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 24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습2:1-15
수치를 모르는 백성
이제 얼마 있으면 장마가 있다고 하는데, 그 전에 집안 청소나 여러 옷가지나 이불 등을 세탁을 해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일상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에 오물이나 때가 잘 지워지지 않는 경우에는 참 속상합니다 그런데 표백제를 잘못 쓴다거나 할 때에는 또 지워지지 말아야 할 색들이 탈색되어질 수 있는 경우에도 참 속상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물에 씻겨져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을 것을 잘 구분하여서 판단할 때에 유익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심의 진멸하심에 대한 것에서 그 남은 자의 사상 그 분노에 숨겨진 자의 모습으로서의 구원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모두가 멸망당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숨겨주심이라고 하는 것 죄로 인하여 멸망이 아닌 구원의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 죄라고 함의 수치라는 것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책망하는 선지 스바냐의 증거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그리고 12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선지자 스바냐가 앞서 1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좇지도 아니한 자와 찾지도 않는 자를 멸절하리라는 말씀에 이어서,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이 모이라고 말하며 그들의 신앙의 진정함을 내보이라는 측면에서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는 말과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가사와 아스글론 아스돗과 에그론과 같은 해변거민들과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 거민이 없게 하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변은 초장이 되어 목자의 움과 양떼의 우리가 거기 있을 것을 말하며 그 지경은 유다족속의 남은 자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압과 암몬 자손의 훼방에 대하여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곳에 존재적 자리매김이 되어질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네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구스 사람들이 살륙당할 것과 동방의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를 황무케하여 사막같이 메마르게 하실 것을 말씀하시며 그 메마름에 대한 되어질 일들에 대한 묘사로 폐허적 모습을 기술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진노로부터 숨김을 받은 자로서의 증거로써 수치를 모르는 것에 대한 책망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로 지목되어진 자들의 중심과 인식을 주목해볼 때에, 먼저 '블레셋 땅 가나안'이라는 존재에 대한 심판을 주목합니다. 이 '블레셋'이라는 뜻은 '이민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밖의 지역에서 들어온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토 기업의 소유권을 본래적으로 주장할 수 없는 자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본문의 문맥적인 개념에서는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겸손한 자들에게 그 기업이 돌아갈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으로 자신의 소유라고 함을 말하는 자들이 수치를 당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종들의 존재와 기업이라고 하는 것을 죄악 가운데서의 불법적 소유를 주장하는 마귀들과 그들의 그늘에서 존재적 정당함을 찾는 자들의 모습이 수치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모압과 암몬 족속에 대한 주의 판단이 스바냐 선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내 백성을 훼방하고 스스로 커서 그 경계를 침범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습 2:8~9 중)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모압과 암몬이라는 존재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롯은 그의 딸 둘과 함께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시는 심판을 피하여 소알성으로 피하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두 딸들이 아버지와 정욕적인 입장을 자기 임의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들이 인종을 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창 19:31~38) 이는 이미 아브라함의 사람들도 있었기에 그 딸들의 판단은 정욕적인 개념을 나타내며, 성립되어지지 않는 인륜적 개념으로 주의 뜻하심의 허락되어지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는 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언약의 백성들로서의 아브라함의 족속과는 달리 나타나고 있고 상대적인개념으로 사실을 임의적으로 말하려는 가운데서 그들의 한계를 넘어서서 주의 택한 백성들의 기업의 사실을 부정하여 자신들의 뜻함을 취하려고 하는 악함이 있음을 주목하게 되며 이러한 사실은 믿음의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함의 전통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가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서 앗수르와 그 수도로써의 니느웨에 대한 주의 판단하심이 나타남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사실 앗수르는 셈족계통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함의 족속이 그들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을 경험하였으나 그 언약의 사실을 힘써 부인하는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이르는 자들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증거를 받았을 때에 회개의 경건의 모습이 있었지만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라 '혹시나'의 개연적 신비에 따른 것으로 진정한 회개가 아닌 것이었습니다.(욘 3:9)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심판의 판단이 되어지는 그 수치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사실을 기억하지 않고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을 죄아래 팔며 그것을 자신의 소유라고 우기는 마귀들과 그러한 인식을 가진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하심의 사실일 인정하지 않고 상식적인 개념으로 간과하려는 악함과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주의 복음의 사실이 진정한 사실임을 믿지 못하는 것으로써 '혹시나 신앙'이라는 개연적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가지론적 입장이 그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수치라는 것의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과 사실을 찾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백성들로서 요단강을 건너 할례를 받았을 때에 그 길갈에서의 이름과 같이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고 고백하였던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도 주 예수님을 믿으며 주의 말씀과 그 말씀의 재가를 받을 수 있는 것들이 사실임을 기억할 때에, 죄로 인한 심판의 자리에서의 영벌에 처하게 되어지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수치라는 것은 이미 굴러 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의 상대적 표현으로써의 사실을 임의적으로 상대적인 것으로만 취급하고 자존의 절대자를 상대적인 절대자로써 인식하고자 하는 가운데 임의적 신을 말하고 하나님이 부정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어리석음과 수치에서 자리를 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참으로 스바냐 선지자와 같이 자존의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존의 절대의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것을 선히 취하셔서 복음의 사실을 말씀하심에 따라 세상이 잠잠하라는 것을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핑계치 못할 복음에 대하여서 말함과 동일한 것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스바냐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에 숨겨진 자들로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으로 하나님나라의 기업을 얻는 자들로서 주의 복음의 진정한 사실을 증거하시는 가운데 주의 택한 백성들이 수치를 주의 이름으로 벗을 수 있도록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습2:1-15
