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6월 24, 2005

수치를 모르는 백성

2005년 6월 24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습2:1-15
수치를 모르는 백성

이제 얼마 있으면 장마가 있다고 하는데, 그 전에 집안 청소나 여러 옷가지나 이불 등을 세탁을 해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일상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에 오물이나 때가 잘 지워지지 않는 경우에는 참 속상합니다 그런데 표백제를 잘못 쓴다거나 할 때에는 또 지워지지 말아야 할 색들이 탈색되어질 수 있는 경우에도 참 속상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물에 씻겨져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을 것을 잘 구분하여서 판단할 때에 유익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심의 진멸하심에 대한 것에서 그 남은 자의 사상 그 분노에 숨겨진 자의 모습으로서의 구원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모두가 멸망당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숨겨주심이라고 하는 것 죄로 인하여 멸망이 아닌 구원의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 죄라고 함의 수치라는 것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책망하는 선지 스바냐의 증거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그리고 12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선지자 스바냐가 앞서 1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좇지도 아니한 자와 찾지도 않는 자를 멸절하리라는 말씀에 이어서,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이 모이라고 말하며 그들의 신앙의 진정함을 내보이라는 측면에서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는 말과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가사와 아스글론 아스돗과 에그론과 같은 해변거민들과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 거민이 없게 하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변은 초장이 되어 목자의 움과 양떼의 우리가 거기 있을 것을 말하며 그 지경은 유다족속의 남은 자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압과 암몬 자손의 훼방에 대하여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곳에 존재적 자리매김이 되어질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네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구스 사람들이 살륙당할 것과 동방의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를 황무케하여 사막같이 메마르게 하실 것을 말씀하시며 그 메마름에 대한 되어질 일들에 대한 묘사로 폐허적 모습을 기술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진노로부터 숨김을 받은 자로서의 증거로써 수치를 모르는 것에 대한 책망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로 지목되어진 자들의 중심과 인식을 주목해볼 때에, 먼저 '블레셋 땅 가나안'이라는 존재에 대한 심판을 주목합니다. 이 '블레셋'이라는 뜻은 '이민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밖의 지역에서 들어온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토 기업의 소유권을 본래적으로 주장할 수 없는 자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본문의 문맥적인 개념에서는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겸손한 자들에게 그 기업이 돌아갈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으로 자신의 소유라고 함을 말하는 자들이 수치를 당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종들의 존재와 기업이라고 하는 것을 죄악 가운데서의 불법적 소유를 주장하는 마귀들과 그들의 그늘에서 존재적 정당함을 찾는 자들의 모습이 수치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모압과 암몬 족속에 대한 주의 판단이 스바냐 선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내 백성을 훼방하고 스스로 커서 그 경계를 침범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습 2:8~9 중)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모압과 암몬이라는 존재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롯은 그의 딸 둘과 함께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시는 심판을 피하여 소알성으로 피하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두 딸들이 아버지와 정욕적인 입장을 자기 임의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들이 인종을 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창 19:31~38) 이는 이미 아브라함의 사람들도 있었기에 그 딸들의 판단은 정욕적인 개념을 나타내며, 성립되어지지 않는 인륜적 개념으로 주의 뜻하심의 허락되어지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는 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언약의 백성들로서의 아브라함의 족속과는 달리 나타나고 있고 상대적인개념으로 사실을 임의적으로 말하려는 가운데서 그들의 한계를 넘어서서 주의 택한 백성들의 기업의 사실을 부정하여 자신들의 뜻함을 취하려고 하는 악함이 있음을 주목하게 되며 이러한 사실은 믿음의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함의 전통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가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서 앗수르와 그 수도로써의 니느웨에 대한 주의 판단하심이 나타남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사실 앗수르는 셈족계통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함의 족속이 그들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을 경험하였으나 그 언약의 사실을 힘써 부인하는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이르는 자들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증거를 받았을 때에 회개의 경건의 모습이 있었지만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라 '혹시나'의 개연적 신비에 따른 것으로 진정한 회개가 아닌 것이었습니다.(욘 3:9)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심판의 판단이 되어지는 그 수치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사실을 기억하지 않고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을 죄아래 팔며 그것을 자신의 소유라고 우기는 마귀들과 그러한 인식을 가진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하심의 사실일 인정하지 않고 상식적인 개념으로 간과하려는 악함과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주의 복음의 사실이 진정한 사실임을 믿지 못하는 것으로써 '혹시나 신앙'이라는 개연적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가지론적 입장이 그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수치라는 것의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과 사실을 찾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백성들로서 요단강을 건너 할례를 받았을 때에 그 길갈에서의 이름과 같이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고 고백하였던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도 주 예수님을 믿으며 주의 말씀과 그 말씀의 재가를 받을 수 있는 것들이 사실임을 기억할 때에, 죄로 인한 심판의 자리에서의 영벌에 처하게 되어지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수치라는 것은 이미 굴러 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의 상대적 표현으로써의 사실을 임의적으로 상대적인 것으로만 취급하고 자존의 절대자를 상대적인 절대자로써 인식하고자 하는 가운데 임의적 신을 말하고 하나님이 부정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어리석음과 수치에서 자리를 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참으로 스바냐 선지자와 같이 자존의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존의 절대의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것을 선히 취하셔서 복음의 사실을 말씀하심에 따라 세상이 잠잠하라는 것을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핑계치 못할 복음에 대하여서 말함과 동일한 것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스바냐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에 숨겨진 자들로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으로 하나님나라의 기업을 얻는 자들로서 주의 복음의 진정한 사실을 증거하시는 가운데 주의 택한 백성들이 수치를 주의 이름으로 벗을 수 있도록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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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가능과 유익에 대하여

