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12월 28, 2004

아골 골짜기의 기원을 넘어서

2004년 12월 26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수7:16-26
아골 골짜기의 기원을 넘어서

사람들의 판단의 기준들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차이를 가져오는 견해라고 하는 것의 실제적으로 옳은 것인가 하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좋은 견해를 취하는 것이 진정한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권위적 개념의 재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전제하는 것으로써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신제품으로 좋은 것이라는 측면의 합리성보다도 전제되어진 명성이 있는 브랜드의 제품으로써 합리성의 동일한 판단이 있을 때에는 단연 후자의 경우가 선택되어질 수 있는 것이 기본적인 상식이라고 함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야말로 견해라는 개념의 정체성 시비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죄에 대한 인식이라고 함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라고 함을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그처럼 슬픔의 골짜기를 걸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6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에 따라서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취한 자를 가리기 위한 제비뽑기를 하게 되었고 아간이 뽑혔으며 그의 진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수아의 사자가 아간의 진술에 따라서 그 물증을 확보하고 아간을 잡고 그 은과 외투와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으며 그곳 이름을 아골 골짜기라고 부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아간이 죄를 범하게 된 것에 대한 그 진술에서 그 아골 골짜기의 기원을 주목하며 그러한 슬픔의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하심의 은혜가 무엇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아간의 진술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수 7:21)

한마디로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그러한 말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상식적인 개념이 되어지는 것으로써 그 보다 더 근본적인 그것을 지배하고 파생케하는 주의 말씀하심에서는 ‘안목의 정욕’(요일 2:16)입니다.

사람들의 인식이라고 함이 하나님의 지으신 영광을 잘 나타내게 되어지는 자들로써 비록 타락하여서, 예수님의 구속하심을 의지하지 않고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의 인식모습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써의 아담과 하와의 죄악된 인식이 바로 안목의 정욕이라고 함의 그 개연적 의식으로 사람들의 보편적인 상식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러한 것으로써의 하나가 바로 ‘견물생심’(見物生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목의 정욕이라고 함을 견물생심으로 말할 수 있어도 견물생심이라는 개념으로 안목의 정욕이라고 함의 본질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이라고 하는 것은 에덴동산의 하와에게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와도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는 가운데서 자기 합리화가 이루어졌고 사단은 그러한 합리성의 상대적 타당성으로 넘어지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죄악의 모습이 오늘 슬픔의 골짜기의 표적이 되어야 했던 아간의 인식에도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견물생심이라고 해서 상대적인 방법에서는 안 본다는 그러한 것이 최선이 되어질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그러한 것으로는 안목의 정욕이라고 함의 판단하는 자리에서 자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다는 그 자체의 실제적인 판단을 분명하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함에 있어서 거의 본다는 개념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서 보지 않는다는 개념의 확실성으로는 온전한 신앙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 앞에서도 분명 옳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행함의 온전함이라고 함에서 그 합당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진실로 그 본다는 그 개념의 판단의 실제적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않는 가운데서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와가 아담을 통하여서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자존적 절대 정당함의 재가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믿었다면 피조물로써의 합리성의 재고를 요구하는 뱀의 당위성이 이미 결여되어진 것이라고 함을 알 수 있는 가운데서도 그 악함을 취하였던 것입니다. 즉 그 정당성의 시비를 분명하게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안목의 정욕의 기본적인 속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아간도 그의 내력적인 집안의 사람들을 주목할 때에 상대적인 인식의 열려있는 가정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서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서 자존의 절대적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것을 상대적인 입장에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러한 견해 즉 그 안목의 정욕의 자리에 서게 되었고 그것은 바로 슬픔의 골짜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인식함에 있어서 본다는 개념은 상당히 중요하고 또한 그러한 것의 보편성을 생각할 때에 그냥 조심한다는 개념으로 일관한다면 그 안목의 정욕의 사악함을 인하여서 범죄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연약함을 떠날 수 없고 그로 인한 슬픔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의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분별하여 사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 안에서 말을 할 수 있었지만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본다는 개념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하심에서 그 정당함을 찾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가운데서 진정으로 본다는 개념의 사실을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인식하는 자리에 서는 가운데서는 그 아골 골짜기의 판단을 넘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달려갈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보는 사실들에 대한 견해를 분별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고 행하시는 가운데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경건의 아름다운 열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2004년 12월 24일 소망교회 성탄전야금요철야예배설교
사7:10-25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일반적으로 요리의 재료로 그리고 요리와 제과의 재료로 쓰이는 식품으로써 그 중에서 버터와 치즈를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식품은 비슷하나 다른 점도 있습니다. 버터(butter)는 ‘우유의 지방을 분리하여 응고시킨 식품’이고 치즈(cheese)는 ‘우유 속에 있는 카세인을 뽑아 응고 발효 시킨 식품’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전적 의미의 차이를 가지면서도 우유라는 공통점과 그 가운데서 어떤 성분을 분리시켜 응고시킨 점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버터의 재조라고 함에 있어서 지금의 생산적 입장의 산출방법과는 다르게 재래식적인 방법으로는 아마도 우유라고 하는 젖이라고 함을 저어서 생산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젖으로부터 버터를 만들어 내는 것을 생각하며 본문에서는 아기 예수님의 나심을 예언하시는 가운데서 버터와 꿀을 먹으리라는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0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8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사야를 통하여서 하나님이 직접 일인칭으로써 유다 왕 아하스에게 하시는 말씀중에 한 부분입니다. 아하스에게 이사야가 하나님 여호와께 징조를 구하라고 하심에 아하스 왕이 거절함과 그러한 가운데서 이사야가 다윗의 집에게 들으라고 하면서 주께서 친히 징조를 주시는데 처녀에게서 한 아이가 날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와 관련되어진 사건들에 대한 비유적인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에 말씀인 18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날’이라는 말들로 시작하고 있고 정체성을 말하게 되어지는 간단한 비유의 언급들이 네 번 이어져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셨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한 아기의 나심에서 그것이 성취되어질 것으로써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이 버터와 꿀을 먹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심의 말씀하심으로 나타남이 오늘 본문의 말씀하심의 성취로 보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버터라고 하는 식품은 젖 즉 우유를 저어서 만드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본문 이후에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부분에서 하나님이 바다를 저어서 물결을 흉용케 하시며 그 가운데서 주어지는 젖의 제품으로써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저어서 그 물결로 흉용케 하는 자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려 하였음이니라”(사 51:15~16)