수치를 모르는 백성
이제 얼마 있으면 장마가 있다고 하는데, 그 전에 집안 청소나 여러 옷가지나 이불 등을 세탁을 해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일상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에 오물이나 때가 잘 지워지지 않는 경우에는 참 속상합니다 그런데 표백제를 잘못 쓴다거나 할 때에는 또 지워지지 말아야 할 색들이 탈색되어질 수 있는 경우에도 참 속상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물에 씻겨져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을 것을 잘 구분하여서 판단할 때에 유익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심의 진멸하심에 대한 것에서 그 남은 자의 사상 그 분노에 숨겨진 자의 모습으로서의 구원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모두가 멸망당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숨겨주심이라고 하는 것 죄로 인하여 멸망이 아닌 구원의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 죄라고 함의 수치라는 것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책망하는 선지 스바냐의 증거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그리고 12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선지자 스바냐가 앞서 1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좇지도 아니한 자와 찾지도 않는 자를 멸절하리라는 말씀에 이어서,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이 모이라고 말하며 그들의 신앙의 진정함을 내보이라는 측면에서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는 말과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가사와 아스글론 아스돗과 에그론과 같은 해변거민들과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 거민이 없게 하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변은 초장이 되어 목자의 움과 양떼의 우리가 거기 있을 것을 말하며 그 지경은 유다족속의 남은 자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압과 암몬 자손의 훼방에 대하여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곳에 존재적 자리매김이 되어질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네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구스 사람들이 살륙당할 것과 동방의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를 황무케하여 사막같이 메마르게 하실 것을 말씀하시며 그 메마름에 대한 되어질 일들에 대한 묘사로 폐허적 모습을 기술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진노로부터 숨김을 받은 자로서의 증거로써 수치를 모르는 것에 대한 책망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로 지목되어진 자들의 중심과 인식을 주목해볼 때에, 먼저 '블레셋 땅 가나안'이라는 존재에 대한 심판을 주목합니다. 이 '블레셋'이라는 뜻은 '이민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밖의 지역에서 들어온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토 기업의 소유권을 본래적으로 주장할 수 없는 자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본문의 문맥적인 개념에서는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겸손한 자들에게 그 기업이 돌아갈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으로 자신의 소유라고 함을 말하는 자들이 수치를 당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종들의 존재와 기업이라고 하는 것을 죄악 가운데서의 불법적 소유를 주장하는 마귀들과 그들의 그늘에서 존재적 정당함을 찾는 자들의 모습이 수치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모압과 암몬 족속에 대한 주의 판단이 스바냐 선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내 백성을 훼방하고 스스로 커서 그 경계를 침범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습 2:8~9 중)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모압과 암몬이라는 존재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롯은 그의 딸 둘과 함께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시는 심판을 피하여 소알성으로 피하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두 딸들이 아버지와 정욕적인 입장을 자기 임의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들이 인종을 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창 19:31~38) 이는 이미 아브라함의 사람들도 있었기에 그 딸들의 판단은 정욕적인 개념을 나타내며, 성립되어지지 않는 인륜적 개념으로 주의 뜻하심의 허락되어지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는 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언약의 백성들로서의 아브라함의 족속과는 달리 나타나고 있고 상대적인개념으로 사실을 임의적으로 말하려는 가운데서 그들의 한계를 넘어서서 주의 택한 백성들의 기업의 사실을 부정하여 자신들의 뜻함을 취하려고 하는 악함이 있음을 주목하게 되며 이러한 사실은 믿음의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함의 전통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가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서 앗수르와 그 수도로써의 니느웨에 대한 주의 판단하심이 나타남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사실 앗수르는 셈족계통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함의 족속이 그들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을 경험하였으나 그 언약의 사실을 힘써 부인하는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이르는 자들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증거를 받았을 때에 회개의 경건의 모습이 있었지만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라 '혹시나'의 개연적 신비에 따른 것으로 진정한 회개가 아닌 것이었습니다.(욘 3:9)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심판의 판단이 되어지는 그 수치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사실을 기억하지 않고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을 죄아래 팔며 그것을 자신의 소유라고 우기는 마귀들과 그러한 인식을 가진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하심의 사실일 인정하지 않고 상식적인 개념으로 간과하려는 악함과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주의 복음의 사실이 진정한 사실임을 믿지 못하는 것으로써 '혹시나 신앙'이라는 개연적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가지론적 입장이 그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수치라는 것의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과 사실을 찾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백성들로서 요단강을 건너 할례를 받았을 때에 그 길갈에서의 이름과 같이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고 고백하였던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도 주 예수님을 믿으며 주의 말씀과 그 말씀의 재가를 받을 수 있는 것들이 사실임을 기억할 때에, 죄로 인한 심판의 자리에서의 영벌에 처하게 되어지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수치라는 것은 이미 굴러 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의 상대적 표현으로써의 사실을 임의적으로 상대적인 것으로만 취급하고 자존의 절대자를 상대적인 절대자로써 인식하고자 하는 가운데 임의적 신을 말하고 하나님이 부정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어리석음과 수치에서 자리를 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참으로 스바냐 선지자와 같이 자존의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존의 절대의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것을 선히 취하셔서 복음의 사실을 말씀하심에 따라 세상이 잠잠하라는 것을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핑계치 못할 복음에 대하여서 말함과 동일한 것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스바냐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에 숨겨진 자들로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으로 하나님나라의 기업을 얻는 자들로서 주의 복음의 진정한 사실을 증거하시는 가운데 주의 택한 백성들이 수치를 주의 이름으로 벗을 수 있도록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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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