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3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삿11:1-11
입다의 신앙
사람들은 말하기를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결백증이라는 개념의 표현이 가능한 시시콜콜 원칙적인 사람이나 또는 그로 인한 인간미가 없는 자로 사람들의 호흥을 얻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더불어 살아가는 가운데서는 그러한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생활하는 것이 하나의 처세술이 되어질 수 있는 것이 사실이면서도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것이 옳은 것만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주 안에서 그러한 것들을 분별하고 참으로 화목할 줄 아는 것이 귀한 것인데 본문 사사의 중심을 통해 그러한 것을 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심을 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길르앗의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 낳은 아들이었음과 같이 그 입다 사사의 출생적 관련성과 그의 처해있는 상황적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길르앗의 아내들 즉 본처들이 아들을 낳음에 있어서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했던 것과 이에 입다가 그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들이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길르앗의 장로들이 암몬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하자 돕 땅에 가서 입다에게 암몬자손과 싸우려하니 와서 길르앗의 장관이 되어줄 것을 구하는 것과 입다가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신에게 붙이면 과연 그들의 머리가 되겠느냐는 질문함과 길르앗 장로들의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 사이의 증인임을 언급하며 반드시 행하리라는 말과 함께 돌아와서 장관이 되며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고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서자라는 편견과 사회적 개념에서의 반목되어진 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자라는 것과 같은 서자로서 비교되어지는 아비멜렉과의 모습도 주목하면서 하나님 안에서의 화목이라고 하는 것 그것의 정체성에 대한 눈을 열게 하심의 은혜를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반 상식이라는 개념에서 보면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한 일방상식이라는 개념이 진정한 실존을 말하지 못할 때 즉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지는 상식이라는 측면과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재가를 받지 못하는 그러한 상식의 실존에서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함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 정황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전반적인 가르침은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7)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부정적 입장에서는 임의적인 것으로 악함을 드러내는 시대상의 정신을 읽을 수 있는 것이고 긍정적인 입장에서는 주의 말씀하심에서부터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합당한 믿음의 분량적 증거로서의 시대가 있을 것을 말씀하심에서 신약의 교회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실증적인 개념 즉 필요에 따른 소견적 판단으로 일관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사사 '입다'를 통하여서 눈을 열게 하심의 은혜를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본문의 배경이 되어지는 사사기 10장의 말씀에서는 여러 사사들이 거론되어지고 있고 상황적 입장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중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자존의 하나님을 믿었다면 그러한 행보에 있어서 상황적 당위성에 따른 신앙의 흔들림이라고 하는 것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와 같은 신앙에 서지 못하여서 이제 하나님이 암몬자손에게 그들을 파심에 따라 길르앗 사람들이 사사 입다를 찾게 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재가를 얻지 못하는 신앙상식에 있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선하심을 마음에 두는 것보다도 기득권적인 개념에서 상식적인입장을 따랐던 것입니다. 즉 길르앗의 아내들의 소생들이 다른 여인의 자식이라는 것으로 입다를 쫓아내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입다는 잡류들과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잡류들은 기존의 그 때 당시 사람들의 인식의 부적절함과 잘못됨을 감안할 때에 그러한 서자들과 같은 모임이 될 수 있고 비류함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입다의 신앙을 볼 때에 오히려 왜곡되어진 일반적인 판단에서 희생적 입장의 서게 되는 자들로서 그와 함께한 자들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길르앗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증거자임을 내세워서 암몬 족속과 싸우고 자신들의 장관이 되어주기를 사사 입다에게 청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입다는 그것을 허락하게 되는데 그 조건이 자존의 하나님으로 그 뜻함의 재가를 말하는 것으로 삼았다는 것과 그가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께 다 고하였다는 것을 기록함을 볼 때에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진정한 사실이라는 것을 믿고 따른 자의 모습을 봅니다.