세상의 요동 속에서도 주의 구원하심의 그 사실들이 온전히 결실되어질 것과 그것을 먹는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을 받을 자들이 다윗의 집 사람들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의 징표는 처녀가 아기가 나음에서 있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진정 아기 나심에서 그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함으로써 아기 나심부터 그 메시아로서의 사역적인 영향력을 나타내셨고 그 때부터 이미 젖으로써 버터를 먹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는 어린양으로써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가운데서 그 세파 속에서 그 메시아 안에서 준비되어지는 버터를 먹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음료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신 것은 그의 나라의 자녀들의 모습의 정체성을 말씀하셨고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게 하심의 은혜를 입게 되어지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와 같이 온갖 짐승이 나오는 그러한 바다를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께서 저으시는 가운데서 그러한 가운데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속한 자들이 그 약속의 땅의 증표로서의 그 기업과 소산을 먹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바로 예언된 아기예수님의 탄생에서 그 실제적 사실이 증거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축하하며 감사하는 자리에 서시며 세파 속에서 그 세상을 저으시는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로서의 기업과 양식을 먹으며 마시며 주님의 영광의 나라를 잘 예비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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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12월 23, 2004

스스로 믿는 사람들

2004년 12월 22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2:17-29
스스로 믿는 사람들

성탄절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사람들에게 슈퍼스타로 떠오르는 존재가 있습니다. 아마도 소위 ‘산타크로스’라는 인물이 되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임의적으로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산타크로스의 날로써 임의적으로 생각하려는 세상의 사람들의 문화라고 하는 개념을 주목하게 됩니다.

복음이 핑계치 못할 것이라고 함을 생각할 때에는 그러한 임의적으로 스스로 그렇게 믿는 사람들의 인식의 저변에는 의식하든 하지 못하든지 그 여부와 관계없이 주님의 나심의 대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스스로 행함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을 제대로 옳게 표현하지 못하여서 엉뚱한 대상을 찾는 세상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이날을 기뻐한다는 그 자체는 귀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비록 죄악 된 문화에서 그 기쁨의 실제가 구겨져 나오는 경우가 있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믿는다는 것과 그 나름대로의 정당함이 있다는 식의 인식이 이전부터 지혜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있어 왔습니다. 이처럼 스스로 어떤 것을 믿는다는 것과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7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5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로마에 있는 유대인이라고 칭하는 자들의 율법적인 측면에서의 선함을 여기고 소경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신이 도적질함에 대한 것과 율법을 자랑하는 자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을 통하여서 이방인 중에 모독을 받는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5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율법의 정점으로 나타날 수 있는 할례라고 하는 것의 유익함을 말하나 율법을 범함에 무할례가 되었음에 대한 것과 이와 같이 잘못된 행함에 대한 인식에 따른 것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며 할례는 마음에 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않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칭찬이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에게서’임을 또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율법의 실제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령함을 의문에 두려고 하는 가운데서 사람들의 동의적 정당함에서의 칭찬의 경건이라는 모습을 가짐에 책망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한 경건의 자리에 서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스스로 믿는다’는 개념이 중요한 것이 되어지며 또한 신령과 의문이라고 함의 개념이 그것에서 분별되어짐이라고 하는 것이 주목하게 되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한글 개역성경 본문 ‘스스로 믿으니’(롬 2:20)은 헬라어 성경에는 없는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본문 문맥적인 차원에서 살펴보면 자처한다는 의미에서 해석적 번역인데, 문맥적인 차원에서 바르게 그리고 잘 해석되어진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율법을 의지하여서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자처하면서 뒤에는 자신들 스스로를 가르치지 않는 거짓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사실을 말할 때에 그것이 진정한 사실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면 다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주장적인 사실의 여부가 항상 여지를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다른 것은 그러한 상대적인 것이라도 참된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며 스스로 절대 자기 정당함을 취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상대적인 것을 통하여서도 절대의 자기 계시를 하실 수 있다고 할 때에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며 또한 그것에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또한 진정한 사실로써의 참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유대인들은 로마교회에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 지역의 유대인들의 인식이라고 함이 메시아고 오심에도 불구하고 율법적인 개념의 경건성으로 주 예수께서 거룩하게 하신 율법의 행함을 판단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릇되게 행하는 가운데서 자기 모순적인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이것을 보는 자들이 하나님의 절대 신실하심과 참됨에 대한 그 증거의 사실을 그들이 행함에서 볼 때에는 말할 수 없다는 그들의 인식과 함께 마치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 아니신 것과 같이 상대적인 판단을 받도록 하는 자리에 서는 악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유대인들이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자처하고 있지만 스스로 믿고 있지만 그 스스로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재가적 정당함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임의적인 것으로 그들이 증거하는 하나님은 자존의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으로 자존의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그 이름의 여호와인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기름 부어 거룩하게 하시는 자로서 오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살아나심으로(롬 4:25) 이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이미 의롭다 칭함을 입은 자들이 그 중심에 주시는 믿음으로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행함을 요구하는 그러한 특성으로써의 율법의 요구에 부응하는 가운데서 상대적 가치평가와 그에 따른 나름대로의 상대적 경건의 타당성을 비교한다는 것은 신령과 의문을 비교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신령하다고 함은 상대적인 개념이 주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인하여서 진정한 사실로써 구별되어짐이라고 하는 것, 복음의 사실의 실제성은 예수그리스도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상대적 존재부정으로써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상대적인 교훈적인 말씀하심이 진정한 실제의 계시로 구별되었음에 그 신령함은 참된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의문이라고 함은 그러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닌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하여서 그것을 증거하는 가운데서의 행함의 빛을 비추던 것을 예수님 안에서의 거룩함을 의지하지 않을 때에 그 정당함이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대적인 것에서는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불확실성의 개연적인 언급들 그것을 알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의문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자처한다는 말이 스스로 자신의 입장과 처신을 그리고 신념을 규정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그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따르지 못할 때에는 자존의 하나님의 영광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말씀을 맺습니다.