2005년 6월 22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6:1-20
가능과 유익에 대하여

한 집단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표현이나 자유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지 못하는 그러한 정황에, 소위 길들여진다는 부적절한 표현이 가능한 정황에, 적응해나가는 것이 삶의 한 모습이 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어떤 가능성을 꿈꾸며 또한 그러한 것을 추구하는 자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에 한번쯤 눈을 돌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역사적으로도 고전적인 측면을 주장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낭만적인 그러한 사조들의 대립적 영향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인생들의 인식적인 일반적인 경향이 그렇다고 함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낭만적인 것을 넘어서 실증적인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고 오늘날에서는 유익을 말하는 이러한 실증적인 것이 일반적인 실제적인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의 주 앞에서 충성된 종으로서의 자리매김하고자 할 때에 그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고심하게 되어지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심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음행이 있음에 대한 것을 책망하는 가운데서 이어지는 말씀으로서 성도의 세상을 판단하는 권한이 있는데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 경히 여김을 받는 자를 세움에 대한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히 여기는 자들에게 송사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그러한 일을 행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바에야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않은가라는 반문을 하면서 그 속이는 자는 너희 형제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불의한 자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음욕과 탐심으로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함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든 것이 사도 바울에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모든 것이 자신에게 가하나 아무에게든지 자신이 제재를 받지 않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몸으로 죄를 짓는 것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으로서 우리 것이 아님에 대한 것을 상기하고 값으로 산 것이므로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이 가하나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며 책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중심이 이어지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서 그 유익의 사실을 말하고 분별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분파적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주를 위한 충성이라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의 분별력이 진정한 사실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먼저 말했던 것입니다. 즉 충성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스스로 행하는 가운데서의 열심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돌적 개념으로 실생활에서 영향력을 끼치게 되고, 견인적 역활을 하거나 반목을 가져온다는 것을 지적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열매로서의 하나인 ‘충성’을 구하는 자들로서 그 실재의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 진정으로 충성을 구하는 자의 기본적인 신실함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고 자기 기만적 충성에서의 임의적 ‘나대로의 충성’이라는 판단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의 연장선에서 사도 바울은 이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생각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이 자신을 판단함에 있어서도 주의 말씀 안에서 판단하는 것을 말하는 것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 자신이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된 것이라는 사실을 받을 때에 음란이라고 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그러한 것을 감추고 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의 유익을 말하는 것 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가운데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분별하고 그것이 진정한 사실임을 받을 수 있을 때에 자신의 명예에 따라서 정치적으로 파당적 지지세력을 말하는 자리에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분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사실규명을 세상의 법정에 세우는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세상의 법정에 전혀 호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을 그러한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상대적인 사회적 법정에서의 규명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도 판단받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할 때에는 일반 법정에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 자들이 아니 가리지 않으려는 자들의 거짓됨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음행이라고 하는 것의 죄가 있으니 그것을 회개하지 않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심판하심의 사실을 기대하고 하나님의 법정에 세울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당하지 못한 일에 대하여서 분별이 있어야 한다는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자신은 그들보다도 더 악한 일을 행한 자로서 판단받음이 가하지만 그러한 제제를 받지 않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그 증거하는 권세는 사도 바울로부터 비로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은 것으로써 말해야 하는 당위성이 합당하며 합당한 유익의 사실을 말할 수 있기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유익이라는 사실이 있을 때에 그 유익의 사실로서 판단의 가치관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유익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유익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능성으로서만 전락되어지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충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나갈 수 있는 것으로서 우리의 몸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할 때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판단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것의 한정적 의미를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사단은 음욕이라는 탐심이라는 개념의 우상으로써 그 충성의 자리를 막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나라의 유업을 얻지 못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믿음의 책망을 함으로써 또한 충성된 자가 어떤 자인가를 보이며 자신을 본받을 수 있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피로써 사신 성도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로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 자신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학적 개념에서의 우리 존재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겸손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소유되어진 것으로서 우리의 것임을 기억할 때에 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일관하고 그것으로 우리 몸을 주장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불법의 사람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당함을 얻는 것이 진정한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면서 이러한 우리 존재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자리에 서며, 임의적 가능성에 따른 자신에 대한 잘못된 변명으로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고 사실분별을 세상적으로 행하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충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되어진 자라는 사실앞에서, 가능성이라는 개념만 생각하여 음욕과 탐심의 자리에, 잘못된 임의적 자신을 변명하며 불법적으로 섬긴다는 거짓된 자리에 서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잘했다 칭찬을 받는 자리에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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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스바냐의 증거

