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9월 28, 2004

데나리온 하나

2004년 9월 26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20:19-26
데나리온 하나

역사적으로 소피스트들이나 여러 변론술을 배운 자들의 기본적인 기술적 역량은 파라독스(paradox)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잘 이용하여서 자신들의 의견의 일관성을 이루어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달려있었던 것입니다.

파라독스(paradox)라는 것은 방패와 창이 공존하는 것과 같이 어떤 결과를 상대적으로 예측하는데는 여러 가지 여지가 있어서 혼란스러운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모순(矛盾)이라는 말이 그러한 말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것에 있어서 그 사고와 그 합리성의 방향성을 나타낼 수 있는 시작점이 되어질 수도 있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변론가들은 고대로부터 사용하여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변론술 자체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비판적 또는 변론적 정당함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는 그러한 변론적인 것을 통하여서도 증거되어질 수 있으며, 주 예수님의 그 뜻하심이라고 함의 정당함이 상대적으로도 핑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로마의 한 병사의 일일 급여와 자유농원의 일일 임금으로 통용되어지던 데나리온을 가져오라고 하시며 말씀하시는 주님 예수님의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9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3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 자신들에 관한 심판의 말씀으로 인식되어짐을 깨닫고 예수님을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여 엿보다가 예수님을 총독의 치리와 권세아래 붙이려고 하여 정탐을 보내어 그들로 예수님의 말을 책잡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질문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데나리온 하나를 주께 보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는 그 질문하심과 그들의 가이사의 것이라고 함을 말함에 따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심의 답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 가져오라고 하신 데나리온 하나와 그곳에 쓰여진 화상이라고 함의 의미에서 그 당위성을 인식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의 정당함을 따른 실체적 삶과 삶의 형식을 이해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이라고 함을 먼저 기억하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서 무슨 권세로 행하느냐는 그러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들의 변론에 있어서, 결국 그렇게 질문하는 자들의 악함이라고 함이 판단되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으로 성경에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음에 대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은 그 당시 상식적인 면에서도 핑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의도함을 일관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상식적인 생각이라고 함에서 파라독스(paradox) 즉 모순을 찾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모순에서 자신들의 말의 합리성이라고 함의 일관성으로 자신들의 뜻한바 즉 예수님을 부인하려고 하는 정치적 올무를 씌워 없이하고자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파라독스, 모순이라고 함에 있어서 가장 일상적인 것으로써의 개체로 인식되어지는 그 당시 일일 노동에 해당하는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주목하도록 하신 말씀은 그 데나리온에 새겨진 ‘화상과 글’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화폐의 통용적 당위성이 로마의 가이사의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가이사의 정치적 정당함을 가지는 가운데서의 통용되어지는 것으로써 사용적 타당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 보내진 자의 입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타당성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질서 즉 하나님 나라의 통치적 질서라고 함에서의 실제적인 것도 있음과 상대적인 입장에서는 그러한 것도 인정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차원이 다른 문제가 항상 모순으로써 매여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과 과 임의적인 일방적인 것으로 해석함에 있어서는 그 또한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나라의 본질적 정체성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의 정당함을 얻는 세상나라의 질서의 일상적 실존의 정당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질서와 그것의 성립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면서 허락하시는 가운데서의 실존하게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이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경우에는 그 나라의 질서적 실제의 문제는 존중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당위성에 대한 그 합리성 시비를 말한다고 할 때에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자기 절대 정당함을 통하여서 세우시는 교회의 질서적 정당함과 보편성의 실제를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와 세상에서의 상대적 보편성에 있어서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데나리온 하나에 담겨진 것을 주목하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림의 실제적 정당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먼저 분명히 하게 되어지는 것은 세상의 현실의 모순적인, 비합리성으로 보이는 것을 다루는 철학들이라고 함의 변론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성립되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을 때에는 일반적인 생철학의 정당함을 따를 수 있고 변론적 증거의 실제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벧전 3:15)

그리고 주님이 데나리온 하나를 주목하도록 하신 것은 우리의 일일 노동과 같은 우리의 하루하루에서의 가치를 통하여서 하나님나라의 그 증거적 삶이 되어야 할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마음에 드는 품꾼으로서의 하루하루의 증거를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예비하시는 종들로서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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