스스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세뇌의 모습으로 자기 자신을 어떤 이데올로기나 주의라는 사상들을 주입하여서 어떤 합목적적인 인간을 기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그러한 것이라도 자신들의 선하다는 판단의 당위성을 따라서 그렇게 임의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가운데서는 오히려 그러한 것은 필요에 따라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익한 세뇌가 된다는 식의 임의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은 거의 다 이러한 판단일 수도 있습니다. 표현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한마디로 그러한 임의적인 주관적 스스로의 판단으로써 세뇌라는 개념으로써 여지를 가지는 그러한 의문으로써 신령한 것을 판단한다는 것은 그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려둡니다. 아무리 화려한 합리성이라도 그 합리성의 정체성이 정당함이 없으면 그것은 속이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형태적인 측면 현상적인 측면에서 보면 스스로 더 나아가서 임의적인 주관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형태를 취하시도록 실제적으로 우리의 중심에서 은밀하게 주권적으로 주장하신 분이 자존의 절대자 자신으로써의 예수님이시라면 그것은 임의적 스스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세뇌의 판단을 기각시키는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믿음이며 그것은 은혜로써의 선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구주로 탄생하심을 기뻐하며 축하하며 감사하시는 가운데서 구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성탄선물로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며 이미 그러한 선물을 받으신 성도님들에게는 후히 주시는 신령한 은사들로서의 선물이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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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12월 16, 2004

판단하지 말라

2004년 12월 15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2:1-16
판단하지 말라

우리 인생이 어떤 일을 하면서 판단하여야 할 일이 생기기 마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섣부른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일을 망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예비적 지식이라고 함의 필요성은 또한 갖추어야 한다는 소리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급이라고 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 아니면서도 잘 준비되어진 사전지식(事前知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판단들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일반적인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가운데서 인식의 사실이 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그러한 일반적인 인식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인식적 공감이라고 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른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고 할 때에 그렇지 못한 판단을 하지 말라고 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남을 판단함에 대하여서 같은 일을 함이라고 함과 그와 같은 판단이 그 판단하는 자에게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하심을 피하지 못할 것에 대한 말씀도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며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는 것이 되며 다만 고집과 회개하지 않음이 그날의 진노를 쌓음이라고 또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유대인에게 또한 헬라인에게 이며 이러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심에 대한 이유적인 측면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일반 사람들의 율법에 대한 인식을 본성적 입장에서 말씀하시고 있고 그러한 것에 대한 판단과 심판이 총체적으로 주 예수의 날에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판단 중지’를 요구함에 대한 실제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는 개념에서 성도들의 연약함이나 또는 성도들을 알아주라고 하심의 말씀을 따름도 같이 정죄되어야 하는가 하는 딜레마(dilemma) 아닌 딜레마로써 오해되어지는 경우가 상당히 그리고 불행히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또한 많은 성도들의 분란의 요소가 되었질 수도 있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도덕주의적 해석에서 서로의 판단의 근거 아닌 근거처럼 자리매김 되어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에서 좀더 바른 판단을 위한 주목할 필요가 있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현상학이라는 학문적인 이성에서는 그 기본적 출발을 '판단중지'(epoche)라는 개념에서 찾고 있습니다.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왜곡하지 말고 보자는 것의 전제적 언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판단함에 있어서 선입관의 왜곡됨을 막을 수 있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판단 중지’라는 그 개념 자체는 또한 전제되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상대적 자기모순과 기만성을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도 있게 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상대적으로 가능한가?’하는 것과 ‘그러한 것이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라는 것에 검증되어지지 않은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실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 마찬가지로 개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합리성이 정당한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도 자체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의를 구하여야 하는 가운데서 역시 정당함이 없는 합리성도 갖추지 못한 그러한 학문적 개념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하나의 초등학문의 실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학문적 이야기라고 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일상적인 용어로 본다면 현실파악 현실이라고 함의 실제적인 판단이라고 함이 진짜라고 임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러한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더욱 참된 신으로서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스스로 취하시는 자존의 절대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함을 이미 바울이 본문에서 증거한 바이며 그러한 것이 복음은 핑계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시고 상대적인 것을 가지고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에 있어서는 상대적이라는 판단만으로써 임의적 사실을 말하는 자들의 모습은 그 정체성이 판단 받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에 나타나고 있는 판단이라는 개념은 그 문맥상에서 볼 때에 1장에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이 재가를 받지 못한 가운데서 ‘스스로 지혜 있다’(롬 1:22)고 함에 연속성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남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사실의 판단을 하지 않는 가운데서 상대적인 되어지는 현상적 판단으로써 사실을 임의적으로 말하고 형제들의 믿음의 판단이 상식이라는 것에 그리고 상대적 윤리개념으로 판단되어져야 하는 것과 같이 말하고 그 주관적 동의를 할 수 있는 사람들 자신들의 모임 즉 ‘당을 만드는 자’(롬 2:8)가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자신들의 임의적 당위성을 다른 사람들의 동의적인 차원에서 주관적으로 말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불특정 다수에 의한 자기 고집의 모습을 당연시하는 것으로써 주 앞에서 옳은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그러한 악한 인식과 행동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과 같이 그러한 임의적 성경해석과 율법해석으로 성도들의 믿음의 행보를 판단하는 것을 옳다고 하는 모습들이 있게 되어지는 모습도 책망을 받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9절에 나타나고 있는 악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나타나고 있는 자들은 그러한 것의 유혹을 참는 자들과 선을 행하는 자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의 율법을 먼저 받은 자들과 나중에 받게 되어진 자들 즉 유대인으로써 그리스도인과 헬라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을 말씀하심으로 전체적인 성도들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본성도 하나님이 지으신 자들로써 그들의 중심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적인 영향력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율법의 영광을 나타내는 가운데 판단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주관적 임의적 판단 사실로 형제를 판단하는 세대를 주 예수의 날에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심으로 오늘날 주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믿음은 주관적인 형식으로써 객관적 모습의 열매를 맺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믿음의 주관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할 때에는 그 객관적인 사실성이 부여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주의 교회의 권세 성도의 권세로써 이미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시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왕권의 재가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의 주관성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임의적 주관을 임의적으로 믿음으로 말함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말씀이신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시고 그 말씀하심 안에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 질서를 따라서 객관적인 지도를 받게 하시는 가운데서 양심의 자유와 실제를 따라서 자라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처럼 임의적 상대적 개념에서 함부로 형제를 판단하는 가운데서 또는 동일한 상대적인 개념에서의 금기적인 판단중지라든지 이러한 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써 심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악한 자리에서 나와서, 주의 말씀하심을 따라서 그리고 그 세워진 질서를 통한 가르침을 따라서 신앙양심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실제를 바르게 판단하는 가운데 주의 복음의 사실을 주의 오실 때까지 증거하시는 귀한 성도로서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월요일, 12월 13, 2004

