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1월 29, 2004

베드로의 슬픔과 통곡

2004년 11월 28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22:54-71
베드로의 슬픔과 통곡

사람들은 누구나가 모두 행복을 추구하고 있고 그것의 한 표현이 되어질 수 있는 기쁨이라고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사실이면서도 인생에 있어서 그러한 것만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한다면 아직 인생에 대한 숙고적인 의미를 마음에 두지 못한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人生)에 있어서는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는 것입니다. 슬픔을 향한 기쁨이 있는가 하면 기쁨을 위한 슬픔이라는 것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성에 대하여서는 그 행복에 대한 실제적인 기준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임의적으로 설정하면서도 그것이 진정한 사실로 납득되어지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아주 기쁨을 추구하지만 그러한 것이 종국에 가서는 슬픔으로 귀착되어지는가 하면, 고통과 고민으로 기쁨의 실제를 부여할 수 없는 슬픔에서도 진정한 기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은 심리적으로 새디즘 즉 사디즘(sadism)이나 매저키즘, 즉 마조히즘(masochism)이라는 것에서 비롯되어지고 해석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이러한 기쁨과 슬픔이라고 하는 것의 방향성을 생각하게 하고 그 전환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의 슬픔과 통곡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54절에서 6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3절에서 7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54절에서 6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그곳에서 포도주 떡으로 언약을 세우신 후에 제자들과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는데 그곳에서 가룟유다의 주님을 파는 것에 이어서, 예수님을 잡아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감에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감과 그곳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되어지는 것을 아주 현장감이 있는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이 베드로를 돌아보심에 베드로의 심히 통곡함에 대한 기록이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3절에서 7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밖에서 지키던 자들이 예수님을 희롱하고 때리고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친 사람이 누구냐는 식으로 대하고 있음과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모이어서 예수님을 공의회에 넘겨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과 예수님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고 그들이 그 말씀을 받지 못하고 자신들이 정당함을 임의적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베드로의 통곡하게 되어짐과 그에 앞선 슬픔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문맥상으로 살펴보며 그 전환이라고 함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그 실재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현장감 있게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베드로의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수치를 당하는 가운데서 주님을 부인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께서 돌아보심에 있어서 베드로의 인식의 전환과 기쁨을 위한 기쁨의 실제를 향한 고통과 슬픔의 전환으로써의 통곡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과 성만찬을 하실 때에 주님의 뜻하심을 제자들이 세상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고 또한 그러한 가운데서 그들은 예수님의 잡히실 것에 대한 것과 고난 받으실 것에 대한 언급하심에서 그들은 슬픔에 잠겼던 것입니다. 더욱 현실적으로 예수님의 잡혀가심이 눈앞에서 전개되어지고 있는 가운데서는 진정한 자신들의 존재의 부정이라는 사실의 실제를 강요받게 되어지는 자리에 서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더 잘 살피고자 하는 베드로의 충동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구별되어졌고 잡혀가시는 주님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외적으로 자신의 존재라고 함을 자의적으로 변명해야하는 자리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될 때에 주님은 베드로를 돌아보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돌아보심은 그냥 힐문하시는, 연민하시는 또는 환멸감에서의 배척하심을 나타내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기억 속에 실제의 판단의 전환을 위한 기억나게 하심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즉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게 된 것은 이미 예수님이 성만찬 석상에서 이미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되었다고 함에 있어서는 이러한 현실적 실제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주권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과 그것은 베드로 자신을 비롯한 제자들 자신들의 존재 부정에 따른 슬픔의 생각과 달리 주 안에서 여전히 존재의 정당함과 실존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주님이 잡히실 때에 주님의 뜻하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신 사실도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성전에 있을 때에 잡지도 못하던 자들이 지금 주님을 잡으러 나온 것은 주님 자신이 허락하신 그 때라고 함과 그 때에 있게 되어지는 것을 규정하고 주장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심도 기억함이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눅 22:53)

그처럼 그러한 자신에 대한 예언에서 자신과 함께 있었을 때에 주께서 하신 말씀에서 또한 그러한 인식의 전환이 합당하다는 것을 느끼며 인식의 전환으로써의 통곡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을 위한 그것을 향한 인내의 자리에 서기 위한 인격적인 전환으로써 회개로써 그 통곡의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후에 있게 되어지는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인식이 있으면서도 그들의 연약함은 상대적으로 완성되어진 것으로 나타나는 것의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어지는 것이며 상황은 그리 쉽게 인정하는 사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것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주님의 수욕과 수치라고 함이 계속되어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이라고 함은 그들이 상대적인 측면에서 지지되어질 수 있는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로서의 정당함을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진정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주님은 자존의 하나님으로써 자신의 기뻐하는 뜻으로 자신을 상대적으로 나타내시지 상대적인 것의 요구와 범주에 한정되어진 가운데서 증거하시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보이셨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았으며 믿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도 상대적인 것에서 확실한 여지라고 함이 없다는 것과 다만 동의적인 차원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들은 이미 그 여지를 마음에 두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는 기쁨도 있지만 슬픔이라고 함도 고난이라고 함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모든 인생이 죽음이라고 함에 있어서 죽음의 슬픔이라고 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종된 자리에 서게 되어지며 그로인한 슬픔이 항상 인생의 기로에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시는 분복으로 사람들이 삶에서 누리는 기쁨으로 그것의 시름을 잠시 실제적으로 잊게 하시는 은혜가 있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종노릇하는 자리에서 주님께서 구원하시려고 구별하시는 자로 그리스도로 구원자 그리스도로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인해서 그러한 정교한 메시아 이론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냐는 것과 그러한 것 중에 하나가 기독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 말은 설득의 당위성을 말할 수도 있지만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적인 자체적 정당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자신의 존재를 상대적인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게 되어지는 자리에 서지 않는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심을 인하여서 그 자신의 의로움을 하나님의 우편에서 나타내실 때에 그 자존의 절대 정당함은 상대적인 납득 이유로 주님을 배척하는 자리에 서는 자들의 기쁨은 결국 슬픔으로 종결되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의 사실을 주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따른 것으로써 신실함을 믿을 때에 그 사실은 현실적 강요로 슬픔이라고 함이 기숙되어진다고 하여도 구원의 기쁨의 실제로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증거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의 자존의 하나님이심의 증거와 그를 믿는 자들을 하나님 자녀로 삼으심에 있어서 그 절대 신실하심을 의지하여서 존재 부정을 하는 헛된 현실적 실제의 강요의식을 벗어나서 주의 구원하심의 기쁨과 사실로 띠를 띠우시는 또한 그것을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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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11월 25, 2004

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義)

2004년 11월 24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8-17
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義)