자신을 서자의 입장으로 밀어냈던 사회와 그 사람들에게 그들을 섬기는 자로서 장관적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그 말과 되어짐과 인도하심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음을 믿을 때에 하나님께 자신의 감정과 입장과 판단보다도 그것을 진정으로 사실로 받아들여 순종할 수 있는 사실에 서는 모습이 우리 성도들의 눈을 열게 하심의 은혜를 입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을 인하여 참고 행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잘못된 기득권의 입장에서 그와 함께해줄 사람이 없었던 사사 입다
그가 하나님 여호와를 기쁘게 하시매 하나님께서 원수와도 화목케 하심으로 그 자신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에 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우리 성도들의 세상과의 화목은 맑은 물이라는 개념과 같이 지나치게 완벽하거나 또는 인간미가 없다는 평을 받지 않기 위해서 부정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지 못하는 것에 있어서도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당위성에 서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를 때에 그 기쁘심에 따라서 원수라도 화목케 하심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사역과 사업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의 동료와 친구와 관계를 통한 그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음이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서자 아비멜렉은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서 아버지를 진정 믿음으로 존경하는 자들의 모습이 아닌 도의적 개념에서 자유치 못한 자들의 모습을 하나님의 재가 없이 읽어내어서 임의적으로 비류한 자들을 바알브릇의 묘에서 꺼낸 돈으로 사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려고 했던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참으로 머리 아픈 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여인의 던진 돌에 그의 머리가 깨어지고 결국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사실을 믿는 사사 입다는 그들의 잘못된 기득권을 시기하지 않았으며 주의 뜻하심 안에서 화목케 하심의 인도하심 안에서 충성된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사람들의 필요성에 따라서 주 5일제와 같은 가운데서 임의적으로 주일 예배시간 조정등과 같이 기본적인 신앙까지도 타협하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는데, 그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실상은 그 능력을 상실하여서 인본주의적 개념으로 흐르고 있음은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불의한 청지기의 모습을 기드온의 서자 아비멜렉의 모습에서 주목할 수 있었다면 믿음으로 행한 사사 입다의 모습에서 볼 때에 과연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의 화목이라는 것이 세상을 오히려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신앙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고 기득권을 다 빼앗기는 것과 같이 잘못되게 인식되어지고 그러한 인식의 강요가 있는 가운데서 성도들은 아비멜렉을 택하도록 하는 강요까지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성도들은 주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운데 원수까지도 화목(잠 16:7)케 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라 사사 입다의 신앙과 같이 주 앞에서 우리의 삶을 지혜롭고 합당하게 경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더욱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자리에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삿11:1-11
입다의 신앙
사람들은 말하기를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결백증이라는 개념의 표현이 가능한 시시콜콜 원칙적인 사람이나 또는 그로 인한 인간미가 없는 자로 사람들의 호흥을 얻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더불어 살아가는 가운데서는 그러한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생활하는 것이 하나의 처세술이 되어질 수 있는 것이 사실이면서도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것이 옳은 것만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주 안에서 그러한 것들을 분별하고 참으로 화목할 줄 아는 것이 귀한 것인데 본문 사사의 중심을 통해 그러한 것을 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심을 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길르앗의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 낳은 아들이었음과 같이 그 입다 사사의 출생적 관련성과 그의 처해있는 상황적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길르앗의 아내들 즉 본처들이 아들을 낳음에 있어서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했던 것과 이에 입다가 그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들이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길르앗의 장로들이 암몬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하자 돕 땅에 가서 입다에게 암몬자손과 싸우려하니 와서 길르앗의 장관이 되어줄 것을 구하는 것과 입다가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신에게 붙이면 과연 그들의 머리가 되겠느냐는 질문함과 길르앗 장로들의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 사이의 증인임을 언급하며 반드시 행하리라는 말과 함께 돌아와서 장관이 되며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고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서자라는 편견과 사회적 개념에서의 반목되어진 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자라는 것과 같은 서자로서 비교되어지는 아비멜렉과의 모습도 주목하면서 하나님 안에서의 화목이라고 하는 것 그것의 정체성에 대한 눈을 열게 하심의 은혜를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반 상식이라는 개념에서 보면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한 일방상식이라는 개념이 진정한 실존을 말하지 못할 때 즉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지는 상식이라는 측면과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재가를 받지 못하는 그러한 상식의 실존에서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함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 