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9월 28, 2004

새로 만든 십계명 돌판

2004년 9월 26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34:1-17
새로 만든 십계명 돌판

일반적인 경우에서 말한다고 할 때에 새롭다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서의 정체성을 가지는 하나의 개체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차이라는 것은 상관성을 전혀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이질적인 것으로도 표현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물리적인 변화나 화학적인 변화와 같은 것이 그러한 예가 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에게 돌판을 새롭게 만들어서 올라오라고 하시는 가운데서 말씀하시고 또한 언약을 세우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 말씀하심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0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고 하시면서 그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하나님 자신이 그 판에 쓰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 여호와이심 반포하심과 그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심을 말함에 있어서 모세의 은혜를 구하는 것과 그것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주의 기업으로 삼으시기를 구하고 있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자신이 언약을 세우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삼가 모세와 그 백성들이 들어가는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이 올무가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지 말며 신상을 부어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새롭다는 개념이 상대적인 차이와 상관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질적이라는 개념으로 규정되어진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께서 새로 만들게 하심에서 그리고 그 전에 쓰여진 말들을 쓰시겠다고 하심에서 보는 것과 같이 새로운 돌판에 동일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새롭다는 것을 말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돌판이라고 함에 쓰여진 율법들은 행위를 요구하는 것들로써의 그 정체성을 가지는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이라고 함을 인하여서 그 돌판이 깨어지고 다시 새로운 돌판에 동일한 말씀을 쓰신다는 것은 새로운 율법이라고 함이 전에 쓰인 것과 동일하면서도 새로움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게 되어지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을 세우심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어지며 주 안에서 주어지는 새로운 율법이라는 것이 상대적 이질감의 언약적 내용이 아니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심에 따른 새로운 언약으로 언급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신구약의 불연속성이라고 하는 개념의 모습과 같은 것을 상대적 합리성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의 정당함을 따른 연속성으로써 언급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모세가 돌판을 깎아 올라오도록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전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초자연적 역사하심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지만 그러한 것을 기준으로 하시면서도 이제는 성도들의 섬김에 따른 형태의 초자연적 역사하심을 나타내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약 새 언약은 신구약 동일한 언약으로써 구별되어지는 새로운 언약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있어서 상대적인 개념의 합리성을 의지하지 않도록 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반포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상대적인 개념의 판단으로 존재판단을 함으로 있게 되어지는 상대적 존재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존을 파괴하는 자로 나서는 분이 아니시며, 그러한 것이 자존의 절대 정당함을 따르는 것인데, 그것이 인자의 천대까지 베푸심과 악에 대한 삼사 대 손에 대한 보응으로 자존의 절대 신실하심과 그에 따른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삼가서 들어가는 곳에 사람들과 언약을 맺지 않도록 하심과 그 땅의 신상을 부어 만들지 말라고 하심을 기억합니다.

사회계약설을 굳이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사회는 언약과 약속이라는 가운데서의 질서적 삶을 유지하는 곳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지 못한 약속의 실존도 있을 수 있는데 그러한 것에 분별없이 약속을 행하다가 그것이 올무가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존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다른 상대적인 신들의 존재적 정당함을 인정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다시 신론을 고쳐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무성(nothingness)이라는 개념에서 또는 비존재(non-being)라는 개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는 가공되어진 신론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상들에서 만들어진 신관에 많은 이들이 진정한 개혁신앙이 있는 것과 같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오늘날의 사람들은 신구약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 다른 말씀들로써 나타나고 있고 그 불일치로 성경의 모순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출애굽기 34장에서 이후로 나타나고 있는 말씀은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의 십계명을 받는 것이 반복되어지는 가운데서 동일한 앞선 계시의 말씀과 비교되어지는 말씀이 계속 진행되어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때에 진정으로 신구약 성경이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적인 합리성이라고 함을 따라서 비로소 정당하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절대자께서 자신의 이름에 나타나는 자존의 절대 정당함에서 비로소 합리성의 정당함을 따른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서, 주 예수께서 새 언약(눅 22:20)을 세우신다고 말씀하실 때에 자존의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언약을 세우심(출 34:10)에 대한 것으로써 그 실제성을 나타내시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기쁘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자존하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서 주의 자녀된 자들로서의 기쁨과 감사가 항상 함께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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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나리온 하나

2004년 9월 26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20:19-26
데나리온 하나

역사적으로 소피스트들이나 여러 변론술을 배운 자들의 기본적인 기술적 역량은 파라독스(paradox)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잘 이용하여서 자신들의 의견의 일관성을 이루어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달려있었던 것입니다.

