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 18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19:11-41
바울이 전하는 예수
우리가 일상적인 측면에서 ‘패러디’문화에 대하여서 상당히 주목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고 그러한 패러디 문화는 상대적으로도 그 원제의 상관성이라고 하는 것에 민감한 것으로써 자체적 문화형식을 가출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패러디라는 말은 특정 작품의 소재나 작가의 문체를 흉내 내어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수법. 또는 그런 작품을 말하는데, 그것은 그 원제로써의 소재나 작가의 실존적 정당함을 부인하거나 훼손하게 하는 범위에서는 용납되어지지 않는 당위성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훼손의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다른 어떤 보완적 당위성이 있어서 용납되어지는 경우는 있지만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러한 패러디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빙자’의 개념으로써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증거를 빙자하고 있는데, 그들의 부당함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이 최대의 거짓의 실제라고 함과 그리고 그러한 것이 자기 정당함을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며 바울의 증거로써의 예수그리스도 구주의 사실증거에 대한 증거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1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1절에서 4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바울로 하여금 희한한 능력을 행하게 하시는데 그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자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가 나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마술하는 유대인이 시험적으로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악귀 들린 자에게 명하는 것이 기록되어졌고 한 유대의 제사장 아들 ‘스게와’도 이 일을 하는데 악귀가 대답하여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는 질문과 함께 그들에게 뛰어 올라 억제함에 그들이 도망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서 에베소에 거하는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며,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모아 불사르는 것과 같은 일이 있었으며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음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1절에서 4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선 이러한 일이 있고 난 다음에 에베소에 소요가 있었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에베소 사람들의 인위적인 신 에베소 여신을 인해서 그들의 실리를 추구하던 자들이 바울이 전하는 바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라는 증거’에 자신들의 실리를 변호하기 위한 소요를 일으켰지만 그 내용적 기반이라고 하는 것의 당위성을 가지지 못하여서 그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도 불법집회의 성격이라고 함에 있어서 고민하며 그 모임을 자체적으로 흩어지게 됨을 주목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예수님을 빙자하여서 자신들의 실리를 추구하는 거짓된 모습들의 정체성이 자체적으로 성립되어지지 못하는 것과 그들의 거짓됨과 악함이라고 함이 예수그리스도 구주를 믿는 복음을 핑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함의 증거가 될 수밖에 없음에 대한 당위성으로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희한한 능력을 행하시게 하셨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일반적인 성도들의 삶 속에서 귀결적으로 나타나야만 한다는 당위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주권적으로 사도적 사역의 실제적 감당함을 위한 것으로써 은혜를 베푸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필요라고 하는 것,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한 육신적 필요라고 함의 충족성을 상식적인 것을 벗어나서도 추구하고 싶은 것을 만족하겠다고 본문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판단하심의 증거를 인위적으로써 풀게 되는 것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도 증거하는 인위적 실리적 판단으로 일관하고 있음의 판단에 속하는 것이라고 함을 먼저 지적해둡니다.
그럼 단정한 것과 같이 주 하나님의 주권적 뜻하심으로써 그 사도로써의 사역적 정당함을 위한 능력의 배분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 당위성을 어떻게 증거하겠는가 하는 질문에 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범신적 개념 막연한 모습의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인 초월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지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분명한 사실로써의 구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함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상대적인 초월이라고 하는, 즉 상식적인 개념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신성이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그러한 경향은 마술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지는 잘못과 의도적인 그러한 잘못된 판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분명한 하나님의 증거적 사실임을 말해야 하는 사도의 증거적 사역의 완성을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사도 바울의 희한한 능력을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한 상대적 차이의 마술의 세계로 보는 가운데서 더 깊은 마술의 세계와 초자연적인 개념을 인위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마술의 세계적 개념과 그것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배를 체우는 것과 같은 자리에 서고자 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도록 허락하심이 어떤 마술사와 스게와의 아들들의 모습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악귀들의 귀찮음에 따른 그들의 거부로 인하여서 결국 그들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는 것으로써 그들 자체적 정당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많은 마술책들을 불살라버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술이라고 하는 개념이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비상식적인 개념이 항상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들의 인식의 전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소요에 대하여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이미 바울을 잡으려고 했던 어떤 귀신들린 자를 이용해서 이득을 보던 자가 바울을 빌립보 감옥에 수감되도록 하였다가 풀려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은 것은 하나의 판례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서 이제 아데미의 우상의 전각에서의 사람이 만든 신은 진짜가 아니라는 그러한 사실을 실리적인 측면에서 말하려고 하는 가운데 그 당위성이 이미 판례적으로나 기본적인 판단에서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미 팔레스타인 지역을 식민지화 하고 있는 로마의 그리스 신들의 알지 못하는 신들의 묘비를 보게 되고 그것들에 대하여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증거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를 하는 가운데 아무도 그 증거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과 판단을 할 수 없었고 또한 그들 자신들의 믿지 못함에 대한 당위성을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앞서 말한 귀신들린 자의 소송이 기각되어진 것으로의 판례와 지금 본문에 기록되어진 그 사도 바울의 증거 즉, 인간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라는 개념에 대한 반론적 정당함이 없는 가운데서 집회를 가지고 이익단체적인 정치쟁점이라고 하는 것은 로마로서는 그 정당함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부여하고자 하는 중심도 없는 것입니다. 더욱 현실적인 실제적 문제로써 거론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는, 민회라고 하는 그러한 법적질서를 따르지 않는 가운데서는, 오히려 불법집회의 판단을 받아야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실리를 위해서 알지 못하는 신들 인간이 만들어 낸 신(神)들을 말한다는 것은 참된 하나님을 패러디 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고 이것은 어떠한 상대적 당위성이 있다고 하여도 절대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정당함을 부인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으로 그 자존하시는 절대자의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를 만들어 내고 있는 근간으로써 신들이라고 하는 초자연적 존재의 상상과 그 상상 매개체는 이미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의 판단을 받으며 벌을 받으며 그들의 존재와 함께한 자들이 동일하게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하는 ‘애굽의 신들에 벌을 내리라’(출 12:12)고 하심의 의미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분별력 없이 진짜 신이 어떤 신인지 알지 못하고 힘에 눌려 신으로 받는 무당들을 살려두지 말라고 하심은 죽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의 모습과 그것의 종노릇하는 자들로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다른 이들을 찾으며 그들로부터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 그 정당함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살기 위한 노력들은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 자체가 모든 기준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존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것에서 우리의 실존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음의 사실을 기억할 때에 애굽의 신들을 벗어나서 자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은혜에서 우리의 실존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증거하는 예수님인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예수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존재를 의롭다 하신 주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4:25)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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