시기적으로 지금은 초(初)겨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움출이기 쉬운데 적당한 운동이 필요하고 넘어짐이나 여러 가지 부딪히는 그러한 일은 건강을 위해서 없어야 할 것입니다. 조그마한 충격에도 뼈가 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구쟁이가 아니라고 하여도 넘어서져서 뼈를 다칠 수도 있는데 그 뼈가 부러졌다가 이어지면 그 부분은 오히려 단단하다고 합니다. 다만 뼈가 붙은 바로 옆 부분에서는 자체적인 역학적인 불균형으로 또는 상대적인 약함으로 오히려 전체적으로 다친 부분이 오히려 다칠 수 있는 경우의 위험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이 신구약 성경의 합리적 불연속성에 대하여서 상당히 비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비판 가능하다고 그것이 또한 정당하다는 개념은 항상 같이 있을 수 있는 것만은 또한 아님을 기억할 때에 그러한 임의적 사실에 실제적 사실처럼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신구약 성경에 대하여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 그러한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전반적이고 총체적인 복음의 내용과 자신에 대한 것을 말한 후에 축복함에 이어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짐에 대한 것과 그들을 위한 자신의 기도를 말하며 심히 만나기 원했는데 그것은 성도들의 교제라고 함에서 피차 안위를 받기 위한 것이라고 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로마의 예수님을 믿는 성도로서의 형제들에게 가고자하는 노력이 있음에 대한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그러한 가운데서 길이 막혔음에 대한 언급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열정은 자신이 빚진 자임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고, 로마에 있는 형제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는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언급을 하고 있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심을 언급하고 있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살 것에 대한 언급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도 바울은 성도의 교제라고 함 안에서 문안하고 있음과 그 로마의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자신의 실존적 증거와 함께 그 내용으로써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음에 따라 믿음으로 의인이 살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성도의 교제 안의 정체성으로 로마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함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이단들은 말하기를 ‘기존의 교회에 다시 복음을 전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하면서 교회에 복음을 사도 바울이 전함에 대한 것을 기존교회의 부정의 당위성이 성립되어지는 것으로 말하고 주장하는 경우를 접해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거짓되며 잘못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형제들의 모임으로써 교회를 부정하고 다시 복음을 전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즉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전도함에 있어서 같이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그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는 것으로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 이 글을 쓰는 것은 마치 설교와 같은 서신을 통한 교육과 교제라고 함에서 자신도 그들의 섬김 속에서 안위를 받고자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미 그들의 성도됨을 부정하는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며 바울이 피차 안위를 받고자 함에 의미는 자기모순이라는 개념을 내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과 전도하여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 교제를 나누게 되어질 자들이 있음과 그들과의 안위를 나눔을 위한 것을 말할 수 있지만 사도 바울은 이미 이 수신자들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그들을 축복하며 말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섬김과 성도의 교제 즉 협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한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더 풍성한 성도의 교제를 말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자신들의 행함의 특이한 정체성을 위하여 기존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들의 모임으로써의 교회를 부정하는 모습은 성경해석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있으며 실재와 사실에 대한 분별의 기준도 없다고 함을 말해두겠습니다.

다음으로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적 입장에서도 본다면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 부끄러워한다면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을 기억할 때에 어떤 인위적 사실로써의 복음을 애써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합목적적인 개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보여질 수 있다는 개념과 사실과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할 것입니다.

그 본문의 구문만 주목할 때에는 그러한 일상적인 인식이라고 함의 이입하여서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문맥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그 성경의 문맥적인 측면에서는 그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이미 1절에서 7절에 나타나고 있는 복음이라고 함이 그 아들에 관한 것으로 예수께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인하여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음에 대한 사실에 있어서 부끄럽지 않다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자신이 주관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생명의 주로서 ‘스스로 존재하는 자’외에는,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외에는 그 이상도 이하도 없고 어느 누구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러한 자존적 자기 절대 정당함이 예수께서 하나님 자신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타내심에, 그러한 자기 절대 정당함을 상대적인 범주에서는 비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 비판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이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가 육신적 개보로써의 언약이 있게 하였던 할례라는 개념에 주의 언약하심이 매여 있어 정죄 받게 되어지는 자리에 있지 않은 것과 같이 모든 이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질 것이라고 함을 주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그의 사역가운데서 실제적으로 깨닫게 하심에 대한 증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자들에게 빚진 자의 심정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은 그의 신앙의 윤리적 동기부여의 힘이 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서 마지막으로 주목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의로 여기심에 있어서는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음에 의로 여기셨던 것입니다.(창 15:6) 그런데 복음이 그 아들에 대하여서 언급한 것인데 그 아들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에 대한 증거의 실제는 바로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증거와 그에 따른 의로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는 자로서 죽음이라는 상대적 부정이라는 개념의 실제적 판단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심의 의미를 함축하여 증거함에 대한 합당한 증거자로 서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에 있어서 그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는 것의 동일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는 것의 내용적 의미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실재의 증거를 마음에 두지 못한 가운데서 루터의 오직 믿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상대적 개연성에 따른 불 분명성에 대하여서 비판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실재에 대하여서 분별이 없는 가운데서의 합리성의 나락에서의 탄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신구약의 통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마태복음 1장 1절에 나타나고 있는 증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함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서 그 실재적인 증거가 되었음에 대한 것을 분별하는 것에서 답변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는 합리성의 완전성을 의지하지 않고 그것의 판단으로 부끄러움에 이르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음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떤 목적을 위한 의지적 개념에서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에 한계가 있고 그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존하신 하나님에 증거로써의 예수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그로 인하여 의롭다하심의 그 증거의 사실은 하나님의 절대 신실하심에서 이루어짐을 기억할 때에는 결코 너무나도 합당한 실제로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고 있음을 기억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의 의롭다 하심의 칭함을 받은 자들로서 이 의로운 복음 예수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온전히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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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월요일, 11월 22, 2004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2004년 11월 21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수4:1-24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의 책들은 많이 나오고 있고 역사와 해석에 대한 문제도 상당히 거론되어지는 것이 그 나라의 문화와 삶과 정체성과 관련되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역사라는 개념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다른 여러 영역의 인식보다도 중요한 전체 정체성에 관한 당위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모 나라에서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왜곡시키고자 눈에 보이는 서툰 행위까지도 일삼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 왜곡에 있어서 독립 운동가들의 행적을 알리는 ‘선구자’라는 노랫말을 기록한 돌의 표면을 깎아내고 쓸 것이 없어 용(龍)이라는 글자를 써놓고 있는 것을 모 방송국의 보도로 알게 된 것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역사적인 증거로써의 이스라엘이 요단의 돌들을 자신들의 유숙하게 되는 곳에 남겨두고 증거를 삼았음에 대한 말씀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0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수아가 인도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를 정탐한 후에 이제 요단강을 건너게 되며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그 언약궤를 매고 간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에 머물러 있는 가운데서 물이 멈추게 된 때에 그곳에서 돌 열둘을 그 지파마다 취하여서 그들의 유숙할 곳에 두게 하시고 그것들이 후일에 표징이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약속한 바 있는 르우벤과 갓자손과 므낫세 반지파들이 먼저 건넴과 그날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두려워하게 하신 것과 같이 여호수아를 두려워하게 하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심에 있어서 요단에서 여리고쪽으로 그 제사장들이 올라오라고 하심에 있어서 그것을 순종한 것과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올라오니 그 요단강이 다시 합쳐서 예전처럼 언덕에 넘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역사적인 시간을 언급하시면서 그들이 유숙하게 되어지는 ‘길갈’이라는 곳에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그곳에 세움에 대한 것과 그것이 후일 후손들이 물을 때에 요단을 건넌 증표임을 말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여호수아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열두 돌을 취하도록 하심과 그 돌들의 증거라고 함을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돌들의 증거는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이루어진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의 권위적 정당함과 그 시간 그 섭리의 시대를 분별할 수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취할 수 있는 섭리로써 그 상관성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 열두 돌을 세운 길갈이라고 하는 곳에서는 교회의 기본적인 고백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가르침과 회개와 성례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데, 앞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이 길갈을 중심으로 긴박하게 돌아가는 역사들 그곳에서 정당함을 찾으려고 하는 자들의 모습과 그 모습들의 신실성의 시비라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손들이 기억하게 하는 증표를 준비하였던 것과 같이 주의 예식과 함께 주의 섭리에 대한 기술(記述)로써 믿음의 후손들을 가르칠 수 있기도 하고 오용하는 악한 자들의 모습도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전반적인 역사의 그러한 예를 모두 기술하고자 하는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유숙하게 하시는 그곳에서 그러한 우리의 인생에서 산돌이신 예수그리스도 주님의 뜻하심을 증거하는 것들이 바로 오늘날 요단강을 건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약속의 땅을 취할 수 있게 되어지는 증표과 같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며 나타냄이 옳은 것입니다.