파라독스(paradox)라는 것은 방패와 창이 공존하는 것과 같이 어떤 결과를 상대적으로 예측하는데는 여러 가지 여지가 있어서 혼란스러운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모순(矛盾)이라는 말이 그러한 말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것에 있어서 그 사고와 그 합리성의 방향성을 나타낼 수 있는 시작점이 되어질 수도 있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변론가들은 고대로부터 사용하여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변론술 자체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비판적 또는 변론적 정당함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는 그러한 변론적인 것을 통하여서도 증거되어질 수 있으며, 주 예수님의 그 뜻하심이라고 함의 정당함이 상대적으로도 핑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로마의 한 병사의 일일 급여와 자유농원의 일일 임금으로 통용되어지던 데나리온을 가져오라고 하시며 말씀하시는 주님 예수님의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9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3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 자신들에 관한 심판의 말씀으로 인식되어짐을 깨닫고 예수님을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여 엿보다가 예수님을 총독의 치리와 권세아래 붙이려고 하여 정탐을 보내어 그들로 예수님의 말을 책잡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질문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데나리온 하나를 주께 보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는 그 질문하심과 그들의 가이사의 것이라고 함을 말함에 따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심의 답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 가져오라고 하신 데나리온 하나와 그곳에 쓰여진 화상이라고 함의 의미에서 그 당위성을 인식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의 정당함을 따른 실체적 삶과 삶의 형식을 이해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이라고 함을 먼저 기억하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서 무슨 권세로 행하느냐는 그러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들의 변론에 있어서, 결국 그렇게 질문하는 자들의 악함이라고 함이 판단되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으로 성경에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음에 대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은 그 당시 상식적인 면에서도 핑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의도함을 일관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상식적인 생각이라고 함에서 파라독스(paradox) 즉 모순을 찾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모순에서 자신들의 말의 합리성이라고 함의 일관성으로 자신들의 뜻한바 즉 예수님을 부인하려고 하는 정치적 올무를 씌워 없이하고자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파라독스, 모순이라고 함에 있어서 가장 일상적인 것으로써의 개체로 인식되어지는 그 당시 일일 노동에 해당하는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주목하도록 하신 말씀은 그 데나리온에 새겨진 ‘화상과 글’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화폐의 통용적 당위성이 로마의 가이사의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가이사의 정치적 정당함을 가지는 가운데서의 통용되어지는 것으로써 사용적 타당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 보내진 자의 입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타당성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질서 즉 하나님 나라의 통치적 질서라고 함에서의 실제적인 것도 있음과 상대적인 입장에서는 그러한 것도 인정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차원이 다른 문제가 항상 모순으로써 매여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과 과 임의적인 일방적인 것으로 해석함에 있어서는 그 또한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나라의 본질적 정체성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의 정당함을 얻는 세상나라의 질서의 일상적 실존의 정당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질서와 그것의 성립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면서 허락하시는 가운데서의 실존하게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이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경우에는 그 나라의 질서적 실제의 문제는 존중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당위성에 대한 그 합리성 시비를 말한다고 할 때에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자기 절대 정당함을 통하여서 세우시는 교회의 질서적 정당함과 보편성의 실제를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와 세상에서의 상대적 보편성에 있어서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데나리온 하나에 담겨진 것을 주목하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림의 실제적 정당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먼저 분명히 하게 되어지는 것은 세상의 현실의 모순적인, 비합리성으로 보이는 것을 다루는 철학들이라고 함의 변론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성립되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을 때에는 일반적인 생철학의 정당함을 따를 수 있고 변론적 증거의 실제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벧전 3:15)

그리고 주님이 데나리온 하나를 주목하도록 하신 것은 우리의 일일 노동과 같은 우리의 하루하루에서의 가치를 통하여서 하나님나라의 그 증거적 삶이 되어야 할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마음에 드는 품꾼으로서의 하루하루의 증거를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예비하시는 종들로서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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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9월 20, 2004

은혜 받은 증거의 실상

2004년 9월 19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33:1-23
은혜 받은 증거의 실상

사람들은 하나님께 은혜 받았다고 하는 성도들에게 그 은혜를 받은 것의 증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은혜 받은 증거적인 사실을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더욱 요즘에 나타나고 있는 이단으로써 속칭 ‘구원파’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느냐는 질문에서 그 증거적인 것에 대한 회의를 가지도록하며 자신들의 합리성을 따라야한다는 것으로 일관하며 미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한 회의적 질문과 달리, 이러한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증거에 대한 것을 성경에서는 어떻게 말씀하시고 있는가 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은혜의 증거가 모세의 중보적인 기도의 내용 속에서 증거되어짐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백성들의 송아지 우상을 만든 후에 하나님의 심판하심이 있었고 그러한 후에 이어지는 본문의 말씀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에, 그의 자손과 함께 그 땅에 올라가라고 하심과 하나님께서는 그 목이 곧은 백성과 함께 올라가지 않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단장품을 제한 것에 대한 것과 모세가 회막을 세움과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의 중보적인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응답하심이 친구와 대화하는 것과 같은 모습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중보적인 기도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모세 자신이 하나님께 은총을 입었으면 주의 백성을 인도할 길을 보이시며 주를 알리고 주의 목전에서 이 이스라엘 백성,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혜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 것인지 반문하는 가운데서,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임을 기억하며 간구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모세가 하나님의 뒷모습만 볼 수 있도록 하시는 그러한 은혜를 입으며 또한 주의 얼굴은 보지 못함에 대한 것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보고 살자가 없음에 대한 말씀하심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시간 속에 나타내시면서도 그 시간의 실제적 판단을 받지 않으시며 그러한 가운데서 삼위하나님의 뜻하심의 증거를 나타내심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사실의 확실성이라고 함을 자존의 하나님의 증거적 실제에서 나타내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의 실제라는 사실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출 33:16) 하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고 이것은 메시아적 영광을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상대적인 모습으로 증거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예수님에 대한 실제적 증거자로서의 예표적 실제의 인물입니다.(신 18:15: 행 7:37) 그러한 사역의 구별적 입장에서 성부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뜻하심이 자신의 신실하심이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나타나는 것으로써의 모습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주목되어지는 것은 ‘은혜의 실제라는 사실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출 33:16) 하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출 33:16)