가슴을 치는 사람들

2004년 12월 12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23:26-49
가슴을 치는 사람들

사람들이 가슴을 칠 때에는 여러 가지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슬픈 일을 당하였을 때에 자신의 무능함이라고 하는 것을 한탄하는 모습과 그러한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당위성에서 가슴을 처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언급한다면, 대화가 되지 않을 때에도 그 답답함을 인해서 가슴을 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이라고 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의 소위 이성주의자들은 대화를 위한 시도를 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그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그러한 언급들과 그러한 것에서 의사소통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사소통이라고 함, 즉 전달의 의미의 중요성은 말하면서도 그 전달의 내용적 진실성이라고 함은 잘 모른다는 측면에서 그 전달하는 것의 사실도 기만적일 수밖에 없음에 대하여서 또 한번 가슴을 칠 노릇이라고 하겠습니다.

슬플 때, 답답할 때, 각자의 가슴을 치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고난 가운데서도 가슴을 치는 여인들에게 분별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을 주목하면서 그 가슴을 친다는 것의 의미와 그 실제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6절에서 3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9절에서 43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44절에서 49절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6절에서 3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구레네 시몬과 같이 주님의 십자가를 잠시 대신 지게 되어지는 가운데, 주님의 고난의 길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위하여 끌려가시는 길에, 따라가는 자가 있었고 많은 여인들이 따라가는 가운데 가슴을 치며 슬퍼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여인들에게 주님을 연민하는 가운데서 슬퍼 울지 말고 그들 자신과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는 말씀을 하시며 비유의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난의 말들과 희롱의 말들이 있는 가운데서 십자가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9절에서 4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좌우편에 있는 자들의 믿음의 인식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고 주님은 우편에 있는 자에게 낙원에 같이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여 주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44절에서 4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제 육시쯤 되어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며 예수님이 아버지 손에 영혼을 맡기심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운명하심이 기록되어 있고 이를 구경하는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예수의 아는 자들도 다 멀리서서 이 일을 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일반적으로 주의 운명하심이라는 것 자체에 큰 증거와 함께 간과하기 쉬운데, 가슴을 친다는 개념들이 그 인식의 차이에서 오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것에 주님께서 그 믿음으로써의 인식의 분명한 구분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점에서 그 구별되어지고 그 가운데서 구분되어진 사실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27절에 나타나고 있는 여인들의 가슴을 치며 따라오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슬퍼하는 연민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자기 증거라고 함의 사실을 곡해(曲解)하는 것으로, 잘못되게 만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주의 뜻하심을 나타내시는 자기 계시의 주권적 절대 정당함이라고 함에서 자기 정당함 속에서 이루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그러한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자신의 실패를 나타내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은 분명 잘못이며 그들의 인식과 그 열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받으실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게 되어질 자들이 있을 것인데 그것을 여인들의 먹이지 못한 젖과 수태하지 못한 배가 복이 있다고 하심의 자리에 서지 못하는 그들의 화가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잘못된 교회의 가르침으로 화를 자초하게 될 것이며 그 기본은 예수님의 죽으심이라고 함을 인위적으로 연민(憐憫)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 받을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 사실의 실제를 알지 못하고 임의적 연민으로 일관함에 대한 책망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가 없음이라고 함이 열매가 맺혀야 할 나무 푸른 나무가 판단을 받는데 마른 나무는 더 책망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그러한 것의 아주 분명한 예로서 십자가에 달린 자들의 인식의 차이에서 주님의 행하심의 옳음을 말하는 자에게 자존의 절대자로서 자기 정당함을 부여하여서 그 우편 강도의 복됨에 대한 사실과 증거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가라고 하는 특별재가와 또한 주님의 죽으심이라고 함을 보는 자들이 주님의 증거와 그 죄인의 증거의 합당함을 일반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러한 잘못됨을 놓고 가슴을 치는 자들이 있었는데 주의 제자들은 이를 보았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오는 여인들의 가슴을 침과 구경하러 모인 자들의 가슴을 침은 슬픔에 따른 연민이었던 것과 달리 다른 것을 나타난다는 것을 또한 제자들이 보았던 것입니다. 즉 핑계할 수 없는 것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서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뵈었던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한 해석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마음에 두었던 자의 증거인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참으로 오늘날도 예수님에 죽으심에 대하여서 주의 뜻하심을 마음에 두지 않고, 주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것이 사실이라는 중심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임의적 개연적인 사실논쟁으로 많은 고통의 가시 속에서 복된 자리에 서지 못하였던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마음을 두고 있지 그 전달되어지는 것의 내용적 사실성에 대하여서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것은 그 사실 기만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답답하여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놓고 주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인 진정한 사실인지를 분명하게 살펴야 할 것이며 또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그럴듯한 말로 만든 개연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신앙은 실제상황이라고 함을 마음에 두어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전달과 새로움을 위한 노력이 중요하지만 전달의 기교만 생각하고 있고 그것의 새로움만을 추구하고 있는 가운데서는 주의 책망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놓고 고민하며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복음이 진정한 사실임을 말할 수 있는 성도들로서 주 앞에서 은혜를 입는 은혜 위에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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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라

