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1월 08, 2004

진실한 표를 내라

2004년 11월 7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수2:1-24
진실한 표를 내라

사회적으로, 부정에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이나 조직들에 있어서 그 사실을 알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소위 ‘내부 고발자’라는 자들이 그들인데, 이들의 신변에 대한 안전조치라고 하는 것이 국가에서 좀더 배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내부 고발자’라는 것은 다른 나라에도 있고 그 표현적 진술이 적절하지 않다는 측면에서 ‘휘슬(whistle)’이라는 말을 사용한다고도 하는 그러한 다른 나라의 예를 들고 있는 어떤 방송에서의 언급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모호하다고도 할 수 있는 상대적인 선함이라고 하는 것의 기준에서 일반적으로 보편화되어지고 있는 관습이나 악습 악행에 대한 납득이 한번에 일소되어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고발자의 판단이 개인적인 판단으로 취급되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하면 여러모로 그 고발자의 모습이 좋게만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보편적 인식의 건전하지 못함이 다시 객관적으로 판단의 어려움을 초래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의 백성들에게 이방의 여인으로써 ‘내부 고발자’ 또는 ‘내부의 조력자’라고도 할 수 있고 심하면 ‘매국노’라는 개념의 그 기생 라합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고 여리고를 엿보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냄을 받은 두 사람이 그곳의 기생 라합의 도움을 받아 정탐꾼을 찾는 자들에게서 보호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숨겨준 두 사람이 잠들기 전에 라합이 그들과 대화를 나눈 부분으로써 라합의 인식이라고 함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지역의 민심이라고 함과 의식들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서 읽도록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자신의 존재적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약속을 받게 되어지는 것으로써의 두 정탐꾼과 라합이 대화를 나눈 내용이고 이윽고 붉은 줄을 통하여서 성에서 내려주고 또한 앞으로 어떻게 행하여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책략도 말하여서 돌아가게 함과 그 두 사람이 돌아와서 여호수아에게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자신들에게 붙이셨음에 대한 것을 확신하며 정탐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라합의 믿음이 상대적으로 정당화 되어질 수 있는가 그리고 오늘날의 국가적 반역죄라고 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정당화 되어질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한 가지 더 하나님이 주신 복음의 사역이라고 함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 그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일반적으로 성경을 대하면서 상식적인 측면에서 아직 더 분명하게 성경의 오류나 비난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라합의 거짓말에 대한 것과 그의 나라를 배신한 모습이라고 하는 것의 윤리적 판단이라고 함을 무시한 가운데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배척되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의 논란이 되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거짓말의 실체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일반적으로 불특정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없다는 것과 그들의 기득권에 관련되어진 사실들을 언급할 때에 상당히 거짓말의 정체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불특정 사회의 인식이 연장되어 고려되어질 수 있는 역사적 차원에서는 그러한 거짓말의 정체성이 이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보편이라고 함이 절대의 보편과 상관성을 가질 때에 대등적인 비교라고 함이 허락되어진 가운데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정체성이 세상에서의 보편적인 인식의 정체성보다도 더 보편적인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고 할 때에 기생 라합은 그 보편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고 기독교 신앙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라고 함에서 그 실존을 말할 때에는 라합이 진정으로 옳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도 매국노와 특정 사회의 전복을 의도하거나 이루는 자들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구약에서는 어떤 지역적인 땅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또한 하나님나라의 기업이라고 하는 것과 동일시되어지는 가운데서 성례전적으로 묘사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계시관의 자존적 정당함에서 그 표현과 그 표현의 실제의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절대적으로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경의 기록이라고 함의 합목적적인 개념이나 또는 하나님나라의 기업이라고 하는 것을 이 땅에 동일시하여서 말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어떤 국가나 기업이라고 하는 것이 대등하게 비교되어지고 그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매국적인 행동이나 또는 어떤 특정한 사회의 기득권자체를 전체적으로 전복하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반적인 측면에서 자신에게 합법적으로 주어지는 기득권에 대한 표현과 주장이라고 하는 것은 계시의 존재와의 동일한 기록적인 상관이 없는 가운데서도 일반적인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것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주장할 수 있는 권세는 일반적인 측면에서 일반 사람들과 대등한 권리를 사회적으로 받게 되는 것을 전제하면서도 말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그 믿음의 두 정탐꾼들의 상황파악과 정보를 통하여서 준비하는 것을 중심으로 우리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의 모습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기 하는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따르는 가운데서는 원수와도 화목하게 하심에 있어서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말씀을 맺습니다.

‘진실한 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신 6:7~8참고) 주의 말씀하심을 따르고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의 존재적 정당함을 찾는 것과 그러한 섭리를 따를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라합이 말하는 진실한 표를 내라고 한 것에 답변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주의 복음은 핑계치 못하는 복음입니다. 진정으로 상대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면 상대적으로도 절대 정당한 주의 말씀이 있으며 그 말씀이 있음을 기억할 때에는 그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음에 대하여서 그 말씀을 받을 수밖에 없음에 주를 두려워하며 합당하게 그 복음의 동역자로 세우시는 경우도 있으며 그가 또한 그 말씀에서 주의 백성된 자로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은 자로 서게 되는 것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분별력이 있게 하나님의 주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자존의 하나님께서 원수가운데서도 화목케 하심에 있어서 고레스와 같은 자들을 세우시고 주의 택한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께서 함께하심에 대한 말씀을 증거하시는 가운데 이처럼 주님의 영광의 나라를 온전히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