이러한 말씀에 이어지는 여호와 하나님의 증거적인 말씀은 19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을 반포하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을 증거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자존의 하나님의 증거를 받는 자들은 그 은혜 줄자로서의 예정하신 은혜의 자리에 설 것을 말씀하심이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하였던 자들의 모습의 전형적인 자들로서는 함의 족속의 정체성을 가지는 애굽족속인데 그 애굽의 바로 왕은 하나님의 이름을 반포하는 자리에서 이러한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증거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자신의 백성을 보낸다는 모세의 증거를 애굽왕 바로는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면서 상대적인 측면에서 현실적인 실제의 자신의 기득권이라고 함을 주장하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받지 못함이 바로 은혜의 실제의 자리에 서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은혜의 사실과 그 증거로서 은혜를 입은 줄 알지 못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단 단체인 소위 ‘여호와 증인들’의 모습은 여호와 하나님 야훼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말하면서도 그 모세가 증거하였던 것과 같이 그 이름의 증거 즉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에서 말씀하시고 있음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믿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심을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들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위 한국에서 생성된 이단으로써 구원파의 모습은 구원받은 증거라고 함의 현실적인 실제의 사실들을 합리성 자체에서 비로소 정당성 시비를 행하고 있고 그들의 임의적 합리성에서 파생되어지는 것을 타당성이 있는 것과 같이 말하고 있는 모습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정당함을 따르는 가운데서의 실존을 말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 말의 정체성은 상대적 보편을 따르는 것의 판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의 영광을 나타내며(18절) 주의 은혜를 입은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반포하는 가운데서 알게 하심의 은혜를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맹목적으로 사칭하는 가운데서 자신들이 증인이라고 하는 거짓을 넘어서서 참되게 그 이름의 뜻으로써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가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써 말씀하심에 비로소 정당함을 찾고 그 가운데서의 우리의 삶과 증거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합리성에서부터 비로소 그 정당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실제의식을 찾는 자들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자리에 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성 자체보다도 예수님을 믿는 것에서 우리의 실존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당한 자의 사실을 말하는 가운데서 합당하게 합리성을 찾아서 주의 구원하심을 증거해야 할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을 알며 그 기쁨과 감사로써 산제사를 드리는 자들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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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9월 16, 2004

깊이 잠들게 하는 신

2004년 9월 16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사29:9-24
깊이 잠들게 하는 신

