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1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18-25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젊은이들이 자신의 창작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앞날에 대한 것들도 준비하는 곳이 고등교육의 중심적인 지도방침 그것이고, 우리나라의 경우에서는 대학교육이 그러한 것을 말한다고도 하겠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결정하는 것을 배우고 그러한 가운데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적응이라는 개념 즉 보다 한정되어진 가운데서의 사회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워나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은 비단 고등교육기관에 국한되어지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사회에 바로 진출하게 되어지는 젊은이들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한정되어지는 사회에 적응하여 나가는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를 위한 스스로의 삶을 경영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스스로 행한다는 그러한 개념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며 또한 마땅히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적 증거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한 분별을 위한 말씀으로써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4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남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 이유로써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음과 저희에게 보이셨음을 인하여서 핑계치 못할 것인데 미련하여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꾸었음에 대한 책망의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4절에서 25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우준함에 따른 진노하심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에 따라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셔서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조물주보다 더 피조물을 경배하는 것을 인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며 주는 영원히 찬송할 이심이 진실로 그렇다고 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함에 대한 성격과 그것에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실제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복음서라고 하는 이사야의 말씀, 그중에서도 이사야 48장과 그리고 요한복음의 서론이라고 일명 불리고 있는, 요한복음 1장의 내용과 그것을 이해한 사도 바울의 오늘 본문은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죄라고 함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것으로 그것과 상관없이 나타나게 되어지는 성도들의 마땅히 취할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읽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 28절에서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시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기 때문에 핑계치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29절에서는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서 핑계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며 그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범죄한 아담의 인식이라고 함의 연속성에 있는 모습입니다. 즉 아담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그러한 불순종의 죄를 짓고 주 앞에 섰을 때에 그들은 변명하였던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 때문에 하와는 뱀 때문에 라는 개념과 그를 지은 하나님께 대한 합리적 변명의 여지를 두려고 하는 그러한 합리적 변명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합리성에서 자신의 불순종이라는 죄악 가운데서 합리적 정당함이라는 상대적 정당함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합리성의 실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뱀이 또한 범죄한 하와가 아무리 아담 자신을 합리성에 따른 이유와 정당함을 말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의 이유라고 하는 합리적 진술과 명령은 절대의 상대적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절대의 정당함이 있는 것의 실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자존의 절대자로서 인정하지 않았기에 상대적 합리성의 정당함으로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에 따른 언급을 비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20절과 21절에서도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함을 인하여서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음에 대한 지적도 이와 동일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마음을 마음에 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에 나타나고 있는 ‘스스로 지혜 있다’는 자의적 임의적 모습을 취하지만 본문에서는 그것의 정당함이 없음과 그것으로 인한 실존적 부끄러움을 당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정당함이 없는 가운데서 부인되어지는 기각되어지는 존재와 합리성이 되어지는 모습의 연속성을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행한다는 것의 정당함을 임의적으로 부여하면서 자존의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재가를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8장에 나타나고 있는 것도 히스기야의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는 그러한 자신의 존재적 정당함이라고 함을 증거하는 자의 모습이 온전히 나타나지 못하였을 때에 그러한 자들의 모습의 예표적 실제의 동일한 후손들로써 그들 이스라엘이 혼돈의 바벨론으로 잡혀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언급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근원에서 나왔으며 거룩한 성 백성이라 칭하며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는 너희는 이를 들을지어다”(사 48:1)
요한복음 1장을 언급함에 있어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오심에 있어서 자기 백성에게 오시나 영접하지 않음이라고 함이 그것이며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증거를 받기 싫어하는 자들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은 상대적으로 죽음 이편에 존재의 부정이라고 하는 가운데 묶여있게 되어지는 사망이라고 함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분이라고 하심의 증거가 바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 즉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을 받기 싫어했음에 대한 것이 요한복음 서론으로써의 1장의 내용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 자신의 삶에 스스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의 증거로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스스로 행한다는 개념을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과 그것에서 파생되어지는 일반적인 정당함 안에서 정당함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말하나 그 지혜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미련한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미련함의 실제는 그러한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른 절대 신실함을 상대적으로 판단하며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현상적 실제에 진정한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자신을 기만함이 그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합리성과 그 타당성을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의 실존의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제로 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한 시각의 고정을 말하는 것으로 편협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 보편적 재가는 그러한 상대적 편협의 판단의 실존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절대의 도장이 상대적인 도장이라고 함의 판단에 따른 권위와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도장이라고 함은 성령의 재가와 인간의 임의적 재가가 동일하게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 성도의 기본이 되어지는데, 이는 주의 가르친 기도(마 6:9)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이 성도의 중심의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이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함과 그것의 신실하심은 절대의 하나님의 절대 자기 신실하심에 있음을 삶의 기본과 양식에서 나타내는 것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에 