거룩하신 예수그리스도 산돌이신 주님에 대한 증거들과 그 가운데서 주의 뜻하심을 오실 때가지 우리 믿음의 후손들에게 증거함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요단강이 흐름은 자연의 이치로써 하나님의 정하신 일반적인 당위성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주의 뜻하심 주의 택한 백성들을 위한 주의 계시적인 정당함은 그러한 것을 오히려 주장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주의 구원하심의 증거를 실제적으로 증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어지는 12개의 돌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이집트에서 피라밋 공사에 동원되어진 그 돌들에 대한 이해되어지지 않음이 더 화려하게 세상 속에서 알려지고 있는 것이며 그 맹목적 신비에 무엇인가 실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길갈에서 세워진 12개의 돌은 그 정체성을 하나님의 특별계시적인 정당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실제적으로 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 성례전적인 실제적 증거가 메시아 예수님이 오심에 있어서 완성되었고 이제 더 이상 실제적인 증거로써의 그것은 아닌 평범한 것이지만 우리가 그 증거하고자 한 그 증거의 실제는 주 안에서 이제 우리가 믿게 되어진 주의 가르침의 사실들로써 준비하며 우리 인생의 유숙하는 지금에 준비하며 주의 구원하심에 대한 증거로 주의 몸된 교회를 온전케 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힘써 나르며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뜻하심 안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해석이 상대적이면서도 주의 절대의 신실하심 안에서 정당한 주의 가르침의 실제로 받으며 주의 구원하심의 사실을 증거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은혜를 교회가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에게 있어서 주의 구원하심을 온전히 증거하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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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감사로 제사드리는 자

2004년 11월 21일 소망교회 추수감사주일예배설교
시50:22-23
감사로 제사드리는 자

오늘은 교회의 절기를 따라서 추수감사주일로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일반적으로 이 절기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오게 되어진 청교도들의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한 해의 지은 결실에 대한 감사를 하게 되어진 것에서 연유한 절기입니다. 물론 이 절기(thanksgiving day)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써 그것은 감사함에 따른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증거하는 것에 있습니다.

신앙의 절개(節槪)를 지키기 위해서 그 여러 어려움들에서 결실을 얻게 하심에 대한 구원을 기뻐하는 가운데서 지키게 되어지고 그러한 가운데서 교회의 절기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전통을 이해함에 있어서 전통이기 때문에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동일한 표현과 증거를 할 수 있음에 있어서 신앙의 전통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모범적인 행위라는 것을 맹목적으로 따른다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하심인 감사로 인한 구원이라고 함에 대한 증거를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에게 생각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찢으실 것으로 건질 자가 없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기억할 것으로써 감사로 제사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 행위를 옳게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그 행위를 옳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맙다는 표현이나 자신의 감사함을 표현할 때에 ‘물질적인 것’을 가지고 내놓고 고마움에 대하여서 표현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너무 정형화 되어지는 가운데서 가지지 못한 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고마움에 대한 표현까지도 어렵게 하며 부끄럽게 하는 그러한 강요된 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더 나아가서 비방하는 사람들은 역시 물질적인 것에 대한 관심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에 상당한 불만적인 것과 또한 돈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공식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여도 실제적인 것으로 느껴서 교회에 대하여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기본화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여도 감사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할 때에는 감사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부담되어지게 되는 것으로써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으로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야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으로 예물의 강요적 개념으로 형제를 공박하며 그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20절) 그러한 자리에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모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4절, 5절)

이러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없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나타나고 있음에 대한 주의 판단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물질적인 것을 받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과 같이 착복하는 자로 생각하는 자들의 악한 인식과 그러한 감사라는 명목으로 도적질하며 착복하는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을 잊어버림의 것으로써의 그 행위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감사한다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 얼마만큼 감사의 표현을 하여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행하는 만큼이라는 개념에서 통념적으로 이해하고 그 기준을 삼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잊은 자들로서의 착복의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진정한 실제를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다면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며 상대적인 기준 즉 착복하는 자들의 기준을 포장한 것으로써 행하여도 누가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도적의 의미가 되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것의 논란이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같은 관련된 혈연적 개념에서도 그 도적함을 위하여서 그 악함의 변론으로 형제들을 공박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착복함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에게서 울며 겨자 먹는다는 식의 감사를 드리는 자들의 모습까지도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잊은 까닭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써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성도들을 삼음에 있어서는 그 상대적인 것의 감사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림이 옳은 것입니다.