2005년 6월 17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습1:1-6
스바냐의 증거

아름다움으로써의 낭만을 말하게 되는 그러한 문학적 소재로써 사용되어지는 별에 대하여서 말할 때에 그 ‘별(星)’자체의 것을 말하기 보다는 그 별빛에 더욱 의미를 두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별들이 사막에서는 길을 안내하는 것으로 천문학적인 측면을 말하게 되거나 점성적 미신을 말하게 되어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시며 아들이신 메시아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별을 사용하여 초자연적 구별적인 뜻하심으로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밤하늘의 별, 무수한 별들이 있다고 하여도 주의 구별적 사실로서의 증거를 나타내게 하심의 정당함을 입은 별이 그 계시를 담당하게 하심을 입었기 때문에 모든 별들이 존재해도 주의 뜻하심의 것은 감추어진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처럼 ‘별이 빛나는 밤’에 주의 뜻하심을 위해 감추어졌던 작은 별과 같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던 별과 같은 주의 빛을 비추는 자의 모습이 바로 스바냐 선지자의 증거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스바냐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숨겨주시는 자’라는 뜻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스바냐 선지자가 어떤 자인가에 대한 언급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히스기야의 현손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가 증거하는 내용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실 것에 대한 것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진멸하심에 대한 것의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것을 지적하시며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한 것과 찾지도 구하지도 아니하는 자들임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선지자의 소개에서 읽게 되어지는 영적인 뜻하심의 증거와 예수님의 비유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이루는 종들의 모습으로서 신약성도들의 모습의 온전성을 지칭하고 있으며 신구약 성도들의 동일한 성도로서의 옳은 자리에 서도록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선지자의 소개에서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이라고 함을 말씀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역사를 주관하는 실체로서의 모습임을 기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후손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사 20:14~18) 이러한 것은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그 행한 일에 대하여서 그 정당함을 찾지 않았던 것이며 그가 아람군대를 물리친 것의 사실이 자존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되어진 사실이라는 것의 정당함을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후에 이러한 히스기야의 후손들이라고 하는 자들은 모두 잡혀가는 자들로서의 죄악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자라는 이름의 스바냐를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 자존의 하나님의 정당함을 입는 가운데서의 판단받는 것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들이 바르게 증거하지 않고 그들이 상대적인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고 있는 상황이어서 진정 하나님이름의 실재적 기반에서 판단하는 사실 분별이 없는 때였습니다. 즉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그러한 때 많은 이들이 현란한 말로 세상의 빛과 같이 비춘다고 할 수 있는 그 때에는 진정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밤의 의미없는 별들이 되어지고 이들을 추종하는 자들이 있고 그들에게 마음을 두며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아 사실을 말하는 자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현손이면서도 즉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다는 그러한 존재적 정당함을 찾는 그의 이름이 무시되어지는 가운데서의 바벨론 포로가 예정되어진 가운데서 판단되어질 수 있는 사람 중에서의 혈통임을 읽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남겨두시고 숨겨두신 자로서 꼭 엘리야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고 명하고 진정한 사실이 하나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바냐가 별과 같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고 있다는 것과 이것은 예수님을 인도하던 그러한 초자연적 구별적 증거로서의 빛을 비추는 자로 세움을 받음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신앙을 증거하였던 것과 같이(왕상 18:39) 이후에 다른 엘리야 세례요한이 와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던 것과 같이 그처럼 그들은 정황적인 입장에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암흑속에서의 빛들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새벽별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한 그 증거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에서 우리는 주께서 천국의 비유로 말씀하신 '밭에 감추어 두신 보화'(마 13:44)를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자신의 생명과 평안을 위한 책임지기 위한 것으로써 노동을 의지하는데 자신에게 영원한 생명의 사실을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었을 때에 예수님을 인한 그 노력을 위한 밭을 전적으로 사는 모습을 읽게 하시는 것입니다. 삶과 고통과 모든 것을 지불하고 찾으려고 했던 것의 진정한 사실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시며 주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임을 주님의 비유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로서 첫번째가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그 기도인 것입니다. 모든 노동이라고 하는 것과 밭을 가는 것과 같은 삶이라고 하는 것의 사실과 합목적성의 정체성이 진정한 구원과 생명의 사실을 말씀하시는 주님을 믿는 것과 주 안에서 찾을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에서부터 그 정당함을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따라서 사실을 분별하라고 하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스바냐서는 이 스바냐 선지의 존재적 자기 증거가 되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감추셨다'는 그 이름에서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진노의 감추인 자로서 남은 자의 사상으로 이어지는 이것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로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써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에 피곤한 인생을 가르치는 교훈들은 모두 별처럼 빛나는 것과 같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즉, 수백만광년이 떨어진 곳에서의 별의 빛이라고 하면 이미 사라진 존재로서의 별들의 빛이 수신되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에 그러한 많은 교훈을 행하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식으로 생각해서 하나님의 절대적 증거를 상대화하며 사실을 말못하는 그러한 세대 속에서도 우리 성도들은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는 자신의 절대 자존적 정당함으로서 자신의 백성들을 그의 피로 사시며 소유하시며 그의 형상으로 행하시게 하심으로 믿음으로 사실을 규정하는 권세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예'(고후 1:20)라고 한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와 같이 믿음안에서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안에서 사실을 분별하여 복음의 사실이 진정한 사실임을 증거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하는 종들로서의 합당한 증인들이 되시며, '사람들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들로서 별과 같이 주 앞에서 빛나는 귀한 종들'(단 12:3)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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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6월 09, 2005

