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월 16, 2006

나라를 새롭게 함

2006년 1월 15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11:1-15
나라를 새롭게 함

사람의 취향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등산이나 그러한 것의 일환으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그와 같은 여유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분들 중에는 막대기나 지팡이를 준비해서 산행을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겨울이어서 뱀을 비롯한 해충들이 거의 없는 상태이지만 그 들고간 막대기나 지팡이들은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지참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러한 뱀들이 나타나서 사람이 물린 상황이라면 그 뱀들을 쫓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뱀에 물린 사람에게 응급처치를 신속하게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여러 산행을 다니신 분들이 아니라면 처음에 산에 간다고 할 때에는 더욱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 인생의 광야 산길을 걷는 인생들.., 두 번 걷는 인생이 아니기에 모두 초행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가운데서 그러한 해로운 것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이스라엘의 왕정시기의 처음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 뱀에 물린 것과 같은 그러한 상황이 전개되어지고 있는 가운데 나타나는 주의 말씀으로서의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2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를 대하여 진을 침에 따라 야베스 사람들이 언약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암몬 사람 나하스는 그들에게 오른 눈을 다 빼어야 너희와 언약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야베스 장로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브아의 백성들이 소리 높여 울고 있는데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야베스 사람의 말을 듣게 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울이 그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어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소를 취하여 각을 뜨고 그것을 사자의 손으로 모든 지경에 보내어 누구든지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 소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함을 말하여 백성들이 나오게 되고 그들을 통하여서 이튿날에 그들을 쳐서 승리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이르는 말로써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냐는 말을 하면서 그들을 자신들이 죽이겠다는 말을 하고 있고 사울이 그날에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면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셨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는 말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말을 하고 있고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사울로 왕을 세우고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기뻐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 초기에 초대왕으로서의 사울이 야베스에서 처음으로 전투를 하게 되는 것이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그러한 정황에서 이스라엘나라의 새롭게 함을 사무엘이 언급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새롭게 하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의 개선이라고 함을 말하기 보다는 그것을 통한 분명한 새로움의 사실을 말하게 된다는 것인데 그것에 대한 시각이 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대화의 기본적인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본문에서도 읽을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야베스 지역을 침공하는 암몬 족속 나하스와 그 야베스 거민들이 취한 내용은 상당히 상대적인 정황적 접근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먼저 언약하자는 그 말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과 같이 사회계약설을 말할 수도 있는 그러한 타협의 모습을 취하였는데 그러한 것에 임의적 권위의 위협으로 나하스는 그 침공의 의사와 그 인식이라고 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개념에서 합리적인 교육적 개념과 권위라는 두개의 기본적인 입장에서 합리적 타협의 당위성을 놓는 권위적 개념에서 밀리게 되니까..야베스 거민들은 그 지역의 사람으로서 성격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즉 야베스는 그 뜻이 '마르다'라는 뜻으로 삭막한 어떤 타협의 여지가 없는 정황속에서 고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사울은 그의 정치적 감각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즉 그는 그 백성들에게 먼저 권위적 정적인 언급으로 정치적 수완을 나타냈던 것인데 그것이 자신이 가진 소를 각을 뜨고 그를 따르지 않는 자는 그의 소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는 아주 자극적인 정치적 권위의 보임으로 말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동원된 삼십삼만명의 사람들에게 일방적인 전쟁의 승리를 그 기한까지 말하고 또한 그것을 지켰던 것입니다.

