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1월 29, 2004

베드로의 슬픔과 통곡

2004년 11월 28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22:54-71
베드로의 슬픔과 통곡

사람들은 누구나가 모두 행복을 추구하고 있고 그것의 한 표현이 되어질 수 있는 기쁨이라고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사실이면서도 인생에 있어서 그러한 것만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한다면 아직 인생에 대한 숙고적인 의미를 마음에 두지 못한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人生)에 있어서는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는 것입니다. 슬픔을 향한 기쁨이 있는가 하면 기쁨을 위한 슬픔이라는 것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성에 대하여서는 그 행복에 대한 실제적인 기준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임의적으로 설정하면서도 그것이 진정한 사실로 납득되어지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아주 기쁨을 추구하지만 그러한 것이 종국에 가서는 슬픔으로 귀착되어지는가 하면, 고통과 고민으로 기쁨의 실제를 부여할 수 없는 슬픔에서도 진정한 기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은 심리적으로 새디즘 즉 사디즘(sadism)이나 매저키즘, 즉 마조히즘(masochism)이라는 것에서 비롯되어지고 해석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이러한 기쁨과 슬픔이라고 하는 것의 방향성을 생각하게 하고 그 전환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의 슬픔과 통곡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54절에서 6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3절에서 7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54절에서 6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그곳에서 포도주 떡으로 언약을 세우신 후에 제자들과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는데 그곳에서 가룟유다의 주님을 파는 것에 이어서, 예수님을 잡아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감에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감과 그곳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되어지는 것을 아주 현장감이 있는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이 베드로를 돌아보심에 베드로의 심히 통곡함에 대한 기록이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3절에서 7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밖에서 지키던 자들이 예수님을 희롱하고 때리고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친 사람이 누구냐는 식으로 대하고 있음과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모이어서 예수님을 공의회에 넘겨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과 예수님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고 그들이 그 말씀을 받지 못하고 자신들이 정당함을 임의적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베드로의 통곡하게 되어짐과 그에 앞선 슬픔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문맥상으로 살펴보며 그 전환이라고 함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그 실재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현장감 있게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베드로의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수치를 당하는 가운데서 주님을 부인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께서 돌아보심에 있어서 베드로의 인식의 전환과 기쁨을 위한 기쁨의 실제를 향한 고통과 슬픔의 전환으로써의 통곡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과 성만찬을 하실 때에 주님의 뜻하심을 제자들이 세상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고 또한 그러한 가운데서 그들은 예수님의 잡히실 것에 대한 것과 고난 받으실 것에 대한 언급하심에서 그들은 슬픔에 잠겼던 것입니다. 더욱 현실적으로 예수님의 잡혀가심이 눈앞에서 전개되어지고 있는 가운데서는 진정한 자신들의 존재의 부정이라는 사실의 실제를 강요받게 되어지는 자리에 서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더 잘 살피고자 하는 베드로의 충동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구별되어졌고 잡혀가시는 주님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외적으로 자신의 존재라고 함을 자의적으로 변명해야하는 자리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될 때에 주님은 베드로를 돌아보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돌아보심은 그냥 힐문하시는, 연민하시는 또는 환멸감에서의 배척하심을 나타내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기억 속에 실제의 판단의 전환을 위한 기억나게 하심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즉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게 된 것은 이미 예수님이 성만찬 석상에서 이미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되었다고 함에 있어서는 이러한 현실적 실제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주권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과 그것은 베드로 자신을 비롯한 제자들 자신들의 존재 부정에 따른 슬픔의 생각과 달리 주 안에서 여전히 존재의 정당함과 실존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주님이 잡히실 때에 주님의 뜻하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신 사실도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성전에 있을 때에 잡지도 못하던 자들이 지금 주님을 잡으러 나온 것은 주님 자신이 허락하신 그 때라고 함과 그 때에 있게 되어지는 것을 규정하고 주장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심도 기억함이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눅 22:53)

그처럼 그러한 자신에 대한 예언에서 자신과 함께 있었을 때에 주께서 하신 말씀에서 또한 그러한 인식의 전환이 합당하다는 것을 느끼며 인식의 전환으로써의 통곡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을 위한 그것을 향한 인내의 자리에 서기 위한 인격적인 전환으로써 회개로써 그 통곡의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후에 있게 되어지는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인식이 있으면서도 그들의 연약함은 상대적으로 완성되어진 것으로 나타나는 것의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어지는 것이며 상황은 그리 쉽게 인정하는 사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것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주님의 수욕과 수치라고 함이 계속되어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이라고 함은 그들이 상대적인 측면에서 지지되어질 수 있는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로서의 정당함을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진정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주님은 자존의 하나님으로써 자신의 기뻐하는 뜻으로 자신을 상대적으로 나타내시지 상대적인 것의 요구와 범주에 한정되어진 가운데서 증거하시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보이셨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았으며 믿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도 상대적인 것에서 확실한 여지라고 함이 없다는 것과 다만 동의적인 차원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들은 이미 그 여지를 마음에 두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는 기쁨도 있지만 슬픔이라고 함도 고난이라고 함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모든 인생이 죽음이라고 함에 있어서 죽음의 슬픔이라고 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종된 자리에 서게 되어지며 그로인한 슬픔이 항상 인생의 기로에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시는 분복으로 사람들이 삶에서 누리는 기쁨으로 그것의 시름을 잠시 실제적으로 잊게 하시는 은혜가 있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종노릇하는 자리에서 주님께서 구원하시려고 구별하시는 자로 그리스도로 구원자 그리스도로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인해서 그러한 정교한 메시아 이론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냐는 것과 그러한 것 중에 하나가 기독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 말은 설득의 당위성을 말할 수도 있지만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적인 자체적 정당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자신의 존재를 상대적인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게 되어지는 자리에 서지 않는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심을 인하여서 그 자신의 의로움을 하나님의 우편에서 나타내실 때에 그 자존의 절대 정당함은 상대적인 납득 이유로 주님을 배척하는 자리에 서는 자들의 기쁨은 결국 슬픔으로 종결되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의 사실을 주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따른 것으로써 신실함을 믿을 때에 그 사실은 현실적 강요로 슬픔이라고 함이 기숙되어진다고 하여도 구원의 기쁨의 실제로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증거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의 자존의 하나님이심의 증거와 그를 믿는 자들을 하나님 자녀로 삼으심에 있어서 그 절대 신실하심을 의지하여서 존재 부정을 하는 헛된 현실적 실제의 강요의식을 벗어나서 주의 구원하심의 기쁨과 사실로 띠를 띠우시는 또한 그것을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