2004년 12월 10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사51:1-16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라

일반적으로 음식을 만들 때에 음식재료들의 비율이라고 하는 것과 그 조화가 잘 되어야 한다는 것도 중요한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튀김이나 붙임을 하기 위하여서 밀가루와 물을 적정량으로 섞이도록 잘 저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위해 공기나 그 외 불순불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도 사람들의 오고가는 그 관계 속에서 그 역사의 휘몰아치고 때로는 도도히 흐름 속에서 이러한 감칠맛 나는 음식을 만드는 것에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즉 ‘살맛나는 세상’에 대한 표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참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모습으로 우리를 보내시며 이처럼 세상을 휘저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속에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향기로운 산제사를 드릴 수 있는 자리 그러한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사야 50장 10,11절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는 자들로써 슬픔에 눕게 될 것을 말씀하심을 이어서, 주께서 위로하시는 내용에 대한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조상 아브라함의 혈혈단신 때에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심에 대한 것과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온을 위로하심과 그 내용적인 것을 언급하시고 있습니다. 즉 광야로 에덴 같고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셨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주의 공의를 세우심과 섬들이 주의 팔을 의지할 것에 대한 것과 하나님 자신의 의가 폐하여지지 않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를 아는 자들로써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말며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와 같은 주의 말씀하심에 성도들의 화답으로써의 실제의 기도가 이사야의 언급으로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여호와의 팔이 깨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시온으로 들어와서 그 머리에 영영한 기쁨을 쓰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게 되어질 것이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위로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을 반복하여 말씀하시면서 학대자의 분노의 실재를 부정하시고 있고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과 그 양식이 핍절되어지지 않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 더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말씀하시면서 바다를 저어서 그 물결로 흉용케 하는 자이심을 말씀하고 시온에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려하였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들의 실제적인 증거의 내용이 성도들의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 나타나게 되어지는데 하나님의 이름에 나타나는 신실하심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 슬픔에 누이는 자들에게 위로하시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위로의 본문으로써 시작을 아브라함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은 신약의 시작 즉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심에 대한 것에서 위로의 실제라고 함이 공식적으로 나타내신바가 될 것을 구약적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러면서도 실제적으로 주의 말씀의 사실성을 믿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도 구약적인 시대적 한계가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한과 축복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3절에서 보는 것과 같이 광야로 에덴동산과 같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은 그것은 광야교회의 모습이라고 함이 에덴동산과 같이 언급되어지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통치하심의 온전성이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어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다스리시는 분으로부터의 그 정체성을 말할 수 있다는 것 그 존재와 그 존재에게 주어지는 위로라고 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주의하라고 4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의라고 함의 사실을 받는 자들 즉 의를 아는 자들이 사람들의 비방에 놀라지 말고 훼방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그들의 비방과 훼방이라고 함의 실존이라고 함이 정당하지 못하며 그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으로 그것이 실제로 부정되었음을 받을 수 있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성도들이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게 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주 앞에 그 믿음의 소원을 말하게 되어지는데 하나님께서는 위로하는 자가 다름 아닌 자신이심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50장 10절과 11절의 말씀과 같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는 가운데서 즉 그 이름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러한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는 것의 사실을 받을 수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주체로서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며 ‘라합을 저미시며 용을 찌르신 이’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역사의 흐름을 주관하시면서 즉 바다를 휘저으시면서 그러한 불법의 존재를 부정하시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산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격동의 세월, 어떤 소설이나 그러한 것에서 나오는 말이 현실적인 수식으로 자리매김 되어지는 그러한 세월을 살아가면서 참 고민도 많고 주의 말씀하심 보다도 현실이라고 함이 더 실제라고 하는 사실의 강요를 받는 삶 속에서 지쳐 슬픔의 잠을 잘 때가 있는 것이 현실의 인생의 모습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격동이라는 세월의 풍파와 세파는 바다를 저으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 정당함에서 사실과 존재를 말할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광야와 같은 세상길 걸을 때에도 능히 걸을 수 있게 하시고, 피곤하여 산을 넘는 발길을 기뻐보시는 주님을 의지하여서 그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서 세상의 격동의 세월의 담을 넘으며, 슬픔과 탄식을 떠나, 주의 복음의 증거자들로서의 성도의 향기로운 산 제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또한 전혀 낯설지 않는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 뵙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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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12월 09, 2004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2004년 12월 8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26-32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삶을 살아가다보면 어떤 일을 만나게 되는데 그러한 것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즉 ‘왜 그럴까?’라는 반문을 하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믿을만한 사람이 ‘본래 그렇다!’라고 말하게 된다면 일의 진척을 위해서 그렇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여서 기본으로 삼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함을 말하는 본래적이라는 개념적 정의가 다시 해설되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지혜를 말하는 선구적인 자들은 그 ‘본래적이다’라는 뜻을 잘 분별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했던 것을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은 ‘본래적으로 당연한 것이다’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본래적이다’라는 반론이 있게 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데 그러한 후자의 의미는 실제적인 이유로서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핑계마저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하여서 말씀하심을 주목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6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6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영원히 찬송 받으실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는 가운데,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둠에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역리로 쓰며 남자들도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하는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받았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매 합당치 못한 일을 함에 대한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여러 가지 나열되어진 구체적인 언급들과 함께 그 같은 일들을 행하는 것이 사형에 해당되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들만 행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함과 같은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함에 대한 것을 또한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핑계치 못할 본래적인 사실로써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어짐에 대한 것과 그것을 소위 비 본래적인 것이라고 납득의 당위성이 없다고 거짓되게 말하는 합당하지 못한 자들에 대하여서 그 본래적인 사실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것을 말하는 이유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마음에 둠이 본래적이냐 아니냐는 것은 이미 본래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영원이라고 함은 구약언어로써 ‘올람’이라는 뜻으로써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세계를 말씀하시는 것으로써 우리에게 성도들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함을 의미하는 것의 사실적인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하나님의 언약하심 안에서의 실존적 정당함을 말씀하시기 위한 지음을 받은 존재가 바로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의 언급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시비(是非)를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자기 계시를 나타내심에 있어서는 그 정당함을 말할 수 있고 오히려 상대적이라는 개념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미 시비를 말할 수 있다고 하나 시비(是非)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래성에 대하여서 납득의 당위성이 하나님 앞에서의 정당함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인정되어야 할 때에 그것을 깨닫지 않는 자는 짐승과 같다는 말씀하심이 이루어져서 분별력과 지혜의 실존과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동물들의 본능적인 성적인 모습에 머물며 그 말씀하신바 짐승의 모습과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진 모습과 증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임의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자들의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하지만 그러한 지혜라는 것이 합당함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을 할 수 있는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지혜의 실존과 사실의 근본이 되어지는 여호와를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상식적으로도 옳지 못한 그러한 행동을 하면서 그것을 옳다고 하는 가운데서 불특정 다수의 지지적인 정당함 상대적 정당함으로 자신을 위로하고자 하는 불쌍한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자로써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셨고 여호와께서 새 언약을 세우신다고 말씀하심의 자기의 신실하심을 따라 새 언약을 세우셨으니 누구든지 영접하는 자 그 이름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어짐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상대적으로 편협함을 말할 수 있는 방법론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절대의 보편적인 말씀하심으로써, 상대적이면서도 본래적인 절대의 진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간접적인 가운데서도 대화를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일방성과 그 자체적 절대 정당하심을 증거하면 사람들은 일방적이라는 형식적인 측면만 생각하기를 원하고 대화의 원점이라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의 재가와 그 정당함을 생각하지 않는 가운데서 다수의 편견이라고 함이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개연성을 우상으로 그 그늘에 있는 종사하는 그러한 종노릇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자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게 되어지는 것은 죽는 것에 즉 상대적인 존재부정이라고 함에 종노릇하는 자들을 자유케 하려고 오신 예수님의 그 뜻하심을 바라볼 때에 종들을 보내시는 그 뜻하심의 정당함에서 주의 복음을 전함의 합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 하나님이 나의 마음에 오심을 놓고 영접기도하면 주께서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오시며 우리에게 주신 믿음대로 우리의 마음과 실재에 실제적으로 좌정하시며 다스리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주님을 마음에 영접한 자들로서, 주의 뜻하심을 따라서 구원의 복음을 온전히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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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월요일, 12월 06, 2004

