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9월 16, 2004

경건의 실상 이해

2004년 9월 15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21:17-40
경건의 실상 이해

무엇이 경건인가? 라는 질문에서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경건을 정의하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이교적 차원에서 흔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것에 대한 여파와 분쟁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한 것이며 상식을 초월하는 것을 당연시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물론 상식을 초월하면 모두 신앙과 경건의 실체인가 라는 질문과 비평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우리 기독교는 어떤 경건의 실상을 말씀하시고 있는지를 주목함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7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7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7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이방을 다녀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게 되는데 그곳에 장로들이 그를 맞고 바울은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고 저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그곳의 장로들이 사도 바울에 대한 오해로써 모세의 율법을 페하는 자라는 그러한 오명과 그러한 인식이 잘못된 것으로 서원하는 자와 함께함으로써 율법준수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구하고 있고 사도 바울은 그대로 행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7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이레가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충동시켜 임의적으로 사도 바울을 해석하고 그를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가는데 천부장의 군대가 그들을 말리고 바울을 두 쇠사슬로 결박하고 그 이유를 물으니 그 실상을 알 수 없음을 인하여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 가도록 명하고 있고 유대인들이 그를 없이 하고자 외치며 따라가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37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바울을 데리고 영문으로 들어갈 그 때에 사도 바울이 천부장에게 자신이 유대인이며 길리기아 다소사람임을 말하고 히브리인들에게 말하기를 구함에 있어서 천부장이 허락하고 사도 바울이 백성에게 손짓하며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본문에 기록되어지고 있는 유대인들의 경건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고 그 결과 그들의 증거는 어떤 실제적 모습과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과 또 하나는 그러한 경건의 이해는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구교를 비롯하여 지금의 예루살렘의 이해적인 견해의 차이로 분쟁을 이루고 있는 자들의 모습이 상관성이 있음과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경건의 흐름이라고 함의 실제가 사도바울의 증거를 통하여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이 세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에 메이지 않으면서도 진정한 율법적 실재와 사실과 그것의 준행에 대하여서 그 중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아직 이해하지 못한 예루살렘의 장로들을 비롯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율법관에 동의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라도 보여주기를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유대인들의 율법관은 그 실재의 정당함을 잃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의 실제적인 성례전적인 것이 다 완성되었음에 대한 것을 받지 않음과 오히려 그것을 주장한다는 것에 그러한 입장의 정당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행함에 동의하여 준 것은 마지못해서 행함이라는 것이라는 이미지만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양보를 한 것같이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이미지 승부수를 띠운 것이 아니라 율법의 실제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세상의 우상이라고 함의 실존이라고 함을 부인한 것과 같이 율법이라고 함이 성도를 묶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 가운데서 형제들의 연약함을 받는다는 차원의 행함인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형제들의 연약함을 받는 것으로써의 사랑이라고 함의 새 율법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일한 표현의 다른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다른 중심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정당한 것이냐는 질문이 있어야 하는데 사도 바울은 그 질문적 정당함을 하나님으로부터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실재관은 잘못된 것입니다. 즉 그들의 율법이라고 함의 완전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거룩함이 있는 것과 그것으로 상대방을 정죄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한다는 것이 잘못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 헬라인과 같이 들어감에 대하여서 지역적인 구역의 거룩함을 말하는 자들의 모습, 어떤 특정장소만의 거룩함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것 상대적 구별성을 말하고 있지 하나님으로부터의 구별적 정당함에서 비로소 있게 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바로 헬라인으로써 군대 천부장이 들어보았을 때에 실상을 알 수 없는 말들로써 그 능력을 상실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행 21:34)

그러한 가운데서 육신적으로 메인 사도바울의 권위라고 함이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말씀하실 수 있는 권세가 그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다른 부분에서 복음을 핑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과 같이 그 능력이라고 함이 있어서 듣도록 하시며 그 주의 양들이 들을 수 있는 주의 음성을 담아내게 하시는 권세로 임하신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경건 경건의 능력을 잃은 것은 바로 율법의 행함의 완전성과 충족성에서 거룩을 말하고 있고 그 가운데서 전도자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자들의 모습 오늘날 결과주의적인 개념의 신앙의 모습들 성과주의적 신앙의 판단과 정체성을 말하는 자들의 모습이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잘못된 경건의 모습은 어떤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어진 경건과 거룩을 말하는 사람들 즉 자신들만이 보편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오늘날에 있어서는 여기 구 카돌릭이 포함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땅에 거룩한 장소(holy land)가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그곳을 점령함이 하나님의 나라 신의 나라를 성취하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그것으로 상업화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경건의 판단이 실제로 성립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사도바울의 매임에도 불구하고 주의 복음이 전파되어질 수 있는 권세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친 그 하나님의 주권적 정당함에서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이 진정한 경건의 사실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지난번에서는 아레오바고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사도 바울을 고소하지 못하였던 것과 이번에는 사도 바울을 결박했으나 그 증거적 사역의 기회를 줌에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하도록 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은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른 증거적 실제에서 비롯되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 경건이라고 함의 이해를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 포학함이라고 하는 것이 상식을 넘어서서 현실적인 고통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중동의 사태라고 하는 것과 그 테러리즘이라고 하는 것은 경건의 사실이해의 차이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시대의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하심의 실제에서 경건의 사실을 말하는 가운데서 진정한 경건의 실상을 배우며 경건의 확신이라고 함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주의 뜻하심의 합당한 종들로서의 사역을 잘 감당하시는 가운데, 경건의 실상을 말하며 믿으며 증거하시는 가운데서, 주님의 길을 잘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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