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월 15, 2007

무엇이 보이느냐

2007년 1월14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 8:11-26
무엇이 보이느냐

새해가 되어서 무엇인가 해보겠다는 그러한 다짐을 하는 것은 인지상정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을 함에 있어서 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가 또는 대세를 이루고 있는가 보편적인 인식들인가에 따라서 편승하는 지혜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필요라는 개념이 상당히 가치관적인 입장에서 좋은 것이면서도 비로소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비로소 의지해야만하는 개념은 아니지만 좀더 현실적인 것과 정황에 따른 판단이 요구되어질 것이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예수님 안에서 그러한 것들까지도 재고하여서 판단하게 되는 것이 기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좀 쉬운 예를 들어서 표현한다면, 요즘 텔레비젼에서 보게 되는 드라마는 어떤 것이 유행이더라는 것은 방송 피디들의 입장이나 일반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같이 주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의 드라마는 거의 좀 '촌스러우면서도 열심을내는 기염을 토할 수 있는' 뭐 그러한 드라마가 주종을 이루거나 사극적인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 대부분의 드라마의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드라마들은 그러한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데, 아마도 시청률과 인기라고 하는 것의 대세가 어떤지 그러한 시대적 사람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표적을 잘 살펴보는 지혜의 한 방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시대의 '현상'을 살펴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나타나는 시대적 '표적'을 살펴본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세상을 살펴보는 우리 성도들의 현실이해 표적이해 사회 현상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상당히 주목할만한 말씀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말씀하시고 있는데 주목하여보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1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심과 저희를 떠나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는데 동행하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그것은 마음에 두지 않고 서로 의논하기를 떡을 가지고 오지못하여 떡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심과 사천 명을 먹이심에 대한 가르침을 상기하도록 말씀하시며 아직도 깨달음이 없느냐는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벳새다에 이르러 사람들이 한 소경을 데려와 고쳐주시기를 바라매 예수께서는 마을 밖으로 나가셔서 그에게 두 번 안수를 하셔서 그가 주목하여 밝히보게 치료하시고 그의 집으로 그를 보내시며 그에게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의 현상이해로서의 표적에 대한 이해와 우리 성도들의 표적이해로서의 현상이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과 그것을 위한 비유로서의 소경을 고치심을 나타내고 있음을 통해 주의 뜻하심을 밝히 볼 수 있는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 더 언급한다면, 두 가지 주목함에 있어서 먼저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의 현실이해로서의 표적이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주의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음'을 본문에서 읽고 증거하도록 하고 다음으로는 '진정한 시대이해로서의 표적과 그 사실관계에 대한 것으로서의 어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가'하는 것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의 현실이해로서의 표적이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주의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음'에 대하여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막 8:11~12)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이라고 함을 말할 때에는 그 표현적 입장에서는 그렇게 틀렸다고 할 수 없는 정황적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나타내는 것으로 구별된 가운데서 차용되어진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지 못한 가운데서 범신론적인 판단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의 자존적 절대 보편성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 그들의 인식은 사실 당위성의 정당함은 상실되지만 말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에서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정당함이 부여된 현상 즉 그러한 표적을 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주권적 입장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바리새인들의 입장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중심을 읽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앞에서 그들 자신들의 모습은 율법적인 개념의 판단을 받으며, 그 의문의 판단아래서 이미 기각되어지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세상의 여러가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현상이해 즉 하나의 인식을 위한 표적이라고 하는 것이 있지만 그러한 것은 일상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 특정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편성에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인정되어질 수 있는 것들임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식보편의 실존은 그 자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의 구성이 가능하게 하는 사람들의 인식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로서의 받게 되는 인식이라고 하는 것에서 기원적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식보편이라고 하는 그 어떤 보편 인식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을 때에 비로서 그 실존적 정당함을 말할 수 있고 일반적인 은총적 입장에서 건전한 사고를 사람들이 납득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것을 기준으로 함에 있어서도 아직 죄악된 세상에서 그 상식보편이 주의 말씀하심과 그 일반적인 뜻하심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자리매김되기도 하기 때문에 보편의식도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실존적 분별을 정당하게 요청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행위라는 개념에서 파생되는 인식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소위 이러한 표현들이 예일 것입니다.