만나와 신발

2004년 12월 5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수5:10-15
만나와 신발

사람의 일반적인 모습들로서, 먹고 마시는 것과 행하는 모습들 그러한 것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변화라고 함을 말하는 것으로 언급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 먹고 마시던 것들의 종류와 성격의 차이는 신분에 따른 음식문화의 차이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전에 어떤 일을 하였는가 하는 것과 지금의 행하는 일들에 대하여서도 그 변하는 것의 신분적 차이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음식의 귀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직업의 귀천이라는 개념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현실적으로 사람들의 느껴지는 변화를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동의적인 차원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사회에서의 그러한 구분적인 개념의 단순한 단정적 입장을 취할 수 없지만 상대적이면서도 구분적 구별적인 차원의 그러한 사람들의 변화를 말할 수 있다고 할 때에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그 뜻하심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에게 또한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0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서 진(陣)쳤고 유월절을 지낸 것과 유월절 이튿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으며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왔을 때에 칼을 빼든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나게 되고 그 만난 그곳이 거룩하니 신을 벗으라고 하심에 여호수아가 순종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만나가 그쳤음에 대한 것과 여호수아의 신발을 벗음에 대한 것을 주목하며 그것이 무엇을 실제적으로 말씀하시는 예표적 실제 사건적 증거인가 하는 것입니다.

음식으로써 만나와 그의 행보의 상징적 신발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삶의 변화를 말할 수 있는 객관적인 하나의 표현이 되어질 수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의 변화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만나는 일용할 양식으로써 출애굽 하여서 광야 40년을 지나올 때에 주의 백성을 먹이시던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옴에 있어서 그것의 완성적 의미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른다는 말씀의 땅에서 이제는 그 소산을 먹을 수 있도록 하심의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가나안 땅의 소산을 먹는다는 것은 구별되어진 것으로 일반적인 이방인들의 먹고 마시는 것과 동일하면서도 구별되어진 새로운 것으로써 언약의 것으로써 그 음식의 거룩함을 말하며 그것을 접하는 자들의 거룩함을 또한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발을 벗으라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남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자기표현과 자기 계시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러한 것은 앞서 모세와 함께하는 것과 같이 여호수아와 함께하시겠다고 하셨던 그 신실하신 약속의 말씀과 같이 여호수아에게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떨기나무 아래 불 가운데서 모세를 만나시고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위엄아래서 순종함으로 신을 벗음으로 인하여서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복음의 신을 신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엡 6:15, 빌 1:27)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만나에서 무교병과 볶은 곡식으로 바뀌었던 것과 대표적 지도자로서의 신을 벗어버린 것과 같은 그러한 것에서 예표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아주 조촐한 일상적인 음식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상황적인 차원의 어쩔 수 없는 인위적으로 준비되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다윗이 노래하며 증거한 것과 같이(시 23:5) 하나님의 재가에 따른 거룩함이라고 함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써 원수 앞에서 베푸시는 상이 되어지며 그것은 그 상을 받은 자의 거룩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먹이심이라고 하는 것이 일상적인 측면으로 나타날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이미 구원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기업으로 누리며 먹고 마시는 자들로서의 오늘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의 모습의 실제적인 예표적 증거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을 벗으라고 하심에 있어서 그 순종하게 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구하도록 하신 주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 정당함을 따라서 예전에 믿어 구원받기 전의 삶의 행보라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주의 성도되어진 자들로서의 복음의 신을 신게 되어질 것을 예표적으로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이처럼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자들로서 주의 뜻하심을 날마다 이루어가는 자들로써 진정 순수한 주의 말씀을 따라 행하며 먹고 마시는 가운데 주의 영광의 나라를 잘 예비하며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항상 함께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뵈옵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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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빌라도의 간교함을 넘어

2004년 12월 5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23:1-25
빌라도의 간교함을 넘어

상대적인 역사와 사회에서 한 인물의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기억되어지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억되어지기도 하고 또한 오래 사람들의 인식에 남겨지기도 하고 그렇지도 못한 것이 전반적인 가운데서 그러한 인물평가가 있을 수 있고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지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에 대한 연민이라든지 또는 여러 가지 긍정적으로 해석 가능한 것과 같이 논란이 되어질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빌라도’였습니다.