그 구별이라고 함은 야곱과 같은 언약의 백성으로서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 즉 언약의 하나님 아바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라는 중심으로 돌을 세우고 그곳에서 기름을 부어 성별하고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이 만나주심 안에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림에 대한 것을 약속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창 28장 참고)

우리 성도들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라는 그 중심으로 한 예배처소를 준비하고 그곳에 출석하며 주의 구원하심을 증거하는 중심으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관적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인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믿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증거로써 드리는 것으로써 상대적으로 많고 적음에 상대적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러한 물질을 하나님이 받으셔야만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로서 하나님이 상대적인 것에서 어떤 도움이나 조력을 필요로 한다는 식으로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되어지는 것은 또한 옳지 않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소위 사람들이 인식하는 상대적인 절대 빈곤이라고 함에 있어서 감사의 빈곤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을 강요하는 현실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신실하심은 그러한 것에서 판단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우리의 작은 모습들 속에서도 감사의 실재를 찾을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자존적 신실하심을 찬양하며 증거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잊은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자존적 신실하심에서 실제적인 감사의 자리에 서지 못하며 그 표현에만 급급한 가운데, 잘못된 기복적 신앙으로 비록 그 표현의 많고 적음에 따른 당위성을 갖춘다고 하여도 주의 판단을 받게 되며 주의 구원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본문에서 그 행위를 옳게 하는 것은 십일조와 헌물을 비롯하여 모든 예물은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에 대한 증거로써 드려짐이 옳은 것이며 주관적이면서도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실제를 찾게 되어지는 가운데서는 많고 적음이라는 개념에서 형제를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않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때에, 우리가 우리의 존재의 작은 것으로써의 판단을 받는 자리에 서게 된다고 하여도 그러한 가운데서도 자존의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기억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은혜도 입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하심에 대한 증거와 자존의 절대자로서 절대 정당함을 인하여 상대적으로도 절대 신실하시게 말씀하심을 나타내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초라함이라고 함에서 감사의 빈곤을 말하지 않으며 감사의 진정한 실재와 증거를 찾아내는 자로서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그 행위를 옳게 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는 종들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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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11월 18, 2004

복음을 위하여

2004년 11월 17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1-7
복음을 위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위한다’는 것은 그 뜻에 ‘보호한다 또는 변호한다’는 것과 더 나아가서 그것의 정체성을 위한 노력들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으로 사용하는 뜻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마치 주의 복음을 보호한다는 개념이 우리 증거자들에게 있는 것과 같이 오해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이라고 함을 우리가 변호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주의 복음에 대한 어떤 사실들을 기술하고 방어하는 것에 몹시 불편한 입장을 취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다른 이들의 비판적 목소리가 있음을 의식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비판이 있다는 것과 그 비판이 성립되어진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였던 사실에 근거한 불편한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주의 복음을 위한다는 사도 바울의 증거에서는 전혀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주목하며 주의 복음의 능력이라고 함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5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종 바울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음과 복음은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서 그의 출생하심과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음과 곧 그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그로 인하여 은혜와 직분과 그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하심에 대한 증거를 하며 이 글을 받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있기를 축복하며 인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의 내용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음에 대한 증거의 말씀과 그로 인하여서 주시는 주의 소유된 자들로서의 뜻하심을 받게 되는 은혜를 증거함입니다.

복음은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에 관하여 미리 예언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고 함을 말할 때에 그것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였을 뿐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식의 잘못된 생각을 하기 쉬운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고 함을 말씀하심은 역시적 시간 안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때도 있었다는 것과 자신이 메시아로서 자기 도취했다는 그러한 합리적 가정에서 그러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고 함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다른 사람들도 핑계할 수 없는(롬 1:20; 2:1)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의 인정과 찬양’이 있게 된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본문에서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하심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죽음이라고 하는 상대적인 존재와 상대적인 비존재라는 개념의 판단이라고 하는 자리에 서는 존재가 아니라 자존하는 자로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그가 바로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정당함 속에서 인간적인 모습과 계보적 모습으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즉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이라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장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심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표현적 상대성인 아들로서의 증거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며 증거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존재를 자기가 주장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의 자격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사심으로 자존의 하나님으로써 생명의 주인으로서 영원한 생명으로서 우리 성도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인하여 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예수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로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의롭다 칭하심으로 진정한 실재와 실제를 말씀하시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세상에 속하였으면서도 그것의 판단을 받지 않는 실재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 성도들은 주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는 주님의 의롭다하심에 상대적인 판단의 정죄를 받지 않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윤리의식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은혜의 동기를 따라서 나타나며 그것은 빗진 자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빚진자임을 언급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14절)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주님은, 시간이라는 역사라는 개념의 판단에서 자기도취적 개념에서 사람들의 등 떠밀리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어진 것이 아니라, 진정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심을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나타내심으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신 가운데 사람들이 그러한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핑계치 못할 복음으로서 자신을 나타내심을 의미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와 같이 핑계할 수 없는 주의 복음 그 아들에 관한 것을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는, 주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주의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하신 것에 대한 감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하는 그 중심에서 윤리적 동기로 나타나며 그러한 가운데서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보내심을 받았을 때에 진정 주의 복음을 위하여 힘써 행하고자 하는 중심을 주께서 우리 성도들 중심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우리의 삶이 주의 복음을 위해 정진하는 삶이 되어지는 은혜를 입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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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11월 11, 2004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2004년 11월 10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28:16-31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우리나라의 특유의 입시제도와 그 열기를 반영하는 것은 정황적 이해가 될 수 있으면서도 그러한 가운데서 그 열기라는 측면을 소개하고 자랑하는 가운데서 마치 독려(督勵)하는 듯한 책들이 서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오기(傲氣)’라는 것으로 소기의 학업성적을 내었다는 표현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열심이라고 함이 자신들의 앞길에 제제가 없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러한 ‘오기(傲氣)’라는 뜻은 ‘능력은 부족하면서도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은 상대적인 차원에서는 상당한 에너지를 통한 집념을 말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도 신앙을 말함에 있어서는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주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존하심에 대하여서 그 자존적 정당하심에서 그 나타내시는 구원과 섭리에 대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마치 없다고 함이 납득당위성이 있는 것처럼 거짓되게 허사를 경영하는데 그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올무가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자유케하심 안에서 주시는 그 담대함으로 주의 뜻하심을 증거하심의 증거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증거되어지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6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3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30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의 일행이 로마에 들어감에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게 함에 따라 사흘 후에 바울이유대인 중에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서 로마로 호송되어짐에 대한 개인적이고도 상대적 현실적인 진실이라고 함을 말함과 그 자기 민족 유대인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자 했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유대인들이 일자(日字)를 정하고 사도 바울의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며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함과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어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조상들에게 하신 말씀이 옳음에 대한 것을 증거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30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로마에서 만난 유대인들의 입장표명과 그들의 행함에서 읽게 되어지는 하나님의 섭리와 그것과 연속성에서 읽게 되어지는 바울의 증거와 자유함의 실제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유대인중에 높은 사람들을 사도 바울이 초대하여서 바울이 오게 된 경위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 화답하는 그 내용 중에서, 21절 이하에서 읽는 것과 같이, 유대에서 사도 바울을 폄하하고 고소하는 내용형식의 편지가 없었음과 또한 로마에까지 와서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 한 사람이 없음에 대한 것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비롯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그들의 헛된 열심이라고 하는 것이 결실로 로마에 나타나지 않은 상태를 읽도록 하심의 언급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비롯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그들의 헛된 열심이라고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고 마시는 것을 폐하는 자들의 중심과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도 다메섹이라는 외국성까지 마다않고 가는 열심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인들의 열심이라고 하는 것을 잘 알려진 현실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오기(傲氣)’라는 말이 어울리게 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즉 ‘능력은 부족하면서도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 ‘이미 자신들의 존재적 정당함을 그들의 죄악에서 정당하다고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그것을 인정하기 싫은 가운데서 가지는 허상의 마음’이 그것입니다.

