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7월 16, 2005

성곽 없는 촌락

2005년 7월 15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슥2:1-13
성곽 없는 촌락

역사적으로 어떤 자유에 대한 이상을 가진 한 사람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는 어떤 규정되어지는 것 어떤 한계지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아무 경계가 없는 자유를 원한 사람이었음을 봅니다. 그러나 경계가 없다는 개념은 아무 정체성이 없는 가운데서 자유라고 하는 개념자체도 성립되어질 수 없는 것으로 오히려 불안이라고 함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에서 어떤 인위적인 담력과 자유를 말하고 싶지만 그것의 자유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을 알아보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결코 이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중세에 있었던 지역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되어지는 잘못되어진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속박되어진 것으로써 나타나는 가운데 유아기적인 발상이라는 개념을 피하고자 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러한 것들이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규모있게 하는 주관적인 모습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하였고 오늘날 모든 규범이라고 함을 매이게하는 구속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려는 순종하지 못하는 세대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자유라고 하는 것의 실상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서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을 주목합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스가랴가 눈을 들어 봄에 한 사람이 척량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그것을 물었음과 그것에 대한 답변과 그가 가는 예루살렘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을 것을 말하며 여호와의 말씀에 그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될 것을 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에 하늘의 사방 바람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 이제는 북방 땅에서 도망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바벨론 성에 거하는 시온에게 너는 피할찌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 그 시온에 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노략한 열국의 영광을 위하여 그 천사를 보냈으니 그들을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이 노래하고 기뻐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할 것임을 말씀하시고 그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백성이 될 것이요 그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을 말씀하시며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잠잠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본문 중에 ‘성곽없는 촌락’과 ‘하나님의 눈동자’와 같이 여기시는 주의 백성으로서의 시온에서 주의 백성된 성도들의 자유의 실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을 보면 스가랴 선지의 증거의 기본은 그의 존재적 사역을 나타내는 것으로 받을 수 있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억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현상적인 우리 성도들의 삶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이해되며 받음이 합당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1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성소을 지으시고 그것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실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으로 그 왜소한 성전의 현실적인 개념 가운데서 판단되어지지 않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한 사실로써 이스라엘의 열심을 내지 못하는 자들을 책망하시면서도 주의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에 대한 것으로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실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본 2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스가랴 선지자가 보는 천사가 예루살렘에서의 그의 사역적 입지를 말하고 있는 것을 듣게 되어지는데 그것은 주의 말씀하심에 대한 것에서 정당함을 얻는 예루살렘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4절과 5절에서는 그 가운데 사람이 거하니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촌락’과 같다는 말씀과 그 천사가 그곳에 서면 불 성곽이 되며 영광이 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그 이름의 뜻이 “평화의 성”이라고 함과 같이 주의 말씀하심의 기준아래서 주의 주신 말씀 안에서 평화의 성으로서의 지금의 교회의 실재를 예표하는 존재로서의 예루살렘을 말씀하심을 봅니다. 이것은 현상적인 개념만 볼 때에는 성곽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는 분명한 심판적인 성곽이 있다는 것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참으로 그들의 예표적 실제의 모습으로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의 믿음의 분량을 본다면 여러 교파도 있을 수 있고 믿음의 분량이 있고 그러한 주관적 개념으로 가라지들도 교회에 함께 자라는 모습이 과연 ‘성곽 없는 촌락’으로써의 교회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중세의 사람들 구교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조직이라는 개념만 한정하고 그들의 질서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나라의 밖에 있다는 식의 ‘성곽 있는 촌락’을 제시하였던 잘못을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성곽 없는 촌락과 같이 실존하게 되어지는 불성곽 안에서의 주의 눈동자같이 지키심이라고 하는 것에서 열외되어진 자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한 것의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는 사람들의 불안심리에서 그 성곽 있는 촌락이라는 잘못된 구교적 가톨릭 개념의 교회관을 지지하는 잘못된 모습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인위적 자유를 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이제 그러한 인위적 개념의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무리하여 모험할 필요가 없는 ‘안일한 열국’(슥 1:15)의 자리에서 진노의 자리에 이르게 되며 고난이 그들의 삶에 더함이라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슥 1:15 참고)

