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8월 30, 2004

주여 보기 원하나이다

2004년 8월 29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8:18-43
주여 보기 원하나이다


눈으로 본다는 즐거움이라고 함을 앞서는 중요함은 눈으로 봄과 관련되어진 것으로써의 자신의 존재를 의식해야 하는 당위성의 직면함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디에 자신의 존재가 있어야 하는지 그것을 놓고 그 방법이라고 함을 고민할 때에 눈으로 들어오는 화려함과 아름다움보다는 자신의 존재의 있어야할 곳을 찾을 수 있는 것을 보는 관점과 그 자체의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답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번화가에 처음으로 와서 본 사람은 그 눈으로 들어오는 화려함과 즐거움이 한시적으로 그를 매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차도 많고 사람도 많고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들 형형색색의 감판 높은 건물들 그 문화적 신선함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지만, 잠시 후 그것은 문화적 충격으로 인식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러한 전반적인 우리 인생의 모습과 정체성의 혼돈 속에서 기도하며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주께서 말씀하심이 누가복음 18장 전반적인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 말씀 중에 과부의 간구함을 그리고 관원의 영생을 얻음에 대한 질문과 여리고의 한 소경의 외침과 은혜 받음에 대한 것을 주목하는데 후자의 두 가지 즉, 관원의 질문과 소경의 기도에 대하여서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8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1절에서 4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어떤 관원이 예수님께 자신이 무엇을 행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율법적인 행함의 정도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시니 그러한 정도로써는 항상 남은 여지의 행함의 충족성을 채우지 못함에 대한 것을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물질적인 구제의 완전함으로 말씀하심에 그 사람이 부자인 고로 근심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주의 말씀에서는 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감의 어려움을 말씀하심에 사람들은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의 질문을 하는데 주께서는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1절에서 4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그 올라가심이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게 될 것으로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 받고 침 뱉음을 받겠고 저희는 채찍질하여 죽일 것임과 인자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심에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여리고에 가까이 올 때에 한소경이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것의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침과 그것을 들은 앞서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 소경은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임을 믿는 믿음으로 봄에 대한 주의 은혜를 구할 때에 주님은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고 많은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관원의 관점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에 안티적 개념, 즉 상대적 개념의 제자들의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주의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점입니다.(34절 참고)

그리고 이어지는 여리고의 소경의 믿음의 간구라고 함이 세상에 간구하는 자들의 믿음을 볼 수 없는 회의적인 모습 속에서도 주의 은혜에 따른 실제를 말하는 믿음의 실존을 볼 수 있게 됨과 그것이 그 가진 자의 구원을 이루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 누가복음 18장은 인생이 기도하며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것에서 그 기도라고 하는 것의 형태가 지속되어짐을 말씀하시면서도 그 기도가 믿음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인데 그 믿음의 정체성을 말하는 자들이 적다는 것을 말씀하시고(8절), 주의 주시는 믿음(42절) 안에서 주의 구원을 얻게 되어지며 그들의 인생의 낙심치 않고 기도하는 자들로써의 증거적 삶을 살 것을 말씀하신다는 전반적인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관원은 행함과 물질이라는 자신의 임의적인 관점으로써 하나님의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판단하고 얻을 수 있다는 생각과 그것의 검증을 위한 주께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함의 완전성과 물질적 소유의 정도의 충족성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판단하며 수여받을 수 있는 것으로써의 의미와 실제를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에 그는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제자들은 그것의 상대적인 측면 즉 자신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름에 대한 것으로 여전히 물질이라는 것과 소유와 그 영광이라고 하는 것의 정도적 판단이라고 함의 범주를 넘지 못하는 것들로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것으로써 상대적인 것이라는 형태적 동일한 판단을 받을 수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주님을 위해 노력한 것이 상대적인 차이로 실제적인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재가가 있게 되어진 것으로써의 상대적인 차이의 실제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임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이 여리고 소경의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여지로써의 권위를 말할 수 있는 자들 즉 앞서 가는 자들의 모습에서는 다윗의 자손으로써 오신 메시아 예수그리스도로부터 그 존재의 정당함을 돌아봐주시며 인(印)쳐주실 것을 구하고 있는 것을 위해 소경의 간구가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라고 함에 있어서 함부로 일축하는 분별없는 이성들의 임의적인 권위의식들이 있지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마 1:1) 안에서의 자기 자신의 존재적 정당함을 찾으며 그 정당함의 실제적 의식과 그 시각으로 보기를 구할 때에 진정으로 주의 뜻하심을 보며 주님을 따를 수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에서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께서 하나님 아들이시며 자신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과 우리의 존재를 의롭다 하심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관점이라고 하는 것의 다양성이 있다고 하여서 그러한 것을 임의적으로 따를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주의 말씀하신 것을 따르는 관점, 그 말씀하신 언약 즉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 그 중심과 관점이 진정한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가운데서 낙심하지 않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달려갈 수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낸 예수 임의적인 예수에 대하여서 말하고 있고 자신들의 입장에서 삼위일체를 비존재(non-being), 무성(nothingness)이라는 개념에서 조작하고 한 영역에 가두어둘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소경된 자들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역사적인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며 자존하시는 하나님 그 이름의 실제적 정당함을 따르는 것이 셈족으로써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실제적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옳은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주의 구원의 기쁨과 하나님을 세세토록 찬송함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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