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2월 13, 2004

가슴을 치는 사람들

2004년 12월 12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23:26-49
가슴을 치는 사람들

사람들이 가슴을 칠 때에는 여러 가지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슬픈 일을 당하였을 때에 자신의 무능함이라고 하는 것을 한탄하는 모습과 그러한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당위성에서 가슴을 처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언급한다면, 대화가 되지 않을 때에도 그 답답함을 인해서 가슴을 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이라고 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의 소위 이성주의자들은 대화를 위한 시도를 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그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그러한 언급들과 그러한 것에서 의사소통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사소통이라고 함, 즉 전달의 의미의 중요성은 말하면서도 그 전달의 내용적 진실성이라고 함은 잘 모른다는 측면에서 그 전달하는 것의 사실도 기만적일 수밖에 없음에 대하여서 또 한번 가슴을 칠 노릇이라고 하겠습니다.

슬플 때, 답답할 때, 각자의 가슴을 치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고난 가운데서도 가슴을 치는 여인들에게 분별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을 주목하면서 그 가슴을 친다는 것의 의미와 그 실제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6절에서 3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9절에서 43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44절에서 49절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6절에서 3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구레네 시몬과 같이 주님의 십자가를 잠시 대신 지게 되어지는 가운데, 주님의 고난의 길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위하여 끌려가시는 길에, 따라가는 자가 있었고 많은 여인들이 따라가는 가운데 가슴을 치며 슬퍼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여인들에게 주님을 연민하는 가운데서 슬퍼 울지 말고 그들 자신과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는 말씀을 하시며 비유의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난의 말들과 희롱의 말들이 있는 가운데서 십자가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9절에서 4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좌우편에 있는 자들의 믿음의 인식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고 주님은 우편에 있는 자에게 낙원에 같이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여 주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44절에서 4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제 육시쯤 되어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며 예수님이 아버지 손에 영혼을 맡기심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운명하심이 기록되어 있고 이를 구경하는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예수의 아는 자들도 다 멀리서서 이 일을 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일반적으로 주의 운명하심이라는 것 자체에 큰 증거와 함께 간과하기 쉬운데, 가슴을 친다는 개념들이 그 인식의 차이에서 오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것에 주님께서 그 믿음으로써의 인식의 분명한 구분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점에서 그 구별되어지고 그 가운데서 구분되어진 사실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27절에 나타나고 있는 여인들의 가슴을 치며 따라오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슬퍼하는 연민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자기 증거라고 함의 사실을 곡해(曲解)하는 것으로, 잘못되게 만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주의 뜻하심을 나타내시는 자기 계시의 주권적 절대 정당함이라고 함에서 자기 정당함 속에서 이루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그러한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자신의 실패를 나타내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은 분명 잘못이며 그들의 인식과 그 열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받으실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게 되어질 자들이 있을 것인데 그것을 여인들의 먹이지 못한 젖과 수태하지 못한 배가 복이 있다고 하심의 자리에 서지 못하는 그들의 화가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잘못된 교회의 가르침으로 화를 자초하게 될 것이며 그 기본은 예수님의 죽으심이라고 함을 인위적으로 연민(憐憫)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 받을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 사실의 실제를 알지 못하고 임의적 연민으로 일관함에 대한 책망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가 없음이라고 함이 열매가 맺혀야 할 나무 푸른 나무가 판단을 받는데 마른 나무는 더 책망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그러한 것의 아주 분명한 예로서 십자가에 달린 자들의 인식의 차이에서 주님의 행하심의 옳음을 말하는 자에게 자존의 절대자로서 자기 정당함을 부여하여서 그 우편 강도의 복됨에 대한 사실과 증거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가라고 하는 특별재가와 또한 주님의 죽으심이라고 함을 보는 자들이 주님의 증거와 그 죄인의 증거의 합당함을 일반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러한 잘못됨을 놓고 가슴을 치는 자들이 있었는데 주의 제자들은 이를 보았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오는 여인들의 가슴을 침과 구경하러 모인 자들의 가슴을 침은 슬픔에 따른 연민이었던 것과 달리 다른 것을 나타난다는 것을 또한 제자들이 보았던 것입니다. 즉 핑계할 수 없는 것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서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뵈었던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한 해석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마음에 두었던 자의 증거인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참으로 오늘날도 예수님에 죽으심에 대하여서 주의 뜻하심을 마음에 두지 않고, 주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것이 사실이라는 중심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임의적 개연적인 사실논쟁으로 많은 고통의 가시 속에서 복된 자리에 서지 못하였던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마음을 두고 있지 그 전달되어지는 것의 내용적 사실성에 대하여서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것은 그 사실 기만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답답하여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놓고 주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인 진정한 사실인지를 분명하게 살펴야 할 것이며 또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그럴듯한 말로 만든 개연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신앙은 실제상황이라고 함을 마음에 두어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전달과 새로움을 위한 노력이 중요하지만 전달의 기교만 생각하고 있고 그것의 새로움만을 추구하고 있는 가운데서는 주의 책망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놓고 고민하며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복음이 진정한 사실임을 말할 수 있는 성도들로서 주 앞에서 은혜를 입는 은혜 위에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