잠들지 않는다는 개념으로써 깨어 있으라는 표현과 개념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계속한다는 것과 주의를 상기시킨다는 개념과 그리고 일상적인 잠을 자지 않는다는 개념 등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깨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과 그의 사도들의 증거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비유적 개념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있고 또한 상황적 차원에서 행위의 열심을 내어야 하는 것들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깨어있음에 대한 상반적 개념에서 주목할 수 있는,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부어주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기본적인 깨어있다는 것의 실제, 그 사실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분명한 사실로 나타나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9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2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놀라고 놀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와 선견자가 눈이 감김에 대한 것과 묵시가 봉한 책으로 유식한 자도 무식한 자도 읽을 수 없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이 백성이 입으로는 가까이 하며 그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떠났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며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질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말한 자들, 즉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의 자리에 서게 되는 자들의 화가 있을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그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들이 행하는 것을 누가 보겠으며 누가 알겠느냐는 식의 입장과 피조된 것이 피조를 행한 자의 판단을 함이 가능한 것과 같이 어리석음의 자리에 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과 소경의 눈이 볼 것에 대한 것과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서 기뻐할 것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서 즐거워하는데 이는 그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음이며 그들이 헛된 일로 억울케 하였던 것입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데 야곱의 족속이 부끄러워 아니할 것에 대한 것과 그 자손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다 하며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마음이 혼미하던 자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깊이 잠들게 하는 신’(타르데마 루아흐)을 부어주심과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증거가 성도의 교회에서의 증거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깨어 있다는 것의 사실과 그 실제가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의 문맥을 주목하면 이사야 29장의 내용은 ‘아리엘’에 임하는 화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아리엘’의 뜻은 ‘하나님의 사자’ "lion of God" or "lioness of God" 라는 뜻이 있는데 이는 예루살렘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성도에 대한 총체적인 지칭적인 입장으로써 해석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앗수르 나라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그러한 화가 있는 가운데서도 그러한 정복하며 주의 이름이 있는 자들을 해하는 자들의 행함이 이미 실제적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꿈에 많이 먹어도 깨고 나면 여전한 것에 비유하여 말씀하시고 있음이 그것입니다.(사 29:8)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인생막대기와 같은 것으로 징계하시는 것은 그들의 죄악을 인함인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다 상대적이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고 자신들의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감출 수 있다는 점에서 누가 알겠는가 누가 그 비판적 사실을 말할 수 있느냐는 식의 입장에서 임의적인 증거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부어주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허용하심에 주권적 표현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의 소산으로써 언급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머뭇머뭇 거리는 자들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들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 그 증거적인 확실성을 말하지 못하고 그 결과적인 것은 그 영적인 것에 눈이 감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선지자도 선견자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사실을 말하기를 머뭇거린다면 그러한 깊이 잠들게 되는 신 그러한 영의 사역적인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우리나라에 추석과 같은 명절이 되면 제사에 대한 문제로 사회적으로는 어떤 경배의 뜻보다는 화목의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고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의 사회자는 말하기를 옛날에는 제사라는 것이 포식의 기회가 되어지지만 요즘에는 칼로리를 계산함이 더 유익한 것으로써 언급한 것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즉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이고 형식적인 측면에서의 동의로 일관하고 있고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 실제적 입장을 달리하고 있으면서도 같이 하는 그러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교적 문화로써의 그러한 것은 그러한 판단을 함에 있어서 그럴 수 있는 당위성이 성립되어지지만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상대적 신관의 납득 당위성이 없는 것들과 비교되어질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비교되어지는 것과 같이 몸 따로 마음 따로 행하는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말할 수 없고 그러한 것이 오늘 본문에서 책망(사 29:13~14)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의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22절에서는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자신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으므로 이것을 의로 여기심’(창 15:6, 롬 4:3)을 받는 존재이며 그러한 의로움의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게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의 시작적인 증거로써,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마 1:1)를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이 예언되어지고 있음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23절에서는 ‘.. 내 이름이 거룩하다 하며 ..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음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의 실제적 사실 기반의 정당함을 통하여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이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 위격적인 차원의 합리성의 상대적 표현의 어려움과 불연속성이라고 하는 것이 삼위 일체 하나님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자존의 성부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 ‘주님께서 성경의 말씀의 인을 떼시는 은혜의 계시’의 말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계 5:1~14)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은 바로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창 15:6)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고 있고, 이것을 알고 있는 바울은 로마서에서는 그냥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고 이후에는 아브라함의 의가 모든 믿는 자들(롬 4:23~25)의 의로움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깊이 잠들게 하는 신(영)’은 이처럼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확실성을 말하지 못하고 말함에 그 능력을 말하기 어려웠던 것이며 머뭇머뭇하게 되고 인위적으로 말하는 가운데서 그들의 선지자적 선견자적인 견해는 하나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단인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로써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칭할 뿐 진정으로 하나님이름의 정당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존(自存)의 하나님을 믿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의지하여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자들로서, 항상 깨어 있어, 하나님의 교훈을 혼미함 없이 원망 없이 받으며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로서의 기쁨과 감사가 평생에 함께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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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의 실상 이해

2004년 9월 15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21:17-40
경건의 실상 이해

무엇이 경건인가? 라는 질문에서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경건을 정의하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이교적 차원에서 흔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것에 대한 여파와 분쟁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한 것이며 상식을 초월하는 것을 당연시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물론 상식을 초월하면 모두 신앙과 경건의 실체인가 라는 질문과 비평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우리 기독교는 어떤 경건의 실상을 말씀하시고 있는지를 주목함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7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7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7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이방을 다녀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게 되는데 그곳에 장로들이 그를 맞고 바울은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고 저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그곳의 장로들이 사도 바울에 대한 오해로써 모세의 율법을 페하는 자라는 그러한 오명과 그러한 인식이 잘못된 것으로 서원하는 자와 함께함으로써 율법준수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구하고 있고 사도 바울은 그대로 행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7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이레가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충동시켜 임의적으로 사도 바울을 해석하고 그를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가는데 천부장의 군대가 그들을 말리고 바울을 두 쇠사슬로 결박하고 그 이유를 물으니 그 실상을 알 수 없음을 인하여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 가도록 명하고 있고 유대인들이 그를 없이 하고자 외치며 따라가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37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바울을 데리고 영문으로 들어갈 그 때에 사도 바울이 천부장에게 자신이 유대인이며 길리기아 다소사람임을 말하고 히브리인들에게 말하기를 구함에 있어서 천부장이 허락하고 사도 바울이 백성에게 손짓하며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본문에 기록되어지고 있는 유대인들의 경건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고 그 결과 그들의 증거는 어떤 실제적 모습과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과 또 하나는 그러한 경건의 이해는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구교를 비롯하여 지금의 예루살렘의 이해적인 견해의 차이로 분쟁을 이루고 있는 자들의 모습이 상관성이 있음과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경건의 흐름이라고 함의 실제가 사도바울의 증거를 통하여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이 세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에 메이지 않으면서도 진정한 율법적 실재와 사실과 그것의 준행에 대하여서 그 중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아직 이해하지 못한 예루살렘의 장로들을 비롯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율법관에 동의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라도 보여주기를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유대인들의 율법관은 그 실재의 정당함을 잃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의 실제적인 성례전적인 것이 다 완성되었음에 대한 것을 받지 않음과 오히려 그것을 주장한다는 것에 그러한 입장의 정당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행함에 동의하여 준 것은 마지못해서 행함이라는 것이라는 이미지만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양보를 한 것같이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이미지 승부수를 띠운 것이 아니라 율법의 실제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세상의 우상이라고 함의 실존이라고 함을 부인한 것과 같이 율법이라고 함이 성도를 묶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 가운데서 형제들의 연약함을 받는다는 차원의 행함인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형제들의 연약함을 받는 것으로써의 사랑이라고 함의 새 율법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일한 표현의 다른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다른 중심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정당한 것이냐는 질문이 있어야 하는데 사도 바울은 그 질문적 정당함을 하나님으로부터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실재관은 잘못된 것입니다. 즉 그들의 율법이라고 함의 완전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거룩함이 있는 것과 그것으로 상대방을 정죄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한다는 것이 잘못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 헬라인과 같이 들어감에 대하여서 지역적인 구역의 거룩함을 말하는 자들의 모습, 어떤 특정장소만의 거룩함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것 상대적 구별성을 말하고 있지 하나님으로부터의 구별적 정당함에서 비로소 있게 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바로 헬라인으로써 군대 천부장이 들어보았을 때에 실상을 알 수 없는 말들로써 그 능력을 상실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행 21:34)

