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7월 28, 2005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증거

2005년 7월 28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슥5:1-11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증거

우리가 즐겨 먹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과일들 중에서는 껍질을 제거하지 않고 먹는 경우도 있고 껍질을 제거하고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껍질을 제거하고 먹어야할지의 여부를 알지 못하고 먹는 경우도 있고 그에 따른 유익의 여부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다고 하심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뜻하심에 따라 주의 뜻을 열어주시는 그러한 은혜를 입게 된다면 그 기쁨과 감사는 다윗이 칭송하였던 주의 말씀은 송이꿀보다 달다고 하였던 것을 이해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서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증거를 말씀하시는데 이는 말씀의 운동력을 의미하는 가운데서 증거되어지는 주의 말씀의 자증적 권세로서의 증거로 그 말씀하심 안에서 분별되어지는 것을 읽도록 하심의 은혜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스가랴 선지자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게 됨과 천사가 무엇을 보느냐는 질문과 함께 그것은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고 함을 말하고 있고 도적질하는 자들,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어 맹세하는 자들이 끊쳐질 것과 그 집을 사를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스가랴 선지자에게 말하던 천사가 눈을 들어 보기를 말하며 무엇이냐는 것을 묻는 스가랴 선지자에게 에바와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써 한 여인이 에바 가운데 앉았는데 동시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며 이것은 악이라고 하며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구리 위에 던져 덮음에 대한 것과 두 여인이 나왔는데 학의 날개를 가지고 그 날개에 바람이 있음과 그 에바를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지고 감과 그것의 목적적인 것은 그들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으며 준공되면 그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음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온 땅에 있는 자들의 그들의 모습을 지적하시고 구체적인 것은 교회의 질서를 읽지 못하는, 아니 읽지 않는 순종치 못한 자들의 정체성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두루마리가 날아간다는 것은 그 움직임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이 사람에 날린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자증적 역사를 마음에 두게 되어지며 그 살아 있는 말씀으로서의 증거의 자증적 권세라는 것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내용적인 것은 두 부분으로 해서 전반적인 것과 비유적인 것으로 나누이면서도 전체적인 증거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주라는 개념은 인식적인 측면에서 묘사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죄인들에게 있어서는 저주로 나타나지만 주의 말씀을 받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저주가 아닌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즉 저주를 알고 그것을 피할 수 있고 합당히 행할 수 있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성도들에게 기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분별되어지는 저주라고 함과 사르시는 심판의 내용은 도적질하는 것을 먼저 말씀하시는데 주의 뜻하심의 재가가 있지 않은 가운데서 그것을 취한다면 도적과 같은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임의적으로 주장하여서 자신의 이익을 말하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악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당하지 못한 소유권 행사는 도적이라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어 맹세하는 자들의 집을 사를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세상에 어떤 확실성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절대로 틀림이 없어’라는 식의 말이나 의도성을 가지고 납득당위성을 상대방으로 받게 말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절대’라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 즉 참된 신의 속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맹세한다는 것이 신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확실세계에서 확실한 납득을 위해 신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자존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임의적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이름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의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비유적 의미에서 실제적인 증거를 말씀하시고 있는데 에바속의 여인과 학의 날개를 가진 여인들의 모습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바 가운데 여인이 앉는 것을 악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이라고 하시면서 그 존재부정을 의미하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납조각으로 던져 덮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 뜻은 바로 교회의 질서를 알지 못하는 인간적인 자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실제적으로 총체적으로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예표적 말씀을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다고 하셨고 또한 여인의 후손으로써 오셨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후손들이라고 모두 메시아가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자들 중에 부정되어질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에 대하여서 말씀하실 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 11:11)

‘여자가 낳은 자중에’라는 말씀과 같이 사람들은 창조적 질서를 따라서 여자가 남자에게서 낳았으면서도 이제는 여자가 낳은 자들로 오게 된다는 것과 그러한 자들 중에 세례요한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그러한 여자의 후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의 후손을 의식하게 되어지는 여자에 대한 부정을 말씀하시는 즉 에바에 앉은 여인을 보고 악이라고 규정하심을 볼 때에 이것은 과연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잘못된 정당함을 입지 않은 여인의 후손을 의미하는 것이며, 여인의 후손들이란 것이 결국 잘못된 사상적 체계로 낳게 되어지는, 복음으로 낳게 되어지는 자들이 아닌 자들로서, 그 악함이 있을 것을 말씀하심으로 본문 스가랴의 비유의 말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연 하나님 앞에서 창조의 질서 그리고 그 창조의 질서의 실제적 연속성에 있게 되어지는 예수님을 믿어 거룩하게 새롭게 재창조되어진 자들의 질서적 의미를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을 받기를 거절하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함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11장에서 말하고 있는 여자가 교회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는 규례를 지킴에 대하여 말하게 될 때에 창조적 질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규례라는 개념 자체만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말하고자 했던 그 창조적 질서를 믿음으로 받으며 이해할 수 있도록 권면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교회의 연합의 증거로서의 성찬에 참여하여 교회의 하나됨에 대한 증거를 할 수 있도록 함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1:1~16참고)

더욱 두 여인의 경우를 주목하면 그들이 학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데 그 아래 바람이 있었음에 대한 것은 그만한 추진력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 대한 것을 의미하며 그러한 재가 받지 못한 가운데서의 부정의 영적인 능력으로써 행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부정되어진 것은 그 부정되어지고 악으로 규정되어진 그 에바를 가지고 시날땅으로 가서 집을 짓고 제 처소에 머물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시날’ 땅은 바벨탑이 세워진 곳입니다. 즉 구음이 하나인 가운데서 언어가 하나인 가운데서 그들이 그 부정되어진 인식을 같이 하였던 것입니다. 즉 바벨탑은 바로 탑을 쌓아서 하늘에 닿게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자는 합목적적인 의도에서 행해진 것인데..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증거를 배반하는 것으로써 자신들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기에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들이 아무리 여자에게서 난 자들로서 그 큼을 말하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존의 하나님의 계시적 정당함을 얻어 탄생한 세례요한보다도 낮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마 11:11)하셨던 것입니다.

즉 시날땅에 거하는 자들의 크다 함은 이미 부정되어진 것이며 심판을 자초한 것으로 불심판에 사르기로 내어준 자들의 처소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조심하여야 할 것은 주의 몸된 교회의 성도들은 그 교회의 통일성을 정체성을 잘 이해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창조의 질서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 안에서 재창조함을 얻은 자들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우위적 개념 인위적인 정당함에 따른 교회 이해를 할 때에 합당하지 않은 악의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관이 없어서 신학적으로 속성적 전달과 같은 의미에서 마리아와 예수님에 대한 동격적인 경우나 또는 종속적 개념까지 언급되어질 수 있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위적인 것으로 그 악을 말하게 되며 대표적인 악으로 자리매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성신학과 같은 어떤 상대적인 인권적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교회를 해석하려고 하는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라고 하는 개념이 성립되어질 수 없는 것과 같이 생각해서 인위적인 여성의 권위를 위한 측면에서 주의 종들로서의 질서적 입장을 흐리게 하는 것으로도 나타남을 보는데 이러한 것도 역시 악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인 증거를 마음에 두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과 그러한 경향들의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이름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기억하고, 여러 가지 가능성의 정황이라고 함의 요구에서 비로소 교회의 질서를 생각함 보다는 주의 말씀하신 창조적 질서를 기억하여서, 참되게 교회의 질서를 생각하는 가운데 악을 멸하고, 하나님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하는 종들로서 주께 합당한 기도를 드리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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