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월 16, 2006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2006년 1월 15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1:18-46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일반적으로 어떤 내용을 표현하는 것의 제목은 긍정적인 것이 좋고 그러한 가운데서 호감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주의 말씀을 증거함에 있어서도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데 부정의 부정이라는 것이 강한 긍정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때에 예외적인 행함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방법론에서 비로소 말하려고 함의 의미는 아닙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그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말씀과 그 계시적 개념을 읽게 하심으로 열매를 맺는 자들의 모습은 어떤 중심을 가져야 함이 마땅한지를 또한 읽게 하심을 주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의 상식이라고 하는 것이 여러 사람들의 시대적 인식의 반영이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도 그 임의적 판단의 자유라고 하는 것이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얻는 것을 도외시 한다면 그것은 그 상식이라고 하는 시대적 인식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8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3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33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두 번째 들어오시면서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어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음과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어찌하여 그런 것인가 질문함에 주 예수께서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무화과에게 된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하여도 될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을 것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서 주님의 행하심에 대한 권세를 질문함에 주께서 세례요한에 대한 것이 하늘로서인가 사람에게로서인가 질문하심과 그들이 알지못한다는 것에 대한 말에 답변하시지 않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비유로 두 아들에 대한 순종함의 여부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요한이 의의도로 왔거늘 믿지 않음을 인하여 믿은 세리들과 창기들은 하나님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33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시 한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악한 농부들에게 주인이 아들을 보내니 그를 상속자라고 죽이고 유업을 차지하려고 하였는데 그 포도원 주인이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말씀에 저희가 악한 자는 진멸하고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 것이라고 답변함이 기록되었고, 이에 주께서는 건축자의 머릿돌을 버리는 자들이 있을 것을 성경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을 것을 말씀하시니 그 당시 그곳에 있던 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들 자신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알았지만 무리들을 무서워함을 인하여서 예수님을 잡고자 했을 뿐이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로 지목되어지는 '무화과의 마름'을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믿음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상식보편의 기반에 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열매 맺지 못하는 것으로써 신앙을 왜곡하는 것으로써 나타날 수 있음을 우리 성도들이 주목하고 주의하여야 할 것과 적극적으로 잘 분별해야 함이 그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을 유의하여 볼 때에, 마태복음 21장 1절에서 17절 말씀 즉 오늘 본문에 앞선 본문으로써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에 있어서 그리고 그 성전을 깨끗케 하심에 있어서 그 앞서 주님이 ‘벳바게’(house of unripe figs)라는 곳과 ‘베다니’에 머무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미숙한 무화과의 집’이라는 뜻과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예루살렘이라고 함의 정체성 그리고 그 기본적 정신적 신앙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써의 성전이라고 함에 비교되어지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미숙한 무화과라고 하는 것이 그 미숙할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라고 함을 지적하심이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문맥적인 정황을 살펴보면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비유적 계시의 모습으로써 무화과 나무를 마르게 하심은 그 정체성을 바르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어떤 배고픈 사람이 그 정신적인 히스테리식의 입장에서 정신나간 능력으로써 나무에다가 저주를 퍼붓는 것과 같이 오해하고자 한다면 그의 해석은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미 미숙한 무화과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포도원지기로서의 그 무화과 나무들을 돌아보시는 농부로서의 주님의 모습을 전제적으로 볼 수 있도록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그 당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의 질문함에 대하여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1~22)입니다.

'이런 일만 할뿐만 아니라'는 말씀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무화과 저주라는 개념으로 저주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땅에서도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라고 하셨던 교회의 권세를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믿음으로 주의 복음의 순수성과 그 성도를 위한 교회의 징계적 개념을 말씀하시고 있고 이것은 또한 최종적 하나님의 심판하심에서 그 사실의 결정적인 심판이 있게 되어지지만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사실로 받을 수 있는 그러한 믿음의 목양적 입장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씀하심에서 주목하는 것은 이 산들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역시 그 산들이 포도원이라고 함을 나타내는 체계적 기반을 말하는 것으로써 요한 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힘센천사가 돌을 바다에 던지는 것과 그 돌이 가라앉는 것'(계 18:21)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힘센천사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게 되면서도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재가를 받은 종들로써 주의 복음의 사실을 말함으로써 개연적인 사상들 특히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많은 강조되어진 말들과 그 인식들의 기초를 부인하게 될 것을 나타냄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18장에서는 바벨론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그 바벨론의 그 뜻은 '신들의 문'이라는 뜻과 '혼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신의 속성 즉 그 절대라는 개념을 임의적으로 말하여서 사실을 조작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여러가지 사상들의 합리화된 말로 하나님의 사실을 부정하려고 하는 그러한 총체적인 것이 혼돈과 그 이름으로써의 신들의 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정당성과 타당성에 대한 논의를 철학에서도 많이 말하고 있고 철학적 정당함의 합리성을 신학과 신앙적 정당함으로 둔갑시키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가장 무난하게 신앙과 신학계에 들어온 것은 바로 '상식보편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향력에서 신학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대세라고 할 수 있다면 참으로 애통할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곳에서 더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그 뜻하심을 기억할 때에 한국교회의 성장적 개념을 재검토함도 종들로서 해야할 하나의 숙제가 되어질 것입니다.

이후에 나타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에서는 요한복음 8장에서 읽을 수 있는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도 먼저 있었다는 말에 돌을 들던 사람들'(요 8:56~59)로써 소위 '취득시효'라는 개념 즉 먼저 취득한 자의 소유권적 기득권적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기반으로 주님께서 행하시는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자존적 왕적 권세로 상식적인 개념을 구별하여서 말씀하심으로 두 아들의 순종여부로 말씀하시는 재가되어진 상식적인 측면에서의 가르침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농부에 대한 비유로써는 41절에 나타나고 있는 말씀으로써 실과를 제때에 바칠 농부들에게 주님의 포도원에서 정당한 농부들로서 존재적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그 정체성을 통해 기뻐 순종할 수 있도록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당함의 시비를 말함에 있어서 구교에서 한때 변증적으로 사용하였던 것과 같은 잘못된 소위 '취득시효'적 개념으로써의 권위를 비로소 의지하지 않고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사실이 되어진다는 정당함에서 그 사실의 권위를 인식하도록 말씀또한 해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기독교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맹목적인 신비와 그것을 빌미로하는 상식의 종교는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핑계할 수 없다는 말은 상식적이기 때문에 비로소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말씀하심에서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사실이 그리고 그러한 상식이 그 실제를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핑계할 수 없다는 말을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에서 비로소 생각하지 않고 상식적인 신앙적 전통적 개념에서 비로소 말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종들이 주의 복음을 나타내며 주의 포도원으로서의 교회를 돌아보며 목양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받으실만한 성도들의 모습과 열매를 맺히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예수님 안에서 그 사실을 구별해내는 가운데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제때에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열매를 맺어드리는 충실한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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