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1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20:13-38
심령의 매임을 받아
우리 인생이 삶을 경영하면서, 마음에 꺼리는 것이 있을 수 있고 또, 마음에 두었던 어떤 일에 대하여서는 쉽게 잊지 않고 또한 기억하고 하고자 하는 의지와 동기를 가지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말한다고 하여도, 심령의 매임이라는 개념은 그것과 좀 다른 개념입니다.
꺼리는 것이나 또는 마음에 두었던 것은 그 당사자의 주권적 판단에서 의지적으로 행하거나 의지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정도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매임이라는 것은 그러한 주권적 판단이라고 함에서 의지적으로 용납하고자 하는 것 자체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마음에 둔다는 것 꺼린다는 것과 마음이 매인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달리 말할 수 있는 것으로 그야말로 용납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납득의 당위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적인 판단과 그에 따른 일반적인 개념에서의 매임을 생각할 때에,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심령의 매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36절에서 3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행전이 기자인 누가는 그와 함께한 일행과 바울의 만남이라고 하는 것을 약속하고 사도 바울은 그의 일정대로 행하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서 교회 장로들을 청하여서 첫날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가르친 것인지 알고 그 아는 바대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을 기억하도록 권면하며 자신은 심령이 매임 바 되어 예루살렘으로 가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하였음과 이후에는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권면하며 주 예수의 가르친 바로써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나음에 대한 것을 기억하도록 하였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36절에서 38절에서는 사도 바울과 에베소에서 온 장로들의 석별(惜別)의 정과 배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운데서 에베소에 있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그들과의 만남과 떠남에 있어서의 석별의 정과 또한 그들에게 언급한 부탁한 그 증거한 내용들을 주목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사람이 떠날 때에 하는 말은 진실 된 말이 되거나 아니면 마음에 없는 말을 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말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판단의 여부라는 것은 그가 떠나는 지금까지 행한 삶이라고 하는 것에서 판단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증거한 내용적 신실함이라고 하는 것이 그의 만남에 대한 청함에 장로들이 오게 되어짐과 석별의 아쉬움이라고 함을 나누는 자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의 장로들이 그 사도 바울을 배웅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사도 바울의 중심을 이해하고 있고 받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이 언급한 심령의 매인 바에 따른 행함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심령을, 영혼을 매게 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매임은 사도 바울의 행함이라고 함에 참으로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상식적인 측면에서만 말한다면 제기할 수 있는 이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던 것은 그의 믿음의 행함을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섭리로 그 섭리의 실제로 믿었던 것입니다.(행 16:10 참고) 이것은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상대적으로도 자신의 절대의 뜻하심의 실제로 말씀하심을 믿음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와 비교되어지는 것은 아브라함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하실 때에 그것을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순종의 그 의로움은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음에 대한 의로움이었습니다.(창 15:6)
여호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자존하시는 자의 자기 정당함 절대 자기 정당함에서 말씀하심에서 그 실재를 분별하며 실제를 말할 수 있음에 대한 정당함을 따라서 그는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의 당위성의 재고라는 것에 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정당함에서의 판단에 매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매임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인 실제의 매임으로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사도바울도 자존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그의 심령에 인도하심이라고 함의 실제를 믿었기에 그의 주의 뜻하심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그 환란이라고 함의 재고를 요청하는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의 실제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적 존재의 삶의 경영에서의 모습이 바로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쳤던 하나님의 주권적 가르침이 되어지며 사도 바울의 중심을 담아내어 가르쳤던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실한 바울의 주의 뜻하심을 바라볼 때에 에베소 장로들은 그 석별의 정이라고 함에서 그의 길을 만류하지 않았고 주의 뜻하심 안에서 절제할 수 있는 가운데서 성도의 교제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라고 하는 점은 에베소라는 뜻이 허락되어진, 인증되어진 재가가 있는 그러한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을 입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는 자들이 받아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심령의 매임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인 매임의 실제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과 오히려 그것을 판단하게 된다는 것을 받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현실적인 실제는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좋은 것이지만 그래서 받는 것을 마음에 두고 그것을 위한 주는 것을 주장하는 경우가 되어지지만 그러한 실제적인 것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실제를 진정으로 찾는다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도 복이 있다는 말씀하심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삯군들을 분별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원래 교회의 종들은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섬김을 받는 것이 기업으로 되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존재를 주장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주께로부터 자기 존재의 심령의 매임이라고 하는 것을 자신의 실존의 당위성으로 찾는 것이 성도를 섬기는 종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물질이 없음에 대한 것의 재고적인 실제라는 것을 마음에 두면서 그것이 실제적 기준이 된다면 그것은 삯군으로서 나타날 것임을 분별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마태복음 1장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함을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어지는데 그 아브라함은 셈족이었습니다. 셈족의 특성은 이름이라는 족속의 특성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판단을 하게 되어지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주께서도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를 이루는 자는 바로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에서 분별되어질 수 있는 것이 현실적인 상대적 판단이라고 함의 판단을 받지 아니하며 오히려 그것을 판단한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로서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심령에 매임을 받았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도 자존의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정당함을 따라서 실제를 분별하는 것이 진정한 사실임을 깨닫고 주의 말씀하심을 따르는 가운데서 현실적인 매임에서 자유하며 진정한 자유로써 주의 뜻하심에 매임 속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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