초대왕 사울은 그러한 정치 감각은 있었지만 신앙적인 측면에서 믿음의 행보라고 하는 것은 많이 결여되어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으로 왕으로 등극했을 때에 그 체제개편이라고 하는 것을 위해 노력했어야 하는데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소를 몰고 자기 기업에 관한 일을 하였습니다. 사울은 아주 상식적인 판단력과 상대적인 여지를 둘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정치적 개편과 그러한 노력을 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그러한 구상적 질서를 말씀하시기까지 무작정 기다린다는 측면에서 신앙으로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왕으로 취임하게되는 기름부음도 받고 미스바에서 이미 왕으로 추대하였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채제적인 개념에 대한 적극적인 뜻하심을 자신이 아니면 사무엘을 통해서라도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그 지도자로서 옳은 것인데, 그러한 의무의 이행을 상대적인측면에서 무작정 기다림이라는 겸손으로 잘못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그가 믿음으로 행할 것인가 아닌가 분별함에 있어서는 이미 결여되어진 그의 중심을 읽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수완으로써의 잘 대처한 사울은 야베스를 침공하려고 하던 암몬사람 나하스를 물리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신앙적으로는 온전한 승리를 이루지 못한 부끄러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미 정황적 상황을 고려할 때에는 야베스를 침공한 나하스를 물리쳤지만, 나하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마치 뱀의 독이 이미 몸에 퍼지는 것과 같이 작용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암몬 사람 '나하스' 그 이름의 뜻은 '뱀'(serpent)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의 의도라고 하는 것은 이미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오른 눈을 다 빼어야 언약을 체결하겠다는 것 그의 중심은 화평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힘의 논리에서만 비로소 본다면 사울의 이끄는 이스라엘이 승리했지만 그 이겨 취한 화평에 있어서는 나하스의 의도한 바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이 감기워지고 있고 그들의 심령이 여전히 마른 광야 단단한 땅과 같이 씨앗을 받을 수 없는 황무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에서 읽을 수 있는 인식이라고 함을 주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사울이 가로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삼상 11:12,13)

비교되어질 수 있는 인물 사무엘과 사울 그 둘은 모두 요구되어진 인물들로서 공통점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큰 차이점은 사무엘은 '하나님의 들으심'이라고 함의 존재적 정당함에서 비로소 주어진 아들로서의 사사이고, 사울은 이스라엘의 욕망에 대한 요구되어진(desired)이 사울의 이름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택함과 청함만의 모습으로 둘다 초대되어진 가운데서 그 청함만의 모습으로 그 택함을 임의적으로 인식하는 그러한 분별력이 없는 자들의 모습과 그 중심의 인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미 '이스라엘의 왕의 요구'를 기뻐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를 원치 않는 가운데서 요구되어지고 있는 그들의 인식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이스라엘의 전공이라고 하는 현실적인 사실을 가지고 사무엘에게 직접적으로 사울의 왕됨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자들을 죽이겠다고 하는 것은 앞서 말한 하나님 앞에서의 그 사실규정과 그 정당함을 따르는 것을 이미 버린 자의 모습으로 그 눈이 감기웠던 것이며 그 시력이 이미 뽑힌 바와 같은 것입니다. 즉 나하스의 의도한 언약적 평화라고 하는 것이 그 악한 시험이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사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말은 정치적으로 자신의 관용적 덕을 나타내고 자기 사람을 보호한다는 그러한 측면에서 사무엘을 두둔하고 있고 그 두둔은 믿음이라고 하기 보다는 상대적인 측면에서 즉흥적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날에 주의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은 주의 구원을 베푸시지 않는 날에는 이미 사무엘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여전히 판단받을 수 있는 것을 열어놓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무엘이 길갈로 올라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말을 하고, 사울과 이스라엘이 그렇게 함을 기록하고 있는데, 순전한 상황적 정치적개념으로 본다고 하면, 사무엘이 위기 모면적 개념으로 자신의 종교적 입장을 통한 백성들과의 화해적 제스쳐로서 말함이 아주 해석적 의미로 읽을 수도 있는데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은 사무엘이 오히려 정통성이 있는 미스바로 가는 것이 더 합당하다는 것을 왜 마음에 두지 않았는가 하는 것에 답변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길갈로 가자고 한 것은 그 길갈의 이름의 뜻이 '굴러가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으로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왔을 때에 돌무더기를 증거더미로 쌓고 그곳에서 할례를 행함으로써 '애굽의 수치가 굴러가다'는 뜻으로 사용한 언어와 명칭입니다.