충성을 구하는 자에게

2005년 6월 8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4:1-21
충성을 구하는 자에게

조금 시간이 지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구할 것은 충성이요’라고 외쳤던 어떤 분에 대한 기억은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고, 저도 뒤늦게 서점에 프로마이드로 세워둔 그림을 보며 알게 되었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서 재고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충성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스스로 행하는 가운데서의 열심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돌적 개념으로 실생활에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충돌이라고 하는 것이 신선한 견인차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극단의 반목으로 향하게 되어질 수 있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한다면 그 반목에서 비롯되어지는 가운데서 소원해지는 그러한 경향도 있습니다.

이처럼 충성이라는 것이 충돌적 개념의 것이 주의 화목케 하심과 반목적인 개념으로 자리매김 되어지는 것은 분명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과연 하나님의 성령의 열매로서의 하나인 ‘충성’을 구하는 자들로서 그 실재의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 진정으로 충성을 구하는 자의 기본적인 신실함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고 자기 기만적 충성에서의 임의적 ‘나대로의 충성’이라는 판단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4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 것이며 그 믿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을 자신이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다만 자신을 판단하실 이는 주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고 하며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함을 나타내실 것과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아볼로와 자신으로 본을 보였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임을 말하고 있으며 그것으로써 누가 우리를 구별하였는가 하는 것에 대한 자각을 깨닫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 자신과 아볼로가 약하고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강함에 대한 인식을 이해하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언급한 자신들의 강함이라고 함을 인식하라고 말함에 있어서 액면적인 부끄러움이라고 하는 것으로 강권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밝히면서 복음으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낳았음에 대한 것을 말하며 자신을 본받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인하여서 디모데를 보냈다고 함을 말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행사 가르치던 것이 생각나게 하리라고 함을 말하며 또한 그 어떤 이들의 스스로 교만함이 있으나 그 교만함의 정도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음에 대한 것을 그 충성을 구하는 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충성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러한 충돌의 역할적인 개념에서 그것을 비로소 분별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 성령의 은사로서의 그 실재를 분별하는 가운데서 주의 화목케하심과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하심의 뜻하심을 받들 수 있도록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구할 것으로써의 충성’에 대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교인 가톨릭과 신교인 기독교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을 이해함의 차이라고 함은 본문에서도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할 때에 ‘스스로’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가운데서의 통일성을 말해야 하는데, 어쩜 어떤 한 규범적 개념으로 인위적인 통일성을 말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구교에서는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이 ‘스스로의 존재의식’을 우리 인생이 모두 가지고 있는데 죄를 지은 가운데서도 왜곡되어진 것과 주 안에서 회복되어지지 않는 한 회복되어질 수 없는 타락의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스스로라는 개념을 임의적으로 인증되어지지 않는 자의적인 존재의식으로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처럼 우리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믿음으로 스스로 행할 때에 그것이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그것이 믿음으로 행하는 충성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분량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억지로 그것을 획일화되어진 통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입는 것이라는 것에서 통일성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분별하지 못할 때에는 의식의 여부의 판단을 받지 않는 획일적 통일성과 그러한 것들의 충돌은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충성이라는 개념으로 미화되어지는 가운데 교회의 ‘쓴 뿌리’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첫 번째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마땅히 주의 비밀을 맡은 자들로서 충성을 구하는 자들이라고 할 때에 먼저 자신이 자신을 판단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내 자신의 판단하시는 자는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고전 4:4)

