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6월 09, 2005

충성을 구하는 자에게

2005년 6월 8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4:1-21
충성을 구하는 자에게

조금 시간이 지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구할 것은 충성이요’라고 외쳤던 어떤 분에 대한 기억은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고, 저도 뒤늦게 서점에 프로마이드로 세워둔 그림을 보며 알게 되었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서 재고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충성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스스로 행하는 가운데서의 열심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돌적 개념으로 실생활에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충돌이라고 하는 것이 신선한 견인차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극단의 반목으로 향하게 되어질 수 있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한다면 그 반목에서 비롯되어지는 가운데서 소원해지는 그러한 경향도 있습니다.

이처럼 충성이라는 것이 충돌적 개념의 것이 주의 화목케 하심과 반목적인 개념으로 자리매김 되어지는 것은 분명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과연 하나님의 성령의 열매로서의 하나인 ‘충성’을 구하는 자들로서 그 실재의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 진정으로 충성을 구하는 자의 기본적인 신실함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고 자기 기만적 충성에서의 임의적 ‘나대로의 충성’이라는 판단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4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 것이며 그 믿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을 자신이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다만 자신을 판단하실 이는 주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고 하며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함을 나타내실 것과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아볼로와 자신으로 본을 보였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임을 말하고 있으며 그것으로써 누가 우리를 구별하였는가 하는 것에 대한 자각을 깨닫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 자신과 아볼로가 약하고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강함에 대한 인식을 이해하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언급한 자신들의 강함이라고 함을 인식하라고 말함에 있어서 액면적인 부끄러움이라고 하는 것으로 강권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밝히면서 복음으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낳았음에 대한 것을 말하며 자신을 본받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인하여서 디모데를 보냈다고 함을 말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행사 가르치던 것이 생각나게 하리라고 함을 말하며 또한 그 어떤 이들의 스스로 교만함이 있으나 그 교만함의 정도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음에 대한 것을 그 충성을 구하는 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충성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러한 충돌의 역할적인 개념에서 그것을 비로소 분별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 성령의 은사로서의 그 실재를 분별하는 가운데서 주의 화목케하심과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하심의 뜻하심을 받들 수 있도록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구할 것으로써의 충성’에 대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교인 가톨릭과 신교인 기독교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을 이해함의 차이라고 함은 본문에서도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할 때에 ‘스스로’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가운데서의 통일성을 말해야 하는데, 어쩜 어떤 한 규범적 개념으로 인위적인 통일성을 말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구교에서는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이 ‘스스로의 존재의식’을 우리 인생이 모두 가지고 있는데 죄를 지은 가운데서도 왜곡되어진 것과 주 안에서 회복되어지지 않는 한 회복되어질 수 없는 타락의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스스로라는 개념을 임의적으로 인증되어지지 않는 자의적인 존재의식으로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처럼 우리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믿음으로 스스로 행할 때에 그것이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그것이 믿음으로 행하는 충성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분량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억지로 그것을 획일화되어진 통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입는 것이라는 것에서 통일성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분별하지 못할 때에는 의식의 여부의 판단을 받지 않는 획일적 통일성과 그러한 것들의 충돌은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충성이라는 개념으로 미화되어지는 가운데 교회의 ‘쓴 뿌리’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첫 번째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마땅히 주의 비밀을 맡은 자들로서 충성을 구하는 자들이라고 할 때에 먼저 자신이 자신을 판단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내 자신의 판단하시는 자는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고전 4:4)

마치 다니엘이 그와 같은 중심의 소유자였습니다. 다니엘 그 이름의 뜻은, 그의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받게 되는데,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뜻하심의 합당함을 따라서 자신의 존재의 여부를 구걸하지 않고 주님의 뜻하심을 따라 자신을 부인하는 죽음의 사자 굴에 떨어지는 선택을 믿음으로 할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하여서 주의 뜻하심을 받들 수 있는 충성의 자리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말을 해서 무신론자들에게 변명이 될 수 있을 것과 같이 생각하도록 했던 한 지혜를 사랑했던 사람이 있는데, 그는 자신을 객관화시켜서 자신을 말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즉 자신을 판단하는 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가운데 못하겠다는 의지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비겁하다는 개념으로 일관하는 임의적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길을 거의 무신론의 철학자들은 따라가고 있고 오늘도 그러한 것에서 무슨 선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가운데서 그 말의 유희로 자기를 달래야 하는 자리에 피곤한 사람들을 봅니다.

판단하지 말라고 하심은 그 존재에 대한 그 사실만큼은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즉 성도를 주의 이름으로 알아주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의적 개념에서 비로소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하심에서 그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에서 그 정당함에서 판단하지 않을 때에 주의 뜻하심 안에서 주시는 믿음 안에서 그 존재의 사실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게 하심의 자리에 서게 되는 사역을 위한 은혜도 입게 된다는 것과 그것을 믿음 안에서 서로 인정하고 알아주는 가운데서 충성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그 화목케 하시는 주의 성령의 열매로써 이루어진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서서 교만해진다는 것은 그 기록되어진 문자의 언급이라고 함에 국한되어진 것만이 아닌 것입니다. 즉 그 문자적 개념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그 뜻하심이 무엇인가에 정당함을 입을 수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기록된 말씀임을 기억할 때에 그 충성된 가르침의 실제를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말들에게는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입은 상대적 인식이라고 함을 판단하는 교만한 자리에 서게 되는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남을 지적하시며 그러한 말에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주의 말씀의 뜻하심 안에서 있게 되어지는 신앙고백 위에 임하시는 그 재가로서의 권능에 있다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의 재가로서의 능력이라고 함의 유무를 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즉 주의 말씀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는 것을 말하는 그 충성을 구하는 자들인가 알아보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의 자녀된 자들이며 동시에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종들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 주 앞에서의 성령의 열매로서의 충성이라고 하는 것을 구함은 마땅한 것인데, 이것은 액면적 상태적 획일성으로 다소 나타나게 되어지는 경직성에서 있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스스로의 모습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나대로의 충성’이라는 개념에서 충성을 구하는 것은 충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것의 인식의 여부와 관계없이 분란의 소지로서 나타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재가라는 것의 인증을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대로의 충성의 자리에서 교회의 쓴 뿌리의 악한 자리에 서지 아니하며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비록 믿음의 분량의 차이로 고통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의 말씀을 하나님 자존의 절대 정당함을 따르는 가운데서의 사실로 믿는 자들이 서로 인정하며 주의 말씀의 사실에 순종하려고 하는 같은 마음을 가질 때에 진정 하나님께서 우리의 재판자라고 하는 그러한 다니엘과 같은 신앙의 자리에 서며, 주의 뜻에 합당한 충성을 구하는 자들로서, 주의 길을 예비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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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