그에 대한 이해는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즉 주님을 부인하고 죽이도록 한 자들의 실제적인 자기 정체성에 대한 증인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3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리들이 잡아서 끌어옴에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무리들이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고소내용은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함의 내용이었고 빌라도의 물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자칭 왕 그리스도임이 옳다고 말씀하심과 빌라도가 주님께 죄가 없음에 대한 것을 말함에 있어서 무리들이 계속하여서 백성을 소동시키는 정치범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가운데서 빌라도는 그 무리들의 말 중에 자신의 소속적인 권한 밖이라는 개념에서 헤롯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헤롯에게 예수님이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보내지게 되고 헤롯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적이라도 볼까하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여러 무리들이 고소함에 있어서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힌 가운데서 빌라도에게 도로 보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고 끌고 왔지만 그에게서 죽일 일이 없다고 생각하여서 때려 놓겠다는 제안을 세 번 하게 되었고 그 백성들이 큰소리로 재촉하여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이 이긴 가운데 예수를 넘겨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님을 판단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러한 자들의 주관자로서 빌라도의 모습을 읽도록 하심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선 본문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제자들의 슬픔의 상대적 원인이 되어지는 세상의 모습과 세상의 주관자들의 실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 실상은 헛된 실재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서점이나 일반 시중에서 일반적인 작은 판플렛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의 제목은 ‘빌라도의 고백’이라는 작은 프로필에 가까운 것인데.. 그 내용은 빌라도는 예수님을 믿고 있었으며 또한 어쩔 수 없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그러한 것이었고 또한 그의 번민에 대한 것을 그 예로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성경 내용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은 합리성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합리성을 성경의 내용적인 측면에서 취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해석의 실제라는 것이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의 재가라는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성경의 실존적 정당함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합리성이 있다는 개념이 항상 사실일 수 있느냐는 것과 합리성과 사실이라는 개념이 오도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항상 남아 있는 것입니다. 즉 속이려고 하는 자들의 입장은 사실을 말하기 위하여서 합리성 자체만 생각하고 있지 납득의 당위성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 당위성을 조작하고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주님을 사실상 죽인 자의 모습이라고 함에 있어서 정적으로 그를 지목하고 저주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분명하게 언급하게 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정적인 의미에서 호소력이 있는 것이며 또한 사실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감정적인 것일 뿐이라는 합리적인 측면에서 앞서 말한 빌라도의 개인적인 신앙고백이라고 함이 마치 건전함을 인정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이 가능한 것은 빌라도의 간교함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의 간교함이라고 함이 정치적 개념의 야누스적인 개념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고 그의 기본적인 의도가 아니라고 하여도 그러한 것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말할 수밖에 없는 자라고 함을 기억하게 되며 또한 언급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이름인 빌라도의 모습은 불법의 사람임을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그의 이름 ‘빌라도’라는 말은 라틴어로 ‘확고히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헬라적인 뜻은 ‘찌르는 창으로 무장된’"armed with a spear"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25절에서는 베드로와 누가는 다윗의 예를 들어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이는 바로 빌라도의 모습이 불법의 사람 사울과 관련되어 읽게 되어지는 것을 증거함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사울이 다윗을 창으로 죽이려고 한 것과 동일한 모습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이며 다윗을 죽이려고 한 사울의 인식은 이미 악한 신으로 불리는 마귀의 행함이라고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지 못한 실제로서의 이스라엘 나라의 상속권을 주장하려고 하는 자의 불법의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낸 말씀이 되어지는데 그러한 것이 오늘 본문에서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의 계시를 이루심에 대한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삼상 19:9~10)

특히 간교함을 말한 것은 그의 예수님을 죽일 일이 없음에 대한 것을 위한 당위성을 놓기 위하여서 그 다른 곳에 보냄에 대한 자신의 성실함과 또한 다른 곳에서도 희롱을 받음에 대한 것과 그에 따른 백성들의 집요한 요구라고 하는 것이 자신이 내릴 사형언도라는 개념의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확고히 하는 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가장 절정의 자기표현은 자신의 죄는 없다는 자신의 손을 물에 씻으며 그 예수님의 피에 대한 댓가는 유대인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점을 확고히 하고 싶었고 그러한 언급을 했던 것입니다.(마 27:24)