더욱 주님께서는 이러한 책망을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사도 바울이 로마로 오는 그 항해 여정에서 2주간에 폭풍우에 밀리게 되어지는 그러한 가운데서 그들이 탑승한 실제적인 아드라뭇데노(죽음의 공회)의 배에서 구원받아 멜리디라는 섬에 있게 되어지고 성도의 교제로 이곳 로마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가운데서 복음을 증거하도록 하셨던 곳에 왔음을 기억할 때에

로마에서도 사도 바울을 훼방하는 자들의 경건으로써의 열심이라고 하는 행함이 있어야 할 것인데 본문에서는 전혀 없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후에 유대인들이 주축이 되어진 것으로도 추정되어지는 가운데서 전설에 의한다고 할 때에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함을 기억할 때에 바리새인들의 무리가 뒤따를 것을 예상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은 일반 교회의 성도들의 증거로 이어지게 되지만 계시로써 성경은 여기까지라는 것입니다. 계시적 실존이라는 정당함에서 실제를 말할 수 있다고 할 때에 복음의 자유함과 진정한 경건에 따른 열심은 상대적인 우겨쌈의 형식이라는 것에서도 존재와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비록 셋집에 유하는 바울이지만 그에게 오는 자들을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그리스도께 관한 것 즉 복음을 전함에 대하여서 금하는 사람이 없었음을 사실로써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가운데서 이사야의 말씀을 의지하게 된 것을 언급함에 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인용하는 구약의 본문은 이사야 43:8절에서 43장28절까지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 본문의 문맥을 보면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 자존의 하나님께서 구속하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임의적 변론 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이 옳음을 말하게 하라고 하심과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언급을 하시면서 모세의 기적과 같이 바다를 건너게 하심에 대한 것과 중요한 것은 22절 이하에서는 이스라엘이 괴로워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맥이라고 하는 것은 요한복음 서론에 해당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땅에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영접하지 않음이라고 함과 같은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육신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상대적 확실성의 당위성을 입는 해석을 합목적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이 자기 정당함으로 오셨으나 임의적으로 그 백성들이 받지 않음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요한복음 서론에 해석적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여서 교회에서는 기독론에 대한 허락되어지지 않은 상대적 합리성을 의지하다가 많은 고통을 자초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을 상대적 당위성으로 생각하는 경건이 판단받게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읽고 그 말씀이 이제는 주의 선택하심이 육체적 계보라는 것에 그 당위성을 두지 않고 누구든지 믿는 자들에게 열린 것이라고 함을 증거하도록 하심을 또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으로 표현하셨다면 상대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모순이라는 개념의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자체적 정당함이 절대의 재가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이 상대적인 사람의 모습으로도 절대의 자기를 절대적으로 표현하실 수 있고 계시하실 수 있음의 정당함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으며 자신의 절대 속성이 그 절대 신실하심이 찬양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을 믿었기에 큰 회당이 아닌 알려지지 않는 작은 셋집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주의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것은 오늘날 교회를 세우심에 있어서 초석으로 쓰이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으로 나타남을 섬길 수 있는 은혜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의 의롭다 하심의 정당함을 입었습니다. 그것은 존재적으로나 앞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기억할 때에 우리의 작은 현실들이라고 하는 개념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자유하게 하시는 가운데 열심히 달란트를 감당하게 하심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라고 할 때에 그들이 모두 장사한다면 유리한 점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고 하여도 모두 잃을 수 있는 강박관념이라고 함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는 그 속박의 실세를 느낄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바라볼 때에 두 달란트 가진 자이건 다섯 달란트 가진 자이건 한 달란트 가진 자이건 그 존재와 사역의 정당함을 읽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가진 자의 모습은 그러한 것을 읽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에서 의롭다 하시며 맡겨주신 것을 믿지 못하였기에 아브라함의 의로움에 들지 못하였으며 그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처럼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이 상대적인 것으로도 실제적으로 나타내신다고 하심을 기억할 때에 비록 우겨쌈을 당하게 되어지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하심을 실제로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충성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하는 가운데서 하늘에서 이루신 뜻하심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종들로서 쓰임을 받게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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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월요일, 11월 08, 2004

진실한 표를 내라

2004년 11월 7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수2:1-24
진실한 표를 내라

사회적으로, 부정에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이나 조직들에 있어서 그 사실을 알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소위 ‘내부 고발자’라는 자들이 그들인데, 이들의 신변에 대한 안전조치라고 하는 것이 국가에서 좀더 배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내부 고발자’라는 것은 다른 나라에도 있고 그 표현적 진술이 적절하지 않다는 측면에서 ‘휘슬(whistle)’이라는 말을 사용한다고도 하는 그러한 다른 나라의 예를 들고 있는 어떤 방송에서의 언급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모호하다고도 할 수 있는 상대적인 선함이라고 하는 것의 기준에서 일반적으로 보편화되어지고 있는 관습이나 악습 악행에 대한 납득이 한번에 일소되어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고발자의 판단이 개인적인 판단으로 취급되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하면 여러모로 그 고발자의 모습이 좋게만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보편적 인식의 건전하지 못함이 다시 객관적으로 판단의 어려움을 초래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의 백성들에게 이방의 여인으로써 ‘내부 고발자’ 또는 ‘내부의 조력자’라고도 할 수 있고 심하면 ‘매국노’라는 개념의 그 기생 라합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고 여리고를 엿보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냄을 받은 두 사람이 그곳의 기생 라합의 도움을 받아 정탐꾼을 찾는 자들에게서 보호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숨겨준 두 사람이 잠들기 전에 라합이 그들과 대화를 나눈 부분으로써 라합의 인식이라고 함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지역의 민심이라고 함과 의식들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서 읽도록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자신의 존재적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약속을 받게 되어지는 것으로써의 두 정탐꾼과 라합이 대화를 나눈 내용이고 이윽고 붉은 줄을 통하여서 성에서 내려주고 또한 앞으로 어떻게 행하여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책략도 말하여서 돌아가게 함과 그 두 사람이 돌아와서 여호수아에게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자신들에게 붙이셨음에 대한 것을 확신하며 정탐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라합의 믿음이 상대적으로 정당화 되어질 수 있는가 그리고 오늘날의 국가적 반역죄라고 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정당화 되어질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한 가지 더 하나님이 주신 복음의 사역이라고 함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 그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일반적으로 성경을 대하면서 상식적인 측면에서 아직 더 분명하게 성경의 오류나 비난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라합의 거짓말에 대한 것과 그의 나라를 배신한 모습이라고 하는 것의 윤리적 판단이라고 함을 무시한 가운데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배척되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의 논란이 되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거짓말의 실체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일반적으로 불특정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없다는 것과 그들의 기득권에 관련되어진 사실들을 언급할 때에 상당히 거짓말의 정체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불특정 사회의 인식이 연장되어 고려되어질 수 있는 역사적 차원에서는 그러한 거짓말의 정체성이 이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보편이라고 함이 절대의 보편과 상관성을 가질 때에 대등적인 비교라고 함이 허락되어진 가운데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정체성이 세상에서의 보편적인 인식의 정체성보다도 더 보편적인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고 할 때에 기생 라합은 그 보편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고 기독교 신앙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라고 함에서 그 실존을 말할 때에는 라합이 진정으로 옳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도 매국노와 특정 사회의 전복을 의도하거나 이루는 자들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구약에서는 어떤 지역적인 땅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또한 하나님나라의 기업이라고 하는 것과 동일시되어지는 가운데서 성례전적으로 묘사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계시관의 자존적 정당함에서 그 표현과 그 표현의 실제의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절대적으로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경의 기록이라고 함의 합목적적인 개념이나 또는 하나님나라의 기업이라고 하는 것을 이 땅에 동일시하여서 말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어떤 국가나 기업이라고 하는 것이 대등하게 비교되어지고 그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매국적인 행동이나 또는 어떤 특정한 사회의 기득권자체를 전체적으로 전복하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반적인 측면에서 자신에게 합법적으로 주어지는 기득권에 대한 표현과 주장이라고 하는 것은 계시의 존재와의 동일한 기록적인 상관이 없는 가운데서도 일반적인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것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주장할 수 있는 권세는 일반적인 측면에서 일반 사람들과 대등한 권리를 사회적으로 받게 되는 것을 전제하면서도 말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그 믿음의 두 정탐꾼들의 상황파악과 정보를 통하여서 준비하는 것을 중심으로 우리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의 모습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기 하는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따르는 가운데서는 원수와도 화목하게 하심에 있어서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말씀을 맺습니다.

