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21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수4:1-24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의 책들은 많이 나오고 있고 역사와 해석에 대한 문제도 상당히 거론되어지는 것이 그 나라의 문화와 삶과 정체성과 관련되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역사라는 개념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다른 여러 영역의 인식보다도 중요한 전체 정체성에 관한 당위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모 나라에서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왜곡시키고자 눈에 보이는 서툰 행위까지도 일삼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 왜곡에 있어서 독립 운동가들의 행적을 알리는 ‘선구자’라는 노랫말을 기록한 돌의 표면을 깎아내고 쓸 것이 없어 용(龍)이라는 글자를 써놓고 있는 것을 모 방송국의 보도로 알게 된 것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역사적인 증거로써의 이스라엘이 요단의 돌들을 자신들의 유숙하게 되는 곳에 남겨두고 증거를 삼았음에 대한 말씀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0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수아가 인도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를 정탐한 후에 이제 요단강을 건너게 되며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그 언약궤를 매고 간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에 머물러 있는 가운데서 물이 멈추게 된 때에 그곳에서 돌 열둘을 그 지파마다 취하여서 그들의 유숙할 곳에 두게 하시고 그것들이 후일에 표징이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약속한 바 있는 르우벤과 갓자손과 므낫세 반지파들이 먼저 건넴과 그날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두려워하게 하신 것과 같이 여호수아를 두려워하게 하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심에 있어서 요단에서 여리고쪽으로 그 제사장들이 올라오라고 하심에 있어서 그것을 순종한 것과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올라오니 그 요단강이 다시 합쳐서 예전처럼 언덕에 넘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역사적인 시간을 언급하시면서 그들이 유숙하게 되어지는 ‘길갈’이라는 곳에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그곳에 세움에 대한 것과 그것이 후일 후손들이 물을 때에 요단을 건넌 증표임을 말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여호수아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열두 돌을 취하도록 하심과 그 돌들의 증거라고 함을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돌들의 증거는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이루어진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의 권위적 정당함과 그 시간 그 섭리의 시대를 분별할 수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취할 수 있는 섭리로써 그 상관성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 열두 돌을 세운 길갈이라고 하는 곳에서는 교회의 기본적인 고백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가르침과 회개와 성례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데, 앞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이 길갈을 중심으로 긴박하게 돌아가는 역사들 그곳에서 정당함을 찾으려고 하는 자들의 모습과 그 모습들의 신실성의 시비라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손들이 기억하게 하는 증표를 준비하였던 것과 같이 주의 예식과 함께 주의 섭리에 대한 기술(記述)로써 믿음의 후손들을 가르칠 수 있기도 하고 오용하는 악한 자들의 모습도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전반적인 역사의 그러한 예를 모두 기술하고자 하는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유숙하게 하시는 그곳에서 그러한 우리의 인생에서 산돌이신 예수그리스도 주님의 뜻하심을 증거하는 것들이 바로 오늘날 요단강을 건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약속의 땅을 취할 수 있게 되어지는 증표과 같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며 나타냄이 옳은 것입니다.
거룩하신 예수그리스도 산돌이신 주님에 대한 증거들과 그 가운데서 주의 뜻하심을 오실 때가지 우리 믿음의 후손들에게 증거함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요단강이 흐름은 자연의 이치로써 하나님의 정하신 일반적인 당위성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주의 뜻하심 주의 택한 백성들을 위한 주의 계시적인 정당함은 그러한 것을 오히려 주장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주의 구원하심의 증거를 실제적으로 증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어지는 12개의 돌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이집트에서 피라밋 공사에 동원되어진 그 돌들에 대한 이해되어지지 않음이 더 화려하게 세상 속에서 알려지고 있는 것이며 그 맹목적 신비에 무엇인가 실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길갈에서 세워진 12개의 돌은 그 정체성을 하나님의 특별계시적인 정당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실제적으로 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 성례전적인 실제적 증거가 메시아 예수님이 오심에 있어서 완성되었고 이제 더 이상 실제적인 증거로써의 그것은 아닌 평범한 것이지만 우리가 그 증거하고자 한 그 증거의 실제는 주 안에서 이제 우리가 믿게 되어진 주의 가르침의 사실들로써 준비하며 우리 인생의 유숙하는 지금에 준비하며 주의 구원하심에 대한 증거로 주의 몸된 교회를 온전케 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힘써 나르며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뜻하심 안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해석이 상대적이면서도 주의 절대의 신실하심 안에서 정당한 주의 가르침의 실제로 받으며 주의 구원하심의 사실을 증거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은혜를 교회가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에게 있어서 주의 구원하심을 온전히 