하며 우리의 치열한 삶 속에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먹고 마심으로 실족하지 않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감당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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