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 6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사20:1-6
벗은 몸과 벗은 발
서양의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에서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그러한 내용의 동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허영이 있는 왕에게 불의한 신하들과 재단사가 속여서 투명한 옷을 입게 만들고 거리를 활보하게 하는 것과 같은 내용이 됩니다.
이와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다른 말씀이면서도 형태적인 측면의 동일한 표현이 가능한 말씀을 대하게 된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벗은 몸 벗은 발로 행하면서 예언하도록 하심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증거의 내용과 그 뜻하심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앗수르 왕 사르곤이 군대 장관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로 하여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며 애굽과 구스에 대한 예표와 기적이 되게 하심에 대한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애굽의 포로됨과 구스의 포로로써 잡혀감에 그들의 수치가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 해변 거민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이 믿던 나라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할 것인가 하는 반문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이러한 본문을 주목하면서 본문의 문맥의 흐름이라고 함을 먼저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이사야 19장에서는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의 복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애굽인들 중에서도 회개하여서 주님께 돌아옴에 대한 은혜가 메시아 안에서 있을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애굽과 구스의 사로잡힌 것과 그들의 수치라고 함, 벌거벗음에 대한 것을 지적하심을 말씀하시고 있고 또한 그것을 예언하는 이사야의 벗은 몸과 벗은 발의 행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이사야의 벌거벗음에 대하여서 주목해보면 실제적으로 실오라기 하나도 안 걸친 모습으로 예언하였다고 함을 말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상대적인 충족성이라고 함으로써 그 사실을 말씀하셔야만 하는 분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대적인 측면에서의 보편성을 추구한다면 실오라기 하나라도 없는 상태가 완전한 벗은 몸으로써 상대방에게 증거적 납득을 말할 수 있다고 하겠지만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은 그러한 판단의 강요의 실제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치스런 그리고 음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러한 가운데서 오히려 증거적 실제의 모습이 나타나는 불의함을 무릅쓰고 완전한 나체의 선지자를 말씀하시지 않으신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육과 그 가르침을 위해서 나타날 때에 치부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벗은 모습으로 전체 벌거벗은 자들의 존재적 비참함을 증거하도록 하심의 뜻하심과 그 사실을 말하도록 선지자를 주장하셨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혐오스러움이라고 하는 것이란 뜻에 있어서도 칼빈이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할례가 오히려 더 수치와 혐오를 말할 수 있는데 그 벗음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혐오의 상대적 배척의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임의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옷을 벗음에 대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지만 주의 뜻하심에서 벗음은 그 사역적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과 살기 위해서라는 그러한 개념으로써 또는 정욕적인 개념을 위한 합리성으로서 성경에서 선지자의 벗음이라고 하는 것을 흉내 내는 것은 하나님의 선지자적 개념이 요한의 때까지라는 말씀하심에서와 같이 다시 그러한 계시를 오늘날에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의 벗음을 색욕과 같이 생각하는 것에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오용하는 자들도 역시 하나님의 뜻하심과 그의 주권적 판단을 임의적으로 말함에 그들의 인용하는 성경은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증거로써 증거적인 모습에 대한 것과 이제는 그 증거의 내용을 살펴보면, 애굽과 함께 구스가 거론되어지는 것은 애굽과 동맹적인 입장을 취한 것에 대한 것으로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즉 애굽과 같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하는 자들의 편에 서는 자들의 받을 모습이 애굽과 동일할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은 함의 자손으로써 형제들의 종이 되기 원한다는 노아를 통한 언약하심에서의 저주의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자의 모습이 그의 정체성입니다. 애굽은 함의 아들 미즈라임인데 이 히브리어가 애굽 이집트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언약의 밖에 사람들이 이미 언약을 받을 수 없는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메시아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그 중에서도 있을 것을 말씀하심이 이사야 19장의 말씀인데, 오늘 본문인 20장의 말씀에서는 그러면서도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정당함을 의지하지 않는 자들의 모습이 있을 것이며 그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주의 백성들을 미혹하게 되는 권세자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들은 그 존재가 부끄러운 자들로서 그 존재의 고민을 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출애굽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말이 하게 되고 분란을 일으켰으며 또한 이제 유다의 어려움이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가 되어질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에 있어서도 오히려 애굽을 의지하고 있는데 그들의 실상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존재의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이며 그들과 함께하는 자들도 역시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끄러움은 도덕적 비난정도의 것이 아니라 심판인 것입니다. 신약 누가복음 16장에 나타나고 있는 불 못에서 고민하는 부자의 모습과 그의 고민으로 표현되어지는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써 죄 가운데서 이미 죽을 수밖에 없었고 그 죽었던 자들이 하나님의 주시는 주권적 은혜로 주님께 나오는 은혜가 있게 되어지지만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하는 자들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그 존재가 불못에서 고민하게 되어지며 그 수치스러움이 상대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실제적인 것이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벗은 몸과 벗은 발로 증거한 것은 그 증거가 실존의 문제라고 하는 사실과 또한 전 인격적인 증거로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시대 세계2차대전이 있었던 이후에 실존의 문제는 사람들의 사상을 바꾸어 놓았고 그 고민으로 여러 가지 주관적인 논리의 비약이 있었지만 그처럼 실존의 고민이 죽는다는 것의 종노릇하는 곳에서 나오지 못한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이 예수 안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이 이사야의 실존적인 증거의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사야의 흉내와 같이 전인격적인 측면이라고 해서 옷을 벗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거짓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께서 주신 말씀 안에서 우리의 작은 삶에서의 진솔한 구주의 구원하심에 대한 증거를 할 때에 실존의 문제로 고민하는 자들을 충분히 인도하게 되어지는 은혜가 이미 성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작은 증거가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정당함을 따라서 나타나는 은혜가 있어서 주의 택한 백성들을 오게 하는 그러한 사역을 잘 감당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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