‘진실한 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신 6:7~8참고) 주의 말씀하심을 따르고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의 존재적 정당함을 찾는 것과 그러한 섭리를 따를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라합이 말하는 진실한 표를 내라고 한 것에 답변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주의 복음은 핑계치 못하는 복음입니다. 진정으로 상대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면 상대적으로도 절대 정당한 주의 말씀이 있으며 그 말씀이 있음을 기억할 때에는 그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음에 대하여서 그 말씀을 받을 수밖에 없음에 주를 두려워하며 합당하게 그 복음의 동역자로 세우시는 경우도 있으며 그가 또한 그 말씀에서 주의 백성된 자로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은 자로 서게 되는 것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분별력이 있게 하나님의 주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자존의 하나님께서 원수가운데서도 화목케 하심에 있어서 고레스와 같은 자들을 세우시고 주의 택한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께서 함께하심에 대한 말씀을 증거하시는 가운데 이처럼 주님의 영광의 나라를 온전히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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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대를 가지며, 검을 사며

2004년 11월 7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22:24-38
전대를 가지며, 검을 사며

일상적인 어떤 관찰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현상을 바라볼 때에 가장 중요한 어떤 전환점이라든지 어떤 발상의 시점을 분별해낸다면 이해하고자 하는 것에 가장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과 그것에 따른 어떤 상황에 맞는 행동을 할 수 있고 그런 처신을 통하여서 자신의 유익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회적인 또는 다른 어떤 현상에 대하여서 해석해내고 또한 그러한 가운데서의 납득의 당위성을 인식하고자 하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이러한 것은 학문적인 개념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 이어지는 또는 현실에서의 학문적 개념으로 이어지는 가운데서 많이들 행하여 왔고 그러한 것은 오늘날도 중요하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의 판단의 실제라고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하는 것과 어떤 국한되어진 가운데서만 그 당위성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너무 분별하지 못하고 있고 이러한 것은 학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의 만찬에서 상당한 판단의 차이를 말씀하시고 있고 이것은 그때만이 아니라 새로운 전환점 새 언약적인 관점에서 말씀하심의 사실들을 나타내고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하여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4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5절에서 3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4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성만찬 상에서 떡과 포도주를 떼며 나누어주심으로 새 언약을 세우심에 이어서, 누가 더 큰 자인가라는 시비가 나타나 다투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이방인들의 임금들의 판단과 주님의 말씀하심의 차이를 말씀하시고 있고 하나님 나라를 제자들에게 맡기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몬에게 시험이 있을 것과 주의 기도하심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는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5절에서 3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전에 전대를 가지지 않음과 그 보냄을 받았을 때에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과 이제는 전대있는 자는 가질 것과 검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제자들이 분별하지 못하여 다툼이 되어지는 것의 분별하여야 할 사실과 그 시점 그리고 그 사역적인 측면에서의 말씀하심의 변화와 지속성이해에 있습니다.

먼저 요구되어지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누가 크냐는 다툼에 있어서의 관점과 중심의 분별인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의 나라라는 개념은 권세라고 하는 것을 세상적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높음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 권위와 당위성을 말할 수 있고 그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서 일한다는 것이 자신들의 입신양명이라는 개념으로 상대적 우위적 실제의식으로 다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세상에서의 상대적 우위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주님께서 섬기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며 또한 그러한 가운데서 즉 주님이 행하심에 대한, 주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서 그 권위의 당위성을 말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고레스 왕과 같이 상대적 우위가 주께로부터 언약가운데서 구별되어지는 가운데서 사용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면서도 주의 언약하심에서 섬김이라고 함을 위한 가운데 그리고 그러한 구별적 사역적인 권세의 당위성을 말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시몬에게 사단의 청구가 있음과 주님의 기도가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 당시의 앞으로 되어질 일에 현실적인 실제의 예언이 되어지며, 더 나아가서 새 언약을 받을 자들의 되어질 일들에 대한 실제적인 예언의 예표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되어질 현실적인 실제의 예언이라고 함은,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함이 되어지며 그러한 가운데서도 회개하게 하심의 은혜가 있도록 하시는 주의 의도하심과 주장하심의 섭리가 있을 것을 말씀하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언약을 받을 자들의 되어질 일들에 대한 실제적인 예언의 예표적인 것이라고 함은, 새 언약이라고 함을 받은 교회의 모습에 마치 요한 계시록에 나타나는 해를 입은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에 용이 삼키려고 했던 것과 같이 주의 나심과 주의 몸된 교회의 탄생을 부정하고자 하는 사단의 모습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계 12:1~6 참고)

