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11월 11, 2004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2004년 11월 10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28:16-31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우리나라의 특유의 입시제도와 그 열기를 반영하는 것은 정황적 이해가 될 수 있으면서도 그러한 가운데서 그 열기라는 측면을 소개하고 자랑하는 가운데서 마치 독려(督勵)하는 듯한 책들이 서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오기(傲氣)’라는 것으로 소기의 학업성적을 내었다는 표현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열심이라고 함이 자신들의 앞길에 제제가 없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러한 ‘오기(傲氣)’라는 뜻은 ‘능력은 부족하면서도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은 상대적인 차원에서는 상당한 에너지를 통한 집념을 말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도 신앙을 말함에 있어서는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주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존하심에 대하여서 그 자존적 정당하심에서 그 나타내시는 구원과 섭리에 대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마치 없다고 함이 납득당위성이 있는 것처럼 거짓되게 허사를 경영하는데 그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올무가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자유케하심 안에서 주시는 그 담대함으로 주의 뜻하심을 증거하심의 증거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증거되어지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6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3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30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의 일행이 로마에 들어감에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게 함에 따라 사흘 후에 바울이유대인 중에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서 로마로 호송되어짐에 대한 개인적이고도 상대적 현실적인 진실이라고 함을 말함과 그 자기 민족 유대인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자 했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유대인들이 일자(日字)를 정하고 사도 바울의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며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함과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어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조상들에게 하신 말씀이 옳음에 대한 것을 증거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30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로마에서 만난 유대인들의 입장표명과 그들의 행함에서 읽게 되어지는 하나님의 섭리와 그것과 연속성에서 읽게 되어지는 바울의 증거와 자유함의 실제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유대인중에 높은 사람들을 사도 바울이 초대하여서 바울이 오게 된 경위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 화답하는 그 내용 중에서, 21절 이하에서 읽는 것과 같이, 유대에서 사도 바울을 폄하하고 고소하는 내용형식의 편지가 없었음과 또한 로마에까지 와서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 한 사람이 없음에 대한 것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비롯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그들의 헛된 열심이라고 하는 것이 결실로 로마에 나타나지 않은 상태를 읽도록 하심의 언급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비롯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그들의 헛된 열심이라고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고 마시는 것을 폐하는 자들의 중심과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도 다메섹이라는 외국성까지 마다않고 가는 열심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인들의 열심이라고 하는 것을 잘 알려진 현실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오기(傲氣)’라는 말이 어울리게 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즉 ‘능력은 부족하면서도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 ‘이미 자신들의 존재적 정당함을 그들의 죄악에서 정당하다고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그것을 인정하기 싫은 가운데서 가지는 허상의 마음’이 그것입니다.

더욱 주님께서는 이러한 책망을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사도 바울이 로마로 오는 그 항해 여정에서 2주간에 폭풍우에 밀리게 되어지는 그러한 가운데서 그들이 탑승한 실제적인 아드라뭇데노(죽음의 공회)의 배에서 구원받아 멜리디라는 섬에 있게 되어지고 성도의 교제로 이곳 로마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가운데서 복음을 증거하도록 하셨던 곳에 왔음을 기억할 때에

로마에서도 사도 바울을 훼방하는 자들의 경건으로써의 열심이라고 하는 행함이 있어야 할 것인데 본문에서는 전혀 없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후에 유대인들이 주축이 되어진 것으로도 추정되어지는 가운데서 전설에 의한다고 할 때에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함을 기억할 때에 바리새인들의 무리가 뒤따를 것을 예상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은 일반 교회의 성도들의 증거로 이어지게 되지만 계시로써 성경은 여기까지라는 것입니다. 계시적 실존이라는 정당함에서 실제를 말할 수 있다고 할 때에 복음의 자유함과 진정한 경건에 따른 열심은 상대적인 우겨쌈의 형식이라는 것에서도 존재와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비록 셋집에 유하는 바울이지만 그에게 오는 자들을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그리스도께 관한 것 즉 복음을 전함에 대하여서 금하는 사람이 없었음을 사실로써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가운데서 이사야의 말씀을 의지하게 된 것을 언급함에 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인용하는 구약의 본문은 이사야 43:8절에서 43장28절까지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 본문의 문맥을 보면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 자존의 하나님께서 구속하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임의적 변론 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이 옳음을 말하게 하라고 하심과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언급을 하시면서 모세의 기적과 같이 바다를 건너게 하심에 대한 것과 중요한 것은 22절 이하에서는 이스라엘이 괴로워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맥이라고 하는 것은 요한복음 서론에 해당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땅에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영접하지 않음이라고 함과 같은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육신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상대적 확실성의 당위성을 입는 해석을 합목적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이 자기 정당함으로 오셨으나 임의적으로 그 백성들이 받지 않음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요한복음 서론에 해석적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여서 교회에서는 기독론에 대한 허락되어지지 않은 상대적 합리성을 의지하다가 많은 고통을 자초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을 상대적 당위성으로 생각하는 경건이 판단받게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읽고 그 말씀이 이제는 주의 선택하심이 육체적 계보라는 것에 그 당위성을 두지 않고 누구든지 믿는 자들에게 열린 것이라고 함을 증거하도록 하심을 또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으로 표현하셨다면 상대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모순이라는 개념의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자체적 정당함이 절대의 재가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이 상대적인 사람의 모습으로도 절대의 자기를 절대적으로 표현하실 수 있고 계시하실 수 있음의 정당함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으며 자신의 절대 속성이 그 절대 신실하심이 찬양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을 믿었기에 큰 회당이 아닌 알려지지 않는 작은 셋집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주의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것은 오늘날 교회를 세우심에 있어서 초석으로 쓰이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으로 나타남을 섬길 수 있는 은혜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의 의롭다 하심의 정당함을 입었습니다. 그것은 존재적으로나 앞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기억할 때에 우리의 작은 현실들이라고 하는 개념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자유하게 하시는 가운데 열심히 달란트를 감당하게 하심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라고 할 때에 그들이 모두 장사한다면 유리한 점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고 하여도 모두 잃을 수 있는 강박관념이라고 함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는 그 속박의 실세를 느낄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바라볼 때에 두 달란트 가진 자이건 다섯 달란트 가진 자이건 한 달란트 가진 자이건 그 존재와 사역의 정당함을 읽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가진 자의 모습은 그러한 것을 읽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에서 의롭다 하시며 맡겨주신 것을 믿지 못하였기에 아브라함의 의로움에 들지 못하였으며 그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처럼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이 상대적인 것으로도 실제적으로 나타내신다고 하심을 기억할 때에 비록 우겨쌈을 당하게 되어지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하심을 실제로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충성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하는 가운데서 하늘에서 이루신 뜻하심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종들로서 쓰임을 받게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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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