이제 우리 성도들은 사람들의 모임으로써의 어떤 조직체라는 교회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 그러한 정형적인 개념에서 비로소 자유와 안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교파의 여러 모습들이라고 함이 아픔이 되면서도 믿음의 분량적 개념으로 받게 되어지는 교회의 통일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믿음의 분량의 차이로 보아야 할 것인지 결코 주의 말씀에서 벗어났는지의 여부는 믿음으로 분별하는 가운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참으로 고통이며 교회의 정체성과 자유라는 개념을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의문이 되어지지만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주의 말씀이 나오는 예루살렘’(미 4:2)에서의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것으로써의 아래로 늘여진 척량줄임을 볼 때에 주의 말씀에 따른 그 평강은 불성곽이라는 그 영광으로 그 성도와 함께하는 것이며 주 앞에서 사실이라는 것을 믿을 때에 그 현상적인 불안감으로 자유의 실제를 부인하는 것에서 자유하며 진정한 자유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그러한 것은 주의 말씀을 따르는 시온의 성도들의 모습들 이들은 주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자들로서 믿음으로 행하는 가운데서 시온으로써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행함을 요구하는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시온에서 나온다는 것’(미 4:2)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그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서 거룩하여진 믿음의 산 제사를 드리는 오늘날 성도들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시온에 거하는 자들로서 예표적 실제의 구약의 성도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범하는 자들은 여호와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씀하심을 기억할 때에 전능자의 눈을 거스릴 수 있다는 것의 성립되어지지 않는 거짓된 행위들이 있다고 하여도 결코 성도들의 견인을 말할 수 있다는 가운데서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성도들과 함께 하심이 주의 영광의 불 성곽이라는 성곽없는 촌락의 실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이 불안해하며 어떤 규범을 원하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속박으로 생각하고 배척하는 사람들 모두는 게으른 안일한 자들이거나 순종하지 못하는 자들로서 경건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들로 모두 경건지 못한 자로서 주 앞에 설 수 없는 거짓된 성곽의 촌락에 거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하신 바에서 정당함을 찾는다면 그 말씀하심의 재가를 얻는 주관적 표현의 교회를 그 제반적인 질서를 사랑하고 그러한 것에서 비로소 자유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주의 눈동자 같이 지켜주심에 대한 신뢰에서 비로소 자유하며 주께서 주시는 믿음 안에서 ‘화석류나무 사이에 두루 다니라고 주의보내신 자들’(슥 1:10~12 참고)과 같이 믿음의 선한 싸움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라는 것과 그 질서는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구별되어진 것으로 존중되어야 하며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의 말씀 안에서 비로소 그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말씀하심을 따라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하는 자들로써 나타날 때에는, 인위적인 성곽이 있는 촌락으로써 비로소 교회를 해석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하심을 따라서 주의 구원받은 자들로서 주의 구원을 증거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임에 대한 증거로 야곱의 서원을 이행하는 것과 같이 교회 출석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한두 번 식사를 거를 수 있다고 하여도 식사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면 그것이 억측인 것과 같이 교회 출석의 실제를 부정하는 것은 또 하나의 극단적인 자유자로서 그 자유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의 말씀 안에서 자유의 실제를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주께서 주의 말씀을 의지하는 자들을 그의 눈동자같이 지키심에 대한 뜻하심을 읽게 하시는데 그것이 우리 성도들의 현상적인 고통과 고난으로 부정되어 보이는 자유의 부정의 강요에서 자유하여 비록 성곽 없는 형태에서 노출되어진 가운데서도 주의 불 성곽 안에서의 보호하심 가운데 믿음의 선한 싸움의 자리에 기쁨으로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로서 ‘성곽 없는 촌락’과 같은 가운데서 실제로는 주의 불 성곽 안에 있는 주의 영광이 된 성도들로서, 바벨론에서 벗어나는 가운데, 즉 상대적인 ‘신들의 문’이라는 상대적 절대의 확신이라는 맹세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참으로 주의 복음을 전하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시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바가 된 자들로서의 귀한 주의 성도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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