마치 다니엘이 그와 같은 중심의 소유자였습니다. 다니엘 그 이름의 뜻은, 그의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받게 되는데,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뜻하심의 합당함을 따라서 자신의 존재의 여부를 구걸하지 않고 주님의 뜻하심을 따라 자신을 부인하는 죽음의 사자 굴에 떨어지는 선택을 믿음으로 할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하여서 주의 뜻하심을 받들 수 있는 충성의 자리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말을 해서 무신론자들에게 변명이 될 수 있을 것과 같이 생각하도록 했던 한 지혜를 사랑했던 사람이 있는데, 그는 자신을 객관화시켜서 자신을 말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즉 자신을 판단하는 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가운데 못하겠다는 의지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비겁하다는 개념으로 일관하는 임의적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길을 거의 무신론의 철학자들은 따라가고 있고 오늘도 그러한 것에서 무슨 선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가운데서 그 말의 유희로 자기를 달래야 하는 자리에 피곤한 사람들을 봅니다.

판단하지 말라고 하심은 그 존재에 대한 그 사실만큼은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즉 성도를 주의 이름으로 알아주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의적 개념에서 비로소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하심에서 그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에서 그 정당함에서 판단하지 않을 때에 주의 뜻하심 안에서 주시는 믿음 안에서 그 존재의 사실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게 하심의 자리에 서게 되는 사역을 위한 은혜도 입게 된다는 것과 그것을 믿음 안에서 서로 인정하고 알아주는 가운데서 충성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그 화목케 하시는 주의 성령의 열매로써 이루어진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서서 교만해진다는 것은 그 기록되어진 문자의 언급이라고 함에 국한되어진 것만이 아닌 것입니다. 즉 그 문자적 개념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그 뜻하심이 무엇인가에 정당함을 입을 수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기록된 말씀임을 기억할 때에 그 충성된 가르침의 실제를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말들에게는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입은 상대적 인식이라고 함을 판단하는 교만한 자리에 서게 되는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남을 지적하시며 그러한 말에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주의 말씀의 뜻하심 안에서 있게 되어지는 신앙고백 위에 임하시는 그 재가로서의 권능에 있다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의 재가로서의 능력이라고 함의 유무를 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즉 주의 말씀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는 것을 말하는 그 충성을 구하는 자들인가 알아보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의 자녀된 자들이며 동시에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종들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 주 앞에서의 성령의 열매로서의 충성이라고 하는 것을 구함은 마땅한 것인데, 이것은 액면적 상태적 획일성으로 다소 나타나게 되어지는 경직성에서 있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스스로의 모습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나대로의 충성’이라는 개념에서 충성을 구하는 것은 충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것의 인식의 여부와 관계없이 분란의 소지로서 나타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재가라는 것의 인증을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대로의 충성의 자리에서 교회의 쓴 뿌리의 악한 자리에 서지 아니하며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비록 믿음의 분량의 차이로 고통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의 말씀을 하나님 자존의 절대 정당함을 따르는 가운데서의 사실로 믿는 자들이 서로 인정하며 주의 말씀의 사실에 순종하려고 하는 같은 마음을 가질 때에 진정 하나님께서 우리의 재판자라고 하는 그러한 다니엘과 같은 신앙의 자리에 서며, 주의 뜻에 합당한 충성을 구하는 자들로서, 주의 길을 예비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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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