사무엘이 미스바보다는 그 '길갈'로 올라가자고 언급한 것은 바로 앞서 말한 뱀과 같은 나하스의 의도적 언약적 개념의 죄악이 더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렵히는 자리에 나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회개와 하나님께 화목하게 하는 자리에 서도록 백성을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합목적적인 측면에서 사울은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그러한 중심으로 백성들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결과 모두가 기뻐했지만 그 실제적인 거룩함과 그러한 나하스의 언약적 화평에 따른 죄의 권세는 하나님의 언약적 재가가 있는 다윗의 시대에서 온전히 실제적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함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재가라고 하는 것에서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음을 그에게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언급한 것과 같이 '나라를 새롭게 하자'라는 사무엘의 증거는 하나님으로부터 존재적 정당함을 얻는 가운데서 사실을 말하는 언약의 재가와 판단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 진정한 새로움의 사실까지 말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한번 살게 되는 인생 그리고 주님안에서 복음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걸음으로서 산을 넘게 되는'(사 52:7) 가운데 여러 시험들이 오게 되는데 그것을 형태적인 측면 상황적 측면의 완수라는 개념만으로 시험의 사실을 벗어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러한 것을 통해서 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그리고 그 가운데서 그러한 사실들로 인해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중심을 가질 때에 날마다 우리 성도들은 주의 새롭게 하신 형상적 영광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이 되며 하나님의 뜻하심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우리의 삶 속에서도 나타내는 자들이 되어진다는 것을 마음에 둠이 합당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왕되심과 그의 통치하심이 나의 삶에 나타날 수 있도록 기만적 사실들을 분별해 낼 수 있도록 주의 말씀하심을 통한 사실 규정을 잘 믿음으로 받으시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예수께서 왕되심의 대한 증거로서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새롭게 된 심령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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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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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2006년 1월 15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1:18-46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일반적으로 어떤 내용을 표현하는 것의 제목은 긍정적인 것이 좋고 그러한 가운데서 호감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주의 말씀을 증거함에 있어서도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데 부정의 부정이라는 것이 강한 긍정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때에 예외적인 행함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방법론에서 비로소 말하려고 함의 의미는 아닙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그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말씀과 그 계시적 개념을 읽게 하심으로 열매를 맺는 자들의 모습은 어떤 중심을 가져야 함이 마땅한지를 또한 읽게 하심을 주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의 상식이라고 하는 것이 여러 사람들의 시대적 인식의 반영이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도 그 임의적 판단의 자유라고 하는 것이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얻는 것을 도외시 한다면 그것은 그 상식이라고 하는 시대적 인식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8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3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33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두 번째 들어오시면서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어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음과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어찌하여 그런 것인가 질문함에 주 예수께서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무화과에게 된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하여도 될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을 것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서 주님의 행하심에 대한 권세를 질문함에 주께서 세례요한에 대한 것이 하늘로서인가 사람에게로서인가 질문하심과 그들이 알지못한다는 것에 대한 말에 답변하시지 않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비유로 두 아들에 대한 순종함의 여부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요한이 의의도로 왔거늘 믿지 않음을 인하여 믿은 세리들과 창기들은 하나님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33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시 한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악한 농부들에게 주인이 아들을 보내니 그를 상속자라고 죽이고 유업을 차지하려고 하였는데 그 포도원 주인이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말씀에 저희가 악한 자는 진멸하고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 것이라고 답변함이 기록되었고, 이에 주께서는 건축자의 머릿돌을 버리는 자들이 있을 것을 성경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을 것을 말씀하시니 그 당시 그곳에 있던 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들 자신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알았지만 무리들을 무서워함을 인하여서 예수님을 잡고자 했을 뿐이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로 지목되어지는 '무화과의 마름'을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믿음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상식보편의 기반에 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열매 맺지 못하는 것으로써 신앙을 왜곡하는 것으로써 나타날 수 있음을 우리 성도들이 주목하고 주의하여야 할 것과 적극적으로 잘 분별해야 함이 그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을 유의하여 볼 때에, 마태복음 21장 1절에서 17절 말씀 즉 오늘 본문에 앞선 본문으로써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에 있어서 그리고 그 성전을 깨끗케 하심에 있어서 그 앞서 주님이 ‘벳바게’(house of unripe figs)라는 곳과 ‘베다니’에 머무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미숙한 무화과의 집’이라는 뜻과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예루살렘이라고 함의 정체성 그리고 그 기본적 정신적 신앙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써의 성전이라고 함에 비교되어지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미숙한 무화과라고 하는 것이 그 미숙할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라고 함을 지적하심이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문맥적인 정황을 살펴보면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비유적 계시의 모습으로써 무화과 나무를 마르게 하심은 그 정체성을 바르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어떤 배고픈 사람이 그 정신적인 히스테리식의 입장에서 정신나간 능력으로써 나무에다가 저주를 퍼붓는 것과 같이 오해하고자 한다면 그의 해석은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미 미숙한 무화과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포도원지기로서의 그 무화과 나무들을 돌아보시는 농부로서의 주님의 모습을 전제적으로 볼 수 있도록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그 당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의 질문함에 대하여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1~22)입니다.