그러한 가운데서 육신적으로 메인 사도바울의 권위라고 함이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말씀하실 수 있는 권세가 그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다른 부분에서 복음을 핑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과 같이 그 능력이라고 함이 있어서 듣도록 하시며 그 주의 양들이 들을 수 있는 주의 음성을 담아내게 하시는 권세로 임하신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경건 경건의 능력을 잃은 것은 바로 율법의 행함의 완전성과 충족성에서 거룩을 말하고 있고 그 가운데서 전도자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자들의 모습 오늘날 결과주의적인 개념의 신앙의 모습들 성과주의적 신앙의 판단과 정체성을 말하는 자들의 모습이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잘못된 경건의 모습은 어떤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어진 경건과 거룩을 말하는 사람들 즉 자신들만이 보편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오늘날에 있어서는 여기 구 카돌릭이 포함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땅에 거룩한 장소(holy land)가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그곳을 점령함이 하나님의 나라 신의 나라를 성취하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그것으로 상업화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경건의 판단이 실제로 성립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사도바울의 매임에도 불구하고 주의 복음이 전파되어질 수 있는 권세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친 그 하나님의 주권적 정당함에서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이 진정한 경건의 사실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지난번에서는 아레오바고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사도 바울을 고소하지 못하였던 것과 이번에는 사도 바울을 결박했으나 그 증거적 사역의 기회를 줌에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하도록 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은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른 증거적 실제에서 비롯되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 경건이라고 함의 이해를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 포학함이라고 하는 것이 상식을 넘어서서 현실적인 고통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중동의 사태라고 하는 것과 그 테러리즘이라고 하는 것은 경건의 사실이해의 차이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시대의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하심의 실제에서 경건의 사실을 말하는 가운데서 진정한 경건의 실상을 배우며 경건의 확신이라고 함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주의 뜻하심의 합당한 종들로서의 사역을 잘 감당하시는 가운데, 경건의 실상을 말하며 믿으며 증거하시는 가운데서, 주님의 길을 잘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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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9월 13, 2004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이라

2004년 9월 12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9:28-48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이라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한 사람으로써 생활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어떤 통보되어진 사실들 특히 납득되어야 할 사실들에 대하여서 간혹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상생활에서 납부하게 되어지는 고지서의 기한이라든지, 그 사회에서 주어지는 의무를 행하여야 하는 각종 사항들을 알리는 기간을 잊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전혀 그러한 것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바쁜 가운데서 우선순위라는 개념에서 일을 처리하는 가운데서 그렇게 마음을 두지 못하는 가운데서 잊게 되어지는 경우도 간혹 있게 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더욱더 바쁜 세상에서 살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인지상정적인 개념에서 본다면 그럴 수도 있는 당위성이 있지만, 그것이 사람의 죽는 혹은 살아간다는 것과 같은 그 존재에 관한 것이라고 하면 간과와 그것으로 인한 망각이라고 하는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본다는 사람의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적인 것인가 하는 것의 옳고 그름이라고 하는 것이 전제되었을 때에 더욱 그러한 판단의 사실을 놓고 안타까움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연민으로써 세상에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권고 받는 날을 알지 못하고 지나고 있는 자들에 대한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8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1절에서 44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45절에서 4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8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삭개오와의 대화와 축복하심과 ‘열 므나’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마치시고 이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심과 주께서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에 이르러 제자 둘을 보내시며 맞은편에서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풀어오라고 하심과 그 가져온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임성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순종과 그들의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찬송하는데 바리새인들이 책망할 것을 주님께 요구함에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바의 예언된 말씀(합 2:11)으로 답변하심이 기록되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1절에서 4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심과 그 증거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권고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45절에서 4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님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깨끗케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그곳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주의 전이 기도하는 곳이라고 함을 말씀하시면서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음에 대한 책망을 하심이 기록되어 있고, 백성들의 두목들은 주님을 죽이려고 꾀하나 백성들이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에 그들이 어찌할 수 없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권고하시는 날을 사람들이 모른다고 말씀하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권고하심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사람들이 그것을 간과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의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할 것에 대한 것과 19장에서는 삭개오의 구원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인생의 구원을 말씀하시는데 그러한 절대적 왕적 권세를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이 자존의 절대자 자신으로서의 예수님 앞에서 심판받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그것은 주의 예언하신 바대로 메시아께서 나귀를 타실 것에 대한 것을 이루심을 나타내시고 있고 그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찬송이 기록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눅 19:38)