그리고 두 번째 본문으로 주목하는 오늘 본문에서 전에는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셨을 때에 부족함이 없음을 말씀하심은 어떤 양식을 위한 합목적적인 개념으로나 또는 양식을 위한 돈이라고 함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비로소 의지하지 않도록 하심의 의미였으며 그것을 통하여서 여호와이레의 하나님 자신이 예수그리스도 자신이심을 나타내시고자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또 달리 주목하게 하시는 말씀을 나타내시는데, 그것은 전대 있는 자는 전대를 가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검을 가질 자는 겉옷을 팔아 살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보는 관점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본문의 문맥상 예수께서 세우신 새 언약의 지지 가운데서의 그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줄 수 있는 전대를 준비하라고 하심의 뜻하심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움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으로 진리의 검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을 자신의 존재의 부끄러움이라고 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의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도 비로소 의지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헐벗게 되어지는 가운데서도 그 복음으로부터의 존재적 정당함을 찾는 중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전대라고 함은 돈 주머니를 말하는 것인데 이는 이 때 당시에 있게 되어지는 달란트라는 개념이 돈의 개념과 같이 사용되어지고 있음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주 안에서 개발하며 주의 부르심에 그 달란트로 화답할 수 있도록 또한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 달란트를 분별하여서 주 앞에서 섬김의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께서 성찬식을 행하시면서 주의 나라를 제자들에게 맡기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되어질 일들이라고 함과 그 시점이 주의 잡히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시작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세상의 정치적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의 질서적인 실제를 인식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행정적 관료적 개념에 잡히고 계보적인 명령체계라는 개념에서 이루어지는 질서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시는 믿음 안에서 새롭게 구별하여서 인식하는 섬김의 체계를 이해하도록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도록 하시면서 주의 뜻하심의 달란트를 분별하여 개발하고 그 가운데서 때를 따라서 주의양식을 나누어줄 수 있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가운데서 섬기는 자들로 서도록 말씀하시고 있고 주의 말씀 안에서 그 앞에 되어질 일들을 분별하며 주의 말씀의 검을 사모하며 준비하며 믿음의 선한싸움을 싸워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주의 뜻하심을 분별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나에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서 주의 성도들의 교제 속에서 섬길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며 주의 말씀을 의지하여서 힘써 믿음의 선한 싸움의 달려갈 길을 잘 달려가시는 가운데 의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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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11월 04, 2004

그 섬은 멜리데라

2004년 11월 3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28:1-15
그 섬은 멜리데라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굴곡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기본적인 인식이라고 하겠습니다.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고 무엇인가 형통을 말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한 때도 있고 그리고 그러한 대비적인 개념으로만 말할 수 있는 때가 아닌 때도 있고, 등등,

그러한 인생의 여정의 기복적인 때 중에서도 소위 ‘슬럼프’(slump)라고 하는 그러한 때를 만날 때에는 너무나 곤고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길을 다 막힌 듯한 때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 때에는 상대적으로 어떤 나름대로의 반전을 시도하지만 그렇게 실제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지지 않을 때에는 더욱 곤고함을 느끼게 되어지는 고통도 감수해야 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우리 인생들 우리 성도들이 힘을 얻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시는 말씀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 항상 우리를 주장하신 것과 같이 현실적인 실제에서 주장하시는 가운데 힘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로마로 호송되어지게 되는 바울을 태운 배가 파선되어서 헤엄쳐 섬에 이르러 구원을 얻고 나서 알게 되니 그 섬의 이름은 ‘멜리데’라고 함을 알았음을 기록하고 있고 그 섬에서의 일들이 기록되어지고 있습니다.

그 내용인 즉 바울이 나뭇가지를 거두어 불에 넣는 가운데서 뱀에게 물린 사건과 그 가운데서도 해함을 당하지 않았던 일과 섬에 가장 높은 보블리오의 열병과 이질을 기도하고 안수하여 낫게 함과 그 가운데서 호의를 받게 되어지고 여정을 위한 쓸 것을 공급받게 되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석 달 후에 디오스구로라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이윽고 로마에 도착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고 그 여정에서 형제들을 만난 것이 간단하게 기술되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수라구사’와 ‘레기온’을 지나 ‘보디올’에 이르러서 형제들을 만나 저희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유하다가 로마로 가며 거기에서 형제들이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나옴으로 바울이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 ‘멜리데’에서의 석 달간 있었던 일에 대한 증거와 형제들을 만남에 대한 여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하며 우리의 인생여정에서의 주의 동행하심이 어떤 것인지 주목하며 기뻐하며 주께 영광을 돌리게 하심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이 ‘멜레데 섬’에서의 사도 바울의 모습이라고 함은 세상에 우겨쌈(고후 4:8)을 당하지 않는 성도들의 모습과 그 가운데서의 주의 뜻하심을 성실히 행하게 되어지는 자들의 모습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에 가서도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주의 뜻하심이라고 함을 이미 믿음으로 알게 하심에 따라서 자신이 무죄하다는 판결을 받을 수 있는 가운데서도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호소함에 따라서 믿음으로 그 여정을 선택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일행은 로마로 가는 배를 타게 되는데 그것은 ‘아드랏뭇데노’(Adramyttium)라는 배였습니다.(행 27:2) 그 이름의 뜻은 ‘죽음의 공회’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인력적인 측면에서 사도 바울의 행보를 막음으로써 하나님의 뜻하심을 막으려고 하는 그러한 의도함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믿어주시는 성도들의 전형적 모습으로서의 일시적으로 바울을 내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배를 바꿔 탔지만 그러한 의도라고 함은 이미 배를 바꾼다고 하여도 바뀌지 않았던 것입니다. 2주간 동안 그러한 죽음이라고 함의 공회를 지나는 것으로써의 항해여정에서 주의 뜻하심의 예정하심을 이루실 것을 믿는 바울의 믿음대로 그들은 그 한 섬 멜리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멜리데’의 이름의 뜻은 ‘꿀’(honey)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례요한의 외치는 자로서 들에 있을 때에 먹었던 ‘석청’(마 3:4, 막 1:6)이라는 것과 동일한 어근과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이 말하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그러한 표현을 사람들이 의미와 실제를 말하지 못하면서도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이 사람이 죄인된 것을 알지 못하며 자신의 존재의 정체성과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죽음이라고 함의 인생여정을 행하고 있는 것이 바울이 타고 가던 배들의 실제적 존재적 증거의 이름으로써 ‘아드라뭇데노’라는 ‘죽음의 공회’의 인생이었던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두 죽음이라는 인생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뜻하심의 섭리를 바라보는 가운데서 구원의 사실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함의 외침이 들에 있을 것이며 또한 그것이 세상이 받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진정한 구원을 받게 되어지며 그러한 구원받음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에서의 동떨어진 마치 우겨쌈을 당하는 것과 같이 현실로 다가 온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섬이 하나님을 앙망하리라는 것이 주의 교회에 이루어짐과 그 어떠함을 알도록 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사 42:4, 사51:5)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위로하심에서 믿음으로 씨를 뿌리며 그러한 일을 온전히 마칠 수 있도록 하심의 위로하심과 권고하심이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성도들의 만남에서 기쁨의 샘을 보게 하시고 담대하게 하심의 은혜를 입는 바울의 존재적 증거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는 가운데서 형제들을 처음만나는 곳은 바로 ‘보디올’이라는 곳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작은 우물’, ‘샘물’이라는 뜻입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샘물을 여신 것입니다.(시 104:10)

이제 우리 성도들은 주의 이름으로 주 안에서 그 샘물을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말씀을 맺습니다.