정황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전반적인 가르침은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7)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부정적 입장에서는 임의적인 것으로 악함을 드러내는 시대상의 정신을 읽을 수 있는 것이고 긍정적인 입장에서는 주의 말씀하심에서부터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합당한 믿음의 분량적 증거로서의 시대가 있을 것을 말씀하심에서 신약의 교회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실증적인 개념 즉 필요에 따른 소견적 판단으로 일관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사사 '입다'를 통하여서 눈을 열게 하심의 은혜를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본문의 배경이 되어지는 사사기 10장의 말씀에서는 여러 사사들이 거론되어지고 있고 상황적 입장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중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자존의 하나님을 믿었다면 그러한 행보에 있어서 상황적 당위성에 따른 신앙의 흔들림이라고 하는 것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와 같은 신앙에 서지 못하여서 이제 하나님이 암몬자손에게 그들을 파심에 따라 길르앗 사람들이 사사 입다를 찾게 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재가를 얻지 못하는 신앙상식에 있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선하심을 마음에 두는 것보다도 기득권적인 개념에서 상식적인입장을 따랐던 것입니다. 즉 길르앗의 아내들의 소생들이 다른 여인의 자식이라는 것으로 입다를 쫓아내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입다는 잡류들과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잡류들은 기존의 그 때 당시 사람들의 인식의 부적절함과 잘못됨을 감안할 때에 그러한 서자들과 같은 모임이 될 수 있고 비류함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입다의 신앙을 볼 때에 오히려 왜곡되어진 일반적인 판단에서 희생적 입장의 서게 되는 자들로서 그와 함께한 자들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길르앗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증거자임을 내세워서 암몬 족속과 싸우고 자신들의 장관이 되어주기를 사사 입다에게 청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입다는 그것을 허락하게 되는데 그 조건이 자존의 하나님으로 그 뜻함의 재가를 말하는 것으로 삼았다는 것과 그가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께 다 고하였다는 것을 기록함을 볼 때에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진정한 사실이라는 것을 믿고 따른 자의 모습을 봅니다.
자신을 서자의 입장으로 밀어냈던 사회와 그 사람들에게 그들을 섬기는 자로서 장관적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그 말과 되어짐과 인도하심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음을 믿을 때에 하나님께 자신의 감정과 입장과 판단보다도 그것을 진정으로 사실로 받아들여 순종할 수 있는 사실에 서는 모습이 우리 성도들의 눈을 열게 하심의 은혜를 입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을 인하여 참고 행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잘못된 기득권의 입장에서 그와 함께해줄 사람이 없었던 사사 입다
그가 하나님 여호와를 기쁘게 하시매 하나님께서 원수와도 화목케 하심으로 그 자신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에 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우리 성도들의 세상과의 화목은 맑은 물이라는 개념과 같이 지나치게 완벽하거나 또는 인간미가 없다는 평을 받지 않기 위해서 부정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지 못하는 것에 있어서도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당위성에 서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를 때에 그 기쁘심에 따라서 원수라도 화목케 하심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사역과 사업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의 동료와 친구와 관계를 통한 그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음이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서자 아비멜렉은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서 아버지를 진정 믿음으로 존경하는 자들의 모습이 아닌 도의적 개념에서 자유치 못한 자들의 모습을 하나님의 재가 없이 읽어내어서 임의적으로 비류한 자들을 바알브릇의 묘에서 꺼낸 돈으로 사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려고 했던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참으로 머리 아픈 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여인의 던진 돌에 그의 머리가 깨어지고 결국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사실을 믿는 사사 입다는 그들의 잘못된 기득권을 시기하지 않았으며 주의 뜻하심 안에서 화목케 하심의 인도하심 안에서 충성된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사람들의 필요성에 따라서 주 5일제와 같은 가운데서 임의적으로 주일 예배시간 조정등과 같이 기본적인 신앙까지도 타협하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는데, 그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실상은 그 능력을 상실하여서 인본주의적 개념으로 흐르고 있음은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불의한 청지기의 모습을 기드온의 서자 아비멜렉의 모습에서 주목할 수 있었다면 믿음으로 행한 사사 입다의 모습에서 볼 때에 과연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의 화목이라는 것이 세상을 오히려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신앙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고 기득권을 다 빼앗기는 것과 같이 잘못되게 인식되어지고 그러한 인식의 강요가 있는 가운데서 성도들은 아비멜렉을 택하도록 하는 강요까지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성도들은 주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운데 원수까지도 화목(잠 16:7)케 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라 사사 입다의 신앙과 같이 주 앞에서 우리의 삶을 지혜롭고 합당하게 경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더욱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자리에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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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