이 찬송은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날에 천사들의 찬송에 대한 것과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찬송에 대한 것을 주의 제자들과 사도들은 어떻게 인식하게 되며 증거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한 자로서의 증거자였던 스데반은 천사의 전한 율법을 지키지 않았음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행 7:53) 그리고 그 천사가 전한다는 그 자체만의 의미가 비로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함을 사도 바울이 또한 증거하고 있습니다.(갈 1:8)

예수님의 탄생하심의 증거와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주의 사도들의 증거라고 함이 임의적 천사들의 증거라는 상대적 여지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비로소 판단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에 천사들의 찬송과 같이 주님을 영접하며 주님과 함께하는 자들이 찬송을 부르며 주님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이 본문의 말씀이 오늘 본문 38절의 말씀과 동일한 말씀이며 그 말씀을 실천하며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그 행함은 스데반이 말하는 천사의 전한 율법이라고 함의 실제적인 순종이라고 함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약에서 시편에서 증거되어지고 예언되어진 것입니다.(시 118: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이가 바로 예수그리스도 자신이심을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며 그 자신으로서의 사실을 말함에 그 절대의 정당한 사실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상대적인 여지라는 개념으로 해석하고 있는 자들의 모습에서는 항상 그 확실성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 받아들임의 우선순위의 기본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증거의 사실을 말씀하시는 권고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권고하신 날 자체를 알지 못함이라고 함의 실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그 자신의 표현들이라고 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고 그것을 납득시키려고 하는 의도라는 것은 자신의 존재와 관련되어지고 있다고 할 때에 임의적은 것으로 자신의 유익을 착복하는 가운데 강도의 입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증거적인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임의적인 것 사실인지 모르는 것을 함부로 말하며 그것으로 자신의 유익을 취하는 자들로써 강도의 집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천사들의 예수그리스도의 나심과 구원의 증거와 그 구주의 가르침으로부터 정당한 사실을 증거하는 성도들의 모습에서는 그 증거의 능력이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 주의 택한 백성들은 그들을 통하여서 주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형이상학적인 개념 현실적인 실제의 예외적이고 초현실적인 개념에서 하나님을 말할 수 있다는 식으로 임의적으로 말하거나 막연한 이상향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도덕적인 것을 행함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고 함을 말할 수도 없고 말하는 것을 싫어하며 자신들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들의 말에는 자체적 정당함이 없고 항상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즉 그 당위성을 강도짓 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선순위에서 벗어나서 망각 속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이 자존의 절대 정당함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가운데서의 구원은 상대적 여지가 있다는 차원에서의 한 언급이라는 판단을 비로소 받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절대적 정당함의 인(印)쳐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고하심의 실제를 받아들이시는 가운데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가운데 증거자로 세움을 받은 자들의 증거하는 모습과 같이, 세상이 평안하다 평안하다고하는 살기 좋다고 하는 생각에만 임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들에게 주의 구원하심과 심판하심이 나타나고 있을 때에, 주와 함께하시며 주의 권고하심을 받으며 그에 따라 보내심을 받은 자들로서의 귀한 종들로서의 사역을 잘 감당하시며 잘했다 칭찬하시는 자리에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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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9월 08, 2004

하나님은 포도원지기가 되심이시라

2004년 9월 7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사27:1-13
하나님은 포도원지기가 되심이시라