증거하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수4:1-24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의 책들은 많이 나오고 있고 역사와 해석에 대한 문제도 상당히 거론되어지는 것이 그 나라의 문화와 삶과 정체성과 관련되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역사라는 개념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다른 여러 영역의 인식보다도 중요한 전체 정체성에 관한 당위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모 나라에서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왜곡시키고자 눈에 보이는 서툰 행위까지도 일삼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 왜곡에 있어서 독립 운동가들의 행적을 알리는 ‘선구자’라는 노랫말을 기록한 돌의 표면을 깎아내고 쓸 것이 없어 용(龍)이라는 글자를 써놓고 있는 것을 모 방송국의 보도로 알게 된 것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역사적인 증거로써의 이스라엘이 요단의 돌들을 자신들의 유숙하게 되는 곳에 남겨두고 증거를 삼았음에 대한 말씀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0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수아가 인도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를 정탐한 후에 이제 요단강을 건너게 되며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그 언약궤를 매고 간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에 머물러 있는 가운데서 물이 멈추게 된 때에 그곳에서 돌 열둘을 그 지파마다 취하여서 그들의 유숙할 곳에 두게 하시고 그것들이 후일에 표징이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약속한 바 있는 르우벤과 갓자손과 므낫세 반지파들이 먼저 건넴과 그날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두려워하게 하신 것과 같이 여호수아를 두려워하게 하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심에 있어서 요단에서 여리고쪽으로 그 제사장들이 올라오라고 하심에 있어서 그것을 순종한 것과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올라오니 그 요단강이 다시 합쳐서 예전처럼 언덕에 넘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역사적인 시간을 언급하시면서 그들이 유숙하게 되어지는 ‘길갈’이라는 곳에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그곳에 세움에 대한 것과 그것이 후일 후손들이 물을 때에 요단을 건넌 증표임을 말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여호수아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열두 돌을 취하도록 하심과 그 돌들의 증거라고 함을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돌들의 증거는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이루어진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의 권위적 정당함과 그 시간 그 섭리의 시대를 분별할 수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취할 수 있는 섭리로써 그 상관성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 열두 돌을 세운 길갈이라고 하는 곳에서는 교회의 기본적인 고백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가르침과 회개와 성례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데, 앞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이 길갈을 중심으로 긴박하게 돌아가는 역사들 그곳에서 정당함을 찾으려고 하는 자들의 모습과 그 모습들의 신실성의 시비라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손들이 기억하게 하는 증표를 준비하였던 것과 같이 주의 예식과 함께 주의 섭리에 대한 기술(記述)로써 믿음의 후손들을 가르칠 수 있기도 하고 오용하는 악한 자들의 모습도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전반적인 역사의 그러한 예를 모두 기술하고자 하는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유숙하게 하시는 그곳에서 그러한 우리의 인생에서 산돌이신 예수그리스도 주님의 뜻하심을 증거하는 것들이 바로 오늘날 요단강을 건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약속의 땅을 취할 수 있게 되어지는 증표과 같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며 나타냄이 옳은 것입니다.
거룩하신 예수그리스도 산돌이신 주님에 대한 증거들과 그 가운데서 주의 뜻하심을 오실 때가지 우리 믿음의 후손들에게 증거함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요단강이 흐름은 자연의 이치로써 하나님의 정하신 일반적인 당위성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주의 뜻하심 주의 택한 백성들을 위한 주의 계시적인 정당함은 그러한 것을 오히려 주장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주의 구원하심의 증거를 실제적으로 증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어지는 12개의 돌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이집트에서 피라밋 공사에 동원되어진 그 돌들에 대한 이해되어지지 않음이 더 화려하게 세상 속에서 알려지고 있는 것이며 그 맹목적 신비에 무엇인가 실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길갈에서 세워진 12개의 돌은 그 정체성을 하나님의 특별계시적인 정당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실제적으로 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 성례전적인 실제적 증거가 메시아 예수님이 오심에 있어서 완성되었고 이제 더 이상 실제적인 증거로써의 그것은 아닌 평범한 것이지만 우리가 그 증거하고자 한 그 증거의 실제는 주 안에서 이제 우리가 믿게 되어진 주의 가르침의 사실들로써 준비하며 우리 인생의 유숙하는 지금에 준비하며 주의 구원하심에 대한 증거로 주의 몸된 교회를 온전케 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힘써 나르며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뜻하심 안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해석이 상대적이면서도 주의 절대의 신실하심 안에서 정당한 주의 가르침의 실제로 받으며 주의 구원하심의 사실을 증거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은혜를 교회가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에게 있어서 주의 구원하심을 온전히 증거하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