따른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자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롬1:18-25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젊은이들이 자신의 창작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앞날에 대한 것들도 준비하는 곳이 고등교육의 중심적인 지도방침 그것이고, 우리나라의 경우에서는 대학교육이 그러한 것을 말한다고도 하겠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결정하는 것을 배우고 그러한 가운데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적응이라는 개념 즉 보다 한정되어진 가운데서의 사회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워나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은 비단 고등교육기관에 국한되어지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사회에 바로 진출하게 되어지는 젊은이들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한정되어지는 사회에 적응하여 나가는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를 위한 스스로의 삶을 경영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스스로 행한다는 그러한 개념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며 또한 마땅히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적 증거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한 분별을 위한 말씀으로써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4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남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 이유로써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음과 저희에게 보이셨음을 인하여서 핑계치 못할 것인데 미련하여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꾸었음에 대한 책망의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4절에서 25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우준함에 따른 진노하심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에 따라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셔서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조물주보다 더 피조물을 경배하는 것을 인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며 주는 영원히 찬송할 이심이 진실로 그렇다고 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함에 대한 성격과 그것에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실제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복음서라고 하는 이사야의 말씀, 그중에서도 이사야 48장과 그리고 요한복음의 서론이라고 일명 불리고 있는, 요한복음 1장의 내용과 그것을 이해한 사도 바울의 오늘 본문은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죄라고 함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것으로 그것과 상관없이 나타나게 되어지는 성도들의 마땅히 취할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읽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 28절에서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시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기 때문에 핑계치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29절에서는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서 핑계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며 그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범죄한 아담의 인식이라고 함의 연속성에 있는 모습입니다. 즉 아담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그러한 불순종의 죄를 짓고 주 앞에 섰을 때에 그들은 변명하였던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 때문에 하와는 뱀 때문에 라는 개념과 그를 지은 하나님께 대한 합리적 변명의 여지를 두려고 하는 그러한 합리적 변명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합리성에서 자신의 불순종이라는 죄악 가운데서 합리적 정당함이라는 상대적 정당함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합리성의 실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뱀이 또한 범죄한 하와가 아무리 아담 자신을 합리성에 따른 이유와 정당함을 말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의 이유라고 하는 합리적 진술과 명령은 절대의 상대적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절대의 정당함이 있는 것의 실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자존의 절대자로서 인정하지 않았기에 상대적 합리성의 정당함으로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에 따른 언급을 비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20절과 21절에서도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함을 인하여서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음에 대한 지적도 이와 동일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마음을 마음에 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에 나타나고 있는 ‘스스로 지혜 있다’는 자의적 임의적 모습을 취하지만 본문에서는 그것의 정당함이 없음과 그것으로 인한 실존적 부끄러움을 당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정당함이 없는 가운데서 부인되어지는 기각되어지는 존재와 합리성이 되어지는 모습의 연속성을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행한다는 것의 정당함을 임의적으로 부여하면서 자존의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재가를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8장에 나타나고 있는 것도 히스기야의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는 그러한 자신의 존재적 정당함이라고 함을 증거하는 자의 모습이 온전히 나타나지 못하였을 때에 그러한 자들의 모습의 예표적 실제의 동일한 후손들로써 그들 이스라엘이 혼돈의 바벨론으로 잡혀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언급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근원에서 나왔으며 거룩한 성 백성이라 칭하며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는 너희는 이를 들을지어다”(사 48:1)
요한복음 1장을 언급함에 있어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오심에 있어서 자기 백성에게 오시나 영접하지 않음이라고 함이 그것이며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증거를 받기 싫어하는 자들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은 상대적으로 죽음 이편에 존재의 부정이라고 하는 가운데 묶여있게 되어지는 사망이라고 함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분이라고 하심의 증거가 바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 즉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을 받기 싫어했음에 대한 것이 요한복음 서론으로써의 1장의 내용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 자신의 삶에 스스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의 증거로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스스로 행한다는 개념을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과 그것에서 파생되어지는 일반적인 정당함 안에서 정당함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말하나 그 지혜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미련한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미련함의 실제는 그러한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른 절대 신실함을 상대적으로 판단하며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현상적 실제에 진정한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자신을 기만함이 그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합리성과 그 타당성을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의 실존의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제로 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한 시각의 고정을 말하는 것으로 편협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 보편적 재가는 그러한 상대적 편협의 판단의 실존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절대의 도장이 상대적인 도장이라고 함의 판단에 따른 권위와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도장이라고 함은 성령의 재가와 인간의 임의적 재가가 동일하게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 성도의 기본이 되어지는데, 이는 주의 가르친 기도(마 6:9)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이 성도의 중심의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이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함과 그것의 신실하심은 절대의 하나님의 절대 자기 신실하심에 있음을 삶의 기본과 양식에서 나타내는 것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에 따른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자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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