번화한 시내가 아닌 시골 초등학교에는 학교 내에 작은 정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한 세대 전에는 ‘아주까리’라는 식물을 밭과 같이 재배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방과 후에 친구들과 함께 그곳에 떨어진 가지들이나 바람에 날려 들어온 것들을 주워서 소각장에 버리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한 포도원에 대한 지기로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포도원은 주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심과 동일한 언급에서 주목되어지는데 그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7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2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날이라고 함의 종말에 있게 되어지는 말씀을 하시는데 1절에서는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실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에 주의 백성 된 자들이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할 것과 하나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되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포도원에 노함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후일에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그 결실로 지면에 채울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7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께서 적당히 주의 백성을 견책하심과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 죄를 없이함을 얻을 결과로 인함인데, 그것은 아세라와 태양상(incense altar, sun-pillar)으로 다시 서지 못하게 함에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견고한 성읍은 적막하고 송아지가 거기 먹고 누우며 그 나뭇가지를 먹어없이할 것과 가지가 마르면 꺾이는데 여인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자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실 것과 은혜를 베풀지 않으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과 13절의 말씀에서는 주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날에 창일하는 하수에서부터 애굽시내까지 과실을 떠는 것과 같이 그들을 일일이 모으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앗수르 땅에서 파멸케 된 자와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가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경배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 23장 두로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하시고 있고 이어서 24장에서는 대 환란에 대한 예언을 하시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기반에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되어짐을 기도하는 자들의 모습으로써의 교회의 모습이 예언되어지고 있고 그 환란이라고 하는 것이 해와 달의 소임이 부끄러움을 말하는 악한 세대에서 비롯되어지는 환란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에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종말의 때에 야곱의 족속이 속함을 받는 다는 것이(9절), 자격 없는 자들이 들어감이 가히 침범하는 것으로 현실적인실제의 판단을 받지만 하나님으로부터의 믿음을 통한 재가라는 차원에서 합당한 천국에 들어감이, ‘하나님나라는 침노함을 당한다’(마 11:12)고 하신 말씀과 유비되어지며 특히 주님이 비유하신 포도원비유(눅 13:6~9), 포도원주인에게 간구하는 일하는 자로서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분의 언급(3절), 여기서 정황적인 일상적 예를 들면서도 구약의 말씀하신 바와 관련되어진 오히려 그러한 것이 일상적인 것에서의 핑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는 것을 주목합니다. 이것은 상황 신학적 개념의 정황적 타당성 요구라고 함이 이미 부인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게 되어지며 아세라와 태양상(incense altar, sun-pillar)으로 다시 서지 못하게 함에 있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이 주의 구속하심의 관건적인 증거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사 27:9)

이것은 아세라 상과 태양상은 모두 가나안 족속의 신상들이며 이미 그들이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는 존재들로써 부정되어진 존재들입니다. 특히 아세라는 풍요에 대한 신의 의미로써 물질적 개념만으로써의 실재관을 주장하며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전제와 사상을 말하는 것이며 태양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 시와 연한을 이루라고 하신 태양의 시간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말하는 자들의 중심과 사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시간관 역사관이라고 하는 것을 임의적으로 말해서 역사를 왜곡하고 그리고 예수님의 역사적 자기 계시라고 함의 실존의 확실성을 어디서 찾겠느냐는 반문으로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리에 서고자 하는 자들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오래되어진 사람들의 기본적인 전제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으시고 말씀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하고 증거할 때에 그러한 상대적이라는 개념의 부인이라고 함의 판단을 넘어서서 예수님의 구주이심에 대한 정당함에 따른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아세라와 태양상(incense altar, sun-pillar)으로 다시 서지 못하게 함에 있다’라고 말씀하심을 받드는 것임을 주목합니다.

더욱 그들의 모습은 즉 물질적인 실재관과 그에 따른 실제관, 그리고 역사인식의 임의적 판단과 규정에 따른 역사적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을 부인하는 자들의 모습은 역시 상대적인 보편적 당위성만 있을 뿐이기 때문에 절대의 재가를 받고 자기 정당함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구원하심을 마음에 두지 않는 가운데서는 그들의 그러한 증거가 사실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들의 지각이 없으므로 은혜를 베푸심을 받지 못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신들의 존재와 증거의 사실의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고 있고 그렇게 행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운데서 합당한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서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엡 5:16, 골 4:5) 이것은 시간관념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없이는 그 실제를 알지 못하며 그 말씀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인터넷이라는 매체에서 느끼는 시간관과 현실적인 시간관의 차이라고 함은 많은 사회적 충격을 낳고 있고 우리의 일상적인 시간인식을 맹목적으로 고수하는 보수적 입장은 그 시간이라고 함을 우상화 시키는 자리에 넘어지게 되고 또한 임의적인 시간 개념을 도입해서 일상적인 시간을 비판하며 일상적인 역사 속에 자신을 계시하신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에 대한 것을 비판하는 자들도 있는데 이들은 역시 태양 기둥이라고 표현되어지는 태양상(incense altar, sun-pillar)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들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금기행위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는 자들로서 분별 있게 행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일상적인 역사적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자가 진정으로 이러한 우상에서 벗어나며 간교한 뱀의 죄의 유혹을 벗어나며 하나님의 약속의 정당함을 믿는 자들로서 야곱의 택하신 반열, 아브라함과 야곱의 하나님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세계의 시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시간에 대한 정당성 시비와 일상적인 우리의 시간과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동행하시는 가운데서 세월을 아끼며 시대를 분별하시는 종들로써 자존의 하나님께 세세토록 경배하시게 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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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9월 02, 2004

심령의 매임을 받아

2004년 9월 1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20:13-38
심령의 매임을 받아

우리 인생이 삶을 경영하면서, 마음에 꺼리는 것이 있을 수 있고 또, 마음에 두었던 어떤 일에 대하여서는 쉽게 잊지 않고 또한 기억하고 하고자 하는 의지와 동기를 가지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말한다고 하여도, 심령의 매임이라는 개념은 그것과 좀 다른 개념입니다.