'이런 일만 할뿐만 아니라'는 말씀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무화과 저주라는 개념으로 저주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땅에서도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라고 하셨던 교회의 권세를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믿음으로 주의 복음의 순수성과 그 성도를 위한 교회의 징계적 개념을 말씀하시고 있고 이것은 또한 최종적 하나님의 심판하심에서 그 사실의 결정적인 심판이 있게 되어지지만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사실로 받을 수 있는 그러한 믿음의 목양적 입장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씀하심에서 주목하는 것은 이 산들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역시 그 산들이 포도원이라고 함을 나타내는 체계적 기반을 말하는 것으로써 요한 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힘센천사가 돌을 바다에 던지는 것과 그 돌이 가라앉는 것'(계 18:21)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힘센천사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게 되면서도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재가를 받은 종들로써 주의 복음의 사실을 말함으로써 개연적인 사상들 특히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많은 강조되어진 말들과 그 인식들의 기초를 부인하게 될 것을 나타냄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18장에서는 바벨론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그 바벨론의 그 뜻은 '신들의 문'이라는 뜻과 '혼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신의 속성 즉 그 절대라는 개념을 임의적으로 말하여서 사실을 조작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여러가지 사상들의 합리화된 말로 하나님의 사실을 부정하려고 하는 그러한 총체적인 것이 혼돈과 그 이름으로써의 신들의 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정당성과 타당성에 대한 논의를 철학에서도 많이 말하고 있고 철학적 정당함의 합리성을 신학과 신앙적 정당함으로 둔갑시키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가장 무난하게 신앙과 신학계에 들어온 것은 바로 '상식보편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향력에서 신학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대세라고 할 수 있다면 참으로 애통할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곳에서 더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그 뜻하심을 기억할 때에 한국교회의 성장적 개념을 재검토함도 종들로서 해야할 하나의 숙제가 되어질 것입니다.

이후에 나타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에서는 요한복음 8장에서 읽을 수 있는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도 먼저 있었다는 말에 돌을 들던 사람들'(요 8:56~59)로써 소위 '취득시효'라는 개념 즉 먼저 취득한 자의 소유권적 기득권적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기반으로 주님께서 행하시는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자존적 왕적 권세로 상식적인 개념을 구별하여서 말씀하심으로 두 아들의 순종여부로 말씀하시는 재가되어진 상식적인 측면에서의 가르침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농부에 대한 비유로써는 41절에 나타나고 있는 말씀으로써 실과를 제때에 바칠 농부들에게 주님의 포도원에서 정당한 농부들로서 존재적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그 정체성을 통해 기뻐 순종할 수 있도록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당함의 시비를 말함에 있어서 구교에서 한때 변증적으로 사용하였던 것과 같은 잘못된 소위 '취득시효'적 개념으로써의 권위를 비로소 의지하지 않고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사실이 되어진다는 정당함에서 그 사실의 권위를 인식하도록 말씀또한 해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기독교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맹목적인 신비와 그것을 빌미로하는 상식의 종교는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핑계할 수 없다는 말은 상식적이기 때문에 비로소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말씀하심에서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사실이 그리고 그러한 상식이 그 실제를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핑계할 수 없다는 말을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에서 비로소 생각하지 않고 상식적인 신앙적 전통적 개념에서 비로소 말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종들이 주의 복음을 나타내며 주의 포도원으로서의 교회를 돌아보며 목양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받으실만한 성도들의 모습과 열매를 맺히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예수님 안에서 그 사실을 구별해내는 가운데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제때에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열매를 맺어드리는 충실한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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