'아 나는 모태신앙으로 신앙생활을 몇십년해 보았어 그런데 말야 아닌 것같다'와 같은 표현이나 '나도 교회 다녀보고 십일조도 해봤는데 뭐 크게 다른 것이 없고 허송생활을 했어' 등등의 인식들.. 이러한 것들은 그 사실성을 비로소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한 현상이해라고 하는 것에서 진정한 사실을 붙잡을 수 있는 인식의 표적을 이미 주께서 주시지 않으셨다는 것의 부여되어진 재가되어진 자존적 절대적 보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식의 확실성을 잡을 수있도록 하심에 있어서, 신앙의 경륜이라고 하는 것이 귀한 것이며 존중되어져야 하는 것이면서도 비로소 신앙을 판단하지 못하도록 하심의 그 배려하심의 깊이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 바리새인들의 그 행함에 대한 것외에 하나님께 드리는 자원하는 심령 즉 하나님의 형상적 입장에서의 그 영광을 나타내는가에 대한 여부로 그들의 잘못된 것을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분별해야 한다고 하심을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현실이해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사실인 것과 같이 인식하는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즉 주께서 말씀하시고 계신데도 떡 가져오지 않음에 대한 것에 대한 것이 공통적인 인식으로써 논의적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는 책망이 기록되어 있음을 주목하며 또한 그것에 대한 가르치심이 나타나고 있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것이 다음 본문에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진정한 시대이해로서의 표적과 그 사실관계에 대한 것으로서의 어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가'에 대하여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주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에 있어서 마을밖에 나가셔서 두 번 안수하여 고치셨음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단번에 고치지 못하시는 전능성의 시비를 비로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두 번 안수하심으로 고치시기로 작정되어진 가운데서의 계시적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제자들과 같이 참으로 눈을 뜨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라고 하여도 죄와 이미 실제적으로 상관없는 존재이면서도 상대적인 현실적인 삶속에서의 실제적 죄악가운데 있는 것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뜻하심을 기억할 때에 우리 성도들의 눈이 감기게 되어지는 현상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대적으로 보여주시며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님 안에서 진정으로 사물을 실제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신다는 주의 뜻하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25절 말씀에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고 말씀하심에서 '주목하여 보더니'라는 말은 본문 헬라어로는 '디아블레포우'라는 뜻입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주목한다는 표현과 어떤 것을 꽤뚫어 본다는 것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새롭게 본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디아블레포우'라는 뜻은 '통하여 본다'라는 해석이 합당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안수하셨다는 구별적 정당성이라고 하는 것과 본문의 문맥적인 측면에서도 지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첫 번째 본문에서 당면한 현실 떡이라고 하는 것이 없음에 대한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에 주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것과 사천 명을 먹이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상기하도록 하는 그의 가르침을 의도하셨는데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본다는 개념으로 주목하여 본다는 개념으로 연결되어져 증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심과 사천 명을 먹이심에서 기억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도록 하심에 있어서 성도들의 생활의 기본이 되어질 때에 현실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주의 명령은 공허한 상상이나 허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하심이 현실을 주장하는 것으로써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읽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에 따라 증인을 세울 때에 두명 이상 세우게 되어진 것과 같이 두번을 통해서 주의 계시적 이상과 실재라는 것은 현실을 주장하는 것으로써의 합당함과 그것으로 생명을 얻도록 하시는 구주의 증거적 사실을 받도록 말씀하심이 증거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의 정당함에서 현실이 사실화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로서 제자들은 그것에 대하여서 잠시 주목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즉 '주님을 통하여 사실 규정의 정당함'의 사실을 마음에 두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연약함이 도마에 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연악함에 있어서도 주 예수께서 그들을 받으셨다는 정당함에서는 종국적인 그들의 눈을 여시는 주의 선하심의 사실적 증거가 있게 되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소경의 눈을 열어서 밝히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목하여 보더니'라는 말은 본문 헬라어로는 '디아블레포우'라는 뜻은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고전 1:19)고 하신 사도의 증거의 기준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하심을 통하여서 표적의 사실적 입장을 비로소 찾을 수 있다는 것 즉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서 합리성과 사실의 실존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진정 합당한 것으로 알아 받아들이며 그 가운데서의 사실 표적을 분별해보는 것이 성도의 인식으로서의 합당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고 사천 명을 먹이심에 있어서 그것을 나누어주시도록 한 것은 제자들과 그의 합당함을 입은 종들이라는 사실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의 전한 것에서 그 하나님의 뜻하심을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는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함의 사실적 완성과 증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연약함에서 세상적인 속물적 눈이 뜨여질 수도 있지만 주의 택하심을 믿을 때에 그것에 비로소 우리의 시선이 머물 수 없으며 그러한 자리에 나가지 않도록하시는 주의 은혜가 우리 성도들을 붙들게 되는 것임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그것을 이루도록 힘쓰는 종들로서의 기쁨과 감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연약함을 예수님이 은혜주심이라고 하는 것을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진실로 주님을 믿는다면 편리를 위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그 중심의 실존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면 되니까 죄를 지어도 좋다는 식으로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과 기타 여러 우리 상대적인 인식의 결핍이라고 하는 것도 주의 뜻하심의 자존적 정당함에 따른 예정하심의 구원하심에 대해 시비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신의 피로 사신 예수께서 이미 우리 존재를 거룩하게 하심에 있어서 성도라는 진정한 이름을 얻게 하셨는데 이제 '무엇이 보이느냐'(막 8:23)는 말씀에 '예수님을 통하여서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서 진정한 구원과 진리와 사실을 밝히 보나이다'라는 증거로 인식의 표적이 없는 마을에서 비로소 진리를 찾아보겠다는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증거자로서의 모습으로 보다 더 합당한 사역을 감당하시는 종들의 모습으로 주 앞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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