꺼리는 것이나 또는 마음에 두었던 것은 그 당사자의 주권적 판단에서 의지적으로 행하거나 의지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정도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매임이라는 것은 그러한 주권적 판단이라고 함에서 의지적으로 용납하고자 하는 것 자체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마음에 둔다는 것 꺼린다는 것과 마음이 매인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달리 말할 수 있는 것으로 그야말로 용납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납득의 당위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적인 판단과 그에 따른 일반적인 개념에서의 매임을 생각할 때에,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심령의 매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36절에서 3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행전이 기자인 누가는 그와 함께한 일행과 바울의 만남이라고 하는 것을 약속하고 사도 바울은 그의 일정대로 행하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서 교회 장로들을 청하여서 첫날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가르친 것인지 알고 그 아는 바대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을 기억하도록 권면하며 자신은 심령이 매임 바 되어 예루살렘으로 가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하였음과 이후에는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권면하며 주 예수의 가르친 바로써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나음에 대한 것을 기억하도록 하였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36절에서 38절에서는 사도 바울과 에베소에서 온 장로들의 석별(惜別)의 정과 배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운데서 에베소에 있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그들과의 만남과 떠남에 있어서의 석별의 정과 또한 그들에게 언급한 부탁한 그 증거한 내용들을 주목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사람이 떠날 때에 하는 말은 진실 된 말이 되거나 아니면 마음에 없는 말을 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말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판단의 여부라는 것은 그가 떠나는 지금까지 행한 삶이라고 하는 것에서 판단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증거한 내용적 신실함이라고 하는 것이 그의 만남에 대한 청함에 장로들이 오게 되어짐과 석별의 아쉬움이라고 함을 나누는 자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의 장로들이 그 사도 바울을 배웅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사도 바울의 중심을 이해하고 있고 받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이 언급한 심령의 매인 바에 따른 행함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심령을, 영혼을 매게 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매임은 사도 바울의 행함이라고 함에 참으로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상식적인 측면에서만 말한다면 제기할 수 있는 이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던 것은 그의 믿음의 행함을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섭리로 그 섭리의 실제로 믿었던 것입니다.(행 16:10 참고) 이것은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상대적으로도 자신의 절대의 뜻하심의 실제로 말씀하심을 믿음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와 비교되어지는 것은 아브라함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하실 때에 그것을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순종의 그 의로움은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음에 대한 의로움이었습니다.(창 15:6)

여호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자존하시는 자의 자기 정당함 절대 자기 정당함에서 말씀하심에서 그 실재를 분별하며 실제를 말할 수 있음에 대한 정당함을 따라서 그는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의 당위성의 재고라는 것에 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정당함에서의 판단에 매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매임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인 실제의 매임으로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사도바울도 자존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그의 심령에 인도하심이라고 함의 실제를 믿었기에 그의 주의 뜻하심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그 환란이라고 함의 재고를 요청하는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의 실제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적 존재의 삶의 경영에서의 모습이 바로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쳤던 하나님의 주권적 가르침이 되어지며 사도 바울의 중심을 담아내어 가르쳤던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실한 바울의 주의 뜻하심을 바라볼 때에 에베소 장로들은 그 석별의 정이라고 함에서 그의 길을 만류하지 않았고 주의 뜻하심 안에서 절제할 수 있는 가운데서 성도의 교제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라고 하는 점은 에베소라는 뜻이 허락되어진, 인증되어진 재가가 있는 그러한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을 입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는 자들이 받아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심령의 매임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인 매임의 실제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과 오히려 그것을 판단하게 된다는 것을 받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현실적인 실제는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좋은 것이지만 그래서 받는 것을 마음에 두고 그것을 위한 주는 것을 주장하는 경우가 되어지지만 그러한 실제적인 것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실제를 진정으로 찾는다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도 복이 있다는 말씀하심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삯군들을 분별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원래 교회의 종들은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섬김을 받는 것이 기업으로 되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존재를 주장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주께로부터 자기 존재의 심령의 매임이라고 하는 것을 자신의 실존의 당위성으로 찾는 것이 성도를 섬기는 종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물질이 없음에 대한 것의 재고적인 실제라는 것을 마음에 두면서 그것이 실제적 기준이 된다면 그것은 삯군으로서 나타날 것임을 분별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마태복음 1장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함을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어지는데 그 아브라함은 셈족이었습니다. 셈족의 특성은 이름이라는 족속의 특성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판단을 하게 되어지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주께서도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를 이루는 자는 바로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에서 분별되어질 수 있는 것이 현실적인 상대적 판단이라고 함의 판단을 받지 아니하며 오히려 그것을 판단한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로서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심령에 매임을 받았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도 자존의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정당함을 따라서 실제를 분별하는 것이 진정한 사실임을 깨닫고 주의 말씀하심을 따르는 가운데서 현실적인 매임에서 자유하며 진정한 자유로써 주의 뜻하심에 매임 속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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