삶의 여정에서 곤고함과 그것으로 인하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리에 설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을 말씀하심이 오늘 본문에서는 세례요한과 같이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주의 위로하심이 있게 되며 주의 회복하게 하심의 은혜를 입게 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소위 사면초가라는 그러한 정황 속에서도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믿음으로 분별하여 행하여 나갈 때에는 그 우겨쌈(고후 4:8)이라고 함에서도 실제적인 하나님의 뜻하심을 받들 수 있고 또한 더 일할 수 있는 달란트와 인도하심이 있으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기업을 다윗과 같이 기뻐하는 자리에 서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종으로서 세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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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1월 01, 2004

부끄럽지 않은 복음

2004년 10월 31일 소망교회 종교개혁주일예배설교
롬1:1-17
부끄럽지 않은 복음

일반적으로 어떤 일이나 사안, 그리고 그 밖에 어떤 정체성에 대하여서 ‘부끄럽지 않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그러한 태제라고 하는 것, 즉 부끄러움을 애써 감추고자 하는 것의 한 표현일 뿐이라는 것으로 일축할 수도 있는 것이 사실로써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의 사실의 실제를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그러한 일축함이라고 함이 그 경솔함과 모자람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31일에 루터의 면죄부 사건에 대한 토론을 위한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성 ‘캐슬교회당’ 문에 붙임으로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진정으로 그 종교개혁에 대한 분명하고 실재적인 것에 대한 증거로써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은 내용적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신 주의 말씀과 그 복음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종들의 중심을 증거하시는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종 사도 바울이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음과 이 복음은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임을 말하고 있고 이러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을 증거하는 가운데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평강이 있기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항상 쉬지 않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함과 만나보기를 심히 원하였는데 그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견고케 하려 함과 피차 안위를 얻으려고 하기 위함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는 길이 막혔지만 빚진 자로서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심과 같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복음을 전하고자 심히 원했던 사도 바울이 그 입을 열었을 때에 자신은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에서의 팽배할 수도 있었던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정황을 읽고 있었다는 것임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더욱 오늘날의 정황도 이와 비교되어진다고 할 때에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님에 대한 것을 그 실상을 마음에 둠이 아름다운 것이며 또한 그 사실의 실상의 정당함을 주목하는 것도 합당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한 대학인 소르본느 대학에서 제출되어진 한 논문에서는 기독교를 의식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의 신화로 취급하면서 비이성적이라고 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자신들의 실증주의적 입장이 정밀과학적 입장으로 받아들임이 좋을 것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조르주 귀스도르프, 신화와 형이상학, 문학동네 p7)

이러한 것은 중세에 있어서, 또한 구교에 증거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분명한 사실을 증거하지 못함에 대한 것을 합리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신론을 말하는 자들은 신의 형상이라고 함을 배척하는 가운데서 신도 배척할 수 있다는 지극히 자의적인 합리성을 쫓아서 결론적으로 종교는 아편이라는 개념으로 일관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일반적인 상식적 측면에서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측면을 맹목적으로 주장하는 자들로써 기독교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느냐는 식으로 그 맹목성을 따르는 자라는 측면에서 기독교의 신앙이라고 함을 복음을 믿는 것이라고 함을 부끄러운 것으로 인식시키려고 하는 미련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적 사회인식에 대하여서 우리 성도들이 분명하게 기억해야할 것은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이 인식하고 증거하는 중심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보내심이라고 함의 뜻하심을 확신(행 27:24)하는 가운데서 성도들의 만남을 위해 힘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로마라고 하는 뜻은 ‘세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러한 곳에 주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게 하심의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선지자로 그 아들에 대하여서 증거한 것입니다. 그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앞선 자로써 주의 복음을 전하는 종들을 표현하는 구약적 표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믿음의 종들의 증거적 차원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 의로움의 한 믿음의 조상을 부르심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입니다. 즉 그 아브라함의 언약적 계보가 바로 예수께서 세우신 자신의 교회로써 오늘 날의 교회의 정체성과 모습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마 1:1)

‘아브라함이 의로 여기심을 받게 되는 것은 여호와를 믿음에 대한 것’(창 15:6)임을 다른 자들(약 2:23)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도 인식하고 있었고(롬 4:3, 롬4:) 그러한 중심을 가지고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인 기반에서의 합리성의 정당함을 의지하여 증거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셨음과 그렇게 하심에 대한 것을 기억할 때에, 상대적인 합리성의 여지라는 개념이나 또는 합리성의 재고라는 개념이 ‘상대적으로 성립되어질 수 있느냐’ 그러한 말들을 말할 때 그것들은 이미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도행전에서 아그립바 왕의 판결 앞에 서 있는 바울과 그의 증거를 통하여서 주목할 수 있는데, 상당한 분별 있는 가운데서 그 아그립바 왕은 그 반론을 내놓지 못하고, 정적인 측면의 입장에 서 있는 베스도는 사도 바울에게 미쳤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참으로 정신차린 말을 한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행 26:17~25)

중세의 가르침의 연속성이 있는 구교에서는 그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인 증거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름이라고 하는 것 상대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기술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한편으로 옳은 것이지만, 자존의 하나님을 믿었더라면,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자기 정당하심으로 상대적인 것으로도 말씀하신다면 그 이름과 상대적인 것으로도 그 상대적인 비판적 불확실성이라는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도 사실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함이 진정한 경건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하나님 앞에서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가서도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로써 그 스스로 지혜로움의 정당함을 하나님께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롬 1:22, 23) 아무리 많은 말을 하고 지식의 열쇠를 가졌다고 하여도 자존의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경건한 모습은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이제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서 그로부터의 상대적으로도 절대의 말씀하심을 믿는 가운데 성경과 그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며 그 아들에 관한 증거로서의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으로써의 복음을 믿는 것은 전혀 비이성적이지도 않고 진정으로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며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서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서 제한된 지식의 참됨이라고 함과 그 보편성이 하나님을 의지한 절대 보편적인 생각일 때에 그것은 상대적 보편의식보다도 더 보편적인 생각을 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결코 비이성적이라는 판단에서 파생되는 부끄러움을 취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 하나님을 믿음과 하나님 자신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음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지극히 참된 것으로 인생이 정신차린 말로써 받아야 함이 그 합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던 사도 바울이 사슬에 매인 것 외는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했던 것과 같이 그러한 자리에 서도록 권고함에 있어서 그 첫 번째가 주의 복음을 분별하는 가운데서 복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에 담게 되어지는 가운데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택한 그릇과 같이 쓰임을 받으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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