즉 무리의 대중적 편견의 정당함을 따라서 자신의 정당하지 못함을 정당화하고 있는 모습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 사실의 심의를 했으며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를 판단하는 절대의 자존적 신실하을 판단하는 그 간교함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적인 여지를 말할 수 있으면서도 절대의 신실함에서는 기각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비난하고 핍박하는 자들은 상대적인 확실성이라고 함에서 주의 구원의 사실을 부인하고 주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자들의 사실 심의는 이미 기각되어진 실제라는 사실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을 보는 가운데서 주의 성도들은 그러한 것에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담대할 수 있도록 하심의 은혜를 입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욱 예수님을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더욱 그 현실적인 실제에 사실을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로께서 함께하심에 있어서 더욱 주의 구원하심의 사실은 절대의 재가를 받는 것에서 진징한 사실로써 증거되어야 함과 또한 증거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빌라도가 진정으로 예수님에 대한 사실심의 결과 죽일 죄가 없다는 것과 그를 놓아주려고 했다고 하면 대중에 납득되어질 수 있는 사실 심의 결과를 말하며 납득의 노력을 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납득되어질 수 있는 사실심의의 내용을 언급하지 않고 죄가 없다는 단정적인 언급은 이미 납득하려고 하는 노력적인 중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그러한 가운데서 대중의 편견의 확고한 의지적 표현을 통한 자기의 정죄하려는 의사의 정당함과 타당성을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절대의 판단이 아닌 절대와 상관이 없는 가운데서의 상대적인 판단에서의 사실을 말하는 상대적인 군중의 판단은 편견의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신실하심을 부인하는 것이고 그러한 것이 현실이라는 임의적인 사실 가운데서 실제인 것처럼 자신들을 기만시킨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러한 기만적 죄라고 하는 사실과 정당성 시비를 피하고 싶어 하는 정치적 간교함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 되어지는 세력들이라고 함과 그것의 타당성은 자존의 절대자를 임의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는 기만적 현실사실에 근거하고 있음을 우리 주의 성도들은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현실이라는 것에서의 실제의식이라고 함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실재와 실제 의식적인 판단의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를 생각하면서 세상의 부정된 사실들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실제의식을 가지고 그 정당함을 의지하여서 주의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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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12월 02, 2004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2004년 12월 1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18-25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젊은이들이 자신의 창작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앞날에 대한 것들도 준비하는 곳이 고등교육의 중심적인 지도방침 그것이고, 우리나라의 경우에서는 대학교육이 그러한 것을 말한다고도 하겠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결정하는 것을 배우고 그러한 가운데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적응이라는 개념 즉 보다 한정되어진 가운데서의 사회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워나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은 비단 고등교육기관에 국한되어지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사회에 바로 진출하게 되어지는 젊은이들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한정되어지는 사회에 적응하여 나가는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를 위한 스스로의 삶을 경영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스스로 행한다는 그러한 개념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며 또한 마땅히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적 증거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한 분별을 위한 말씀으로써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4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남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 이유로써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음과 저희에게 보이셨음을 인하여서 핑계치 못할 것인데 미련하여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꾸었음에 대한 책망의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4절에서 25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우준함에 따른 진노하심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에 따라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셔서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조물주보다 더 피조물을 경배하는 것을 인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며 주는 영원히 찬송할 이심이 진실로 그렇다고 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함에 대한 성격과 그것에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실제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복음서라고 하는 이사야의 말씀, 그중에서도 이사야 48장과 그리고 요한복음의 서론이라고 일명 불리고 있는, 요한복음 1장의 내용과 그것을 이해한 사도 바울의 오늘 본문은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죄라고 함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것으로 그것과 상관없이 나타나게 되어지는 성도들의 마땅히 취할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읽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 28절에서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시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기 때문에 핑계치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29절에서는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서 핑계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며 그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범죄한 아담의 인식이라고 함의 연속성에 있는 모습입니다. 즉 아담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그러한 불순종의 죄를 짓고 주 앞에 섰을 때에 그들은 변명하였던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 때문에 하와는 뱀 때문에 라는 개념과 그를 지은 하나님께 대한 합리적 변명의 여지를 두려고 하는 그러한 합리적 변명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합리성에서 자신의 불순종이라는 죄악 가운데서 합리적 정당함이라는 상대적 정당함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합리성의 실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뱀이 또한 범죄한 하와가 아무리 아담 자신을 합리성에 따른 이유와 정당함을 말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의 이유라고 하는 합리적 진술과 명령은 절대의 상대적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절대의 정당함이 있는 것의 실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자존의 절대자로서 인정하지 않았기에 상대적 합리성의 정당함으로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에 따른 언급을 비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20절과 21절에서도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함을 인하여서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음에 대한 지적도 이와 동일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마음을 마음에 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에 나타나고 있는 ‘스스로 지혜 있다’는 자의적 임의적 모습을 취하지만 본문에서는 그것의 정당함이 없음과 그것으로 인한 실존적 부끄러움을 당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정당함이 없는 가운데서 부인되어지는 기각되어지는 존재와 합리성이 되어지는 모습의 연속성을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행한다는 것의 정당함을 임의적으로 부여하면서 자존의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재가를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8장에 나타나고 있는 것도 히스기야의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는 그러한 자신의 존재적 정당함이라고 함을 증거하는 자의 모습이 온전히 나타나지 못하였을 때에 그러한 자들의 모습의 예표적 실제의 동일한 후손들로써 그들 이스라엘이 혼돈의 바벨론으로 잡혀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언급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근원에서 나왔으며 거룩한 성 백성이라 칭하며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는 너희는 이를 들을지어다”(사 48:1)

요한복음 1장을 언급함에 있어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오심에 있어서 자기 백성에게 오시나 영접하지 않음이라고 함이 그것이며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증거를 받기 싫어하는 자들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은 상대적으로 죽음 이편에 존재의 부정이라고 하는 가운데 묶여있게 되어지는 사망이라고 함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분이라고 하심의 증거가 바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 즉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을 받기 싫어했음에 대한 것이 요한복음 서론으로써의 1장의 내용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 자신의 삶에 스스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의 증거로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스스로 행한다는 개념을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과 그것에서 파생되어지는 일반적인 정당함 안에서 정당함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말하나 그 지혜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미련한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미련함의 실제는 그러한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른 절대 신실함을 상대적으로 판단하며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현상적 실제에 진정한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자신을 기만함이 그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합리성과 그 타당성을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의 실존의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제로 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한 시각의 고정을 말하는 것으로 편협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 보편적 재가는 그러한 상대적 편협의 판단의 실존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절대의 도장이 상대적인 도장이라고 함의 판단에 따른 권위와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도장이라고 함은 성령의 재가와 인간의 임의적 재가가 동일하게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 성도의 기본이 되어지는데, 이는 주의 가르친 기도(마 6:9)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이 성도의 중심의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이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함과 그것의 신실하심은 절대의 하나님의 절대 자기 신실하심에 있음을 삶의 기본과 양식에서 나타내는 것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에 따른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자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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