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8월 21, 2004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2004년 8월 8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7:1-19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우리가 부모로써 자녀들을 키울 때에, 언제 커서 제 구실할까 하는 그러한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어떤 시점에서는 훌쩍 다 자란 아이를 보게 되어지고 부모로써의 판단과 능력보다도 더 많은 능력들 달란트로 그들의 삶을 향유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한 것을 주목하면서 아이들의 자라남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것에 걸맞는 할 수 있는 능력들을 또한 선물로써, 주께서 가질 수 있도록 하심의 은혜로써, 주신다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또한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성경에서는 믿음의 성장과 성숙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아이들의 성장적인 의미와 전인격적인 측면에서 비교되어질 수 있도록 말씀하심을 주목합니다.(살후 1:3) 오늘본문에서도 사도들이 주님께 질문한 것으로써 ‘우리들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그러한 주께 구함이라고 함의 의미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1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실족케하는 일이 있을 수 있으나 그러한 실족케 하는 자는 화가 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화라고 하는 것에 비유적 말씀으로써 연자 맷돌을 작은 자중에 목에 메우고 바다에 떨어지게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나타시고 있습니다.

이에 주께서는 스스로 조심하되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루 일곱 번이라도 회개한다면 용서할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으로는 사도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린 것으로써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말에 주께서는 겨자씨 한 알과 그 능력으로써 뽕나무더러 바다에 심겨지도록 명할 수 있음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고 있고 종들이 받을 편의제공이라고 함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지적하셨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한 촌에 들어가시는데 문둥병자들의 외침에 주께서는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말씀하심과 그것을 순종한 자들 열이 모두 고침을 받았는데 한 사마리아인만이 주께 감사함에 그에게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음에 대한 말씀하심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형태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세 가지의 언급이 되어집니다. 즉 실족에 대하여, 겨자씨 믿음과 그 능력, 고침을 맏은 문둥병자, 등의 주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주목하게 되어지는 문맥적인 측면에서의 고찰은 이 모든 것이 믿음이라고 함과 관련되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더욱 믿음이라고 함의 정체성, 즉 어떤 것이 성경적인 믿음인가에 대하여서 잘못 알고 있는 부자와 그것에 대하여서 지적하는 아브라함의 대화에서 주목되어진 것과 같이(눅16장) 잘못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은 그들의 존재적 고민이라고 함과 위로가 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즉 실족이라고 함이 믿음으로 행하는 자들의 연약함에서 비롯되어지는 존재적 고민이라고 함이 부자의 잘못된 존재의 고민이라고 함과 구별되어지는 가운데서 그것에 대한 주의를 할 것을 말씀하심으로 본문 말씀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으로 행하는 가운데서 그 능력으로 그러한 불가능해 보이는 상대적 여지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사도들이 의식하고 질문하는 것이 바로 자신들에게 더하여지는 믿음의 필요성을 주 앞에 내놓고 긍휼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의 능력이라고 함이 실제적인 것인데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도 분별하는 자가 그 믿음의 능력으로 실족할 수 있는 곳에서 구원을 받게 되어지며 또한 존재의 진정한 위로를 받는 것임을 말씀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전반적인 측면에서 성경적인 믿음이라고 할 때에 그 실족할 수 있는 존재고민으로써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주의 말씀하심의 순종에서 그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좀더 주목하면 실족할 수 있는 가운데서 회개하는 자들이 주의 말씀 안에서 연약하다고 하여도 실제적으로 믿음으로 회개하면 그것을 상대적인 완고함으로 용서하지 못할 자리에 서지 말고 주의 말씀을 인해서 사과함에 대한 실제를 받을 수 있을 때에 형제들을 정죄하는 자리에 서지 않게 되어지며 그 형제의 실족함의 실제의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형제들의 회개라고 하는 것이 인위적이라고 함을 액면적으로 받아야만 하는 당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주의 말씀하심을 의지하여서 회개하는 것이 반복되어질 때에는 그것을 놓고 식상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위적으로 말하는 회개 주의 말씀을 따르는 믿음으로 하지 않는 회개를 받아야 하는 당위성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운데서는 그 회개의 실제들을 분별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의 필요성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주께서는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한 알의 겨자씨로서 말씀하심으로 그 유기체적인 성장에 따른 소산으로 대처하게 되어지는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시시 때때로 그것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외부에서 주입되어져야 하는 그 믿음의 실체가 아니라 그에게 이미 주어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주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는 가운데서 성장하여서 그 믿음의 능력들로써 그 실제를 분별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주의 뜻하심의 재가를 받을 때에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러한 상황도 가능하게 하실 수 있는 초자연적 은혜로서의 믿음의 실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겨자씨의 믿음이 있으면 뽕나무들을 바다에 심겨지라고 하여도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하심의 뜻하심인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겨자씨만큼도 없다는 정죄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유기적 성장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시고 그것의 열매를 거두게 하심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것은 종들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그 믿음이라고 함이 주어질 때까지 편히 쉴 수 있는 그러한 편의제공의 요소라고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것에 있어서의 위로가 믿음의 위로의 실제가 아닌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종들은 종들의 일을 하는 것이 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종들이라고 함의 착취적 개념과 다른, 성도들의 주 안에서의 위로는 그 일하는 자들에게 그에 상당한 위로가 언제나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의 유기적 성장과 그것의 능력의 실제가 삶 속에서 자연스러운 방식을 통하여서 실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의 말씀을 따르던 문둥병자들의 그들의 여정 속에서 병이 낫는 그들의 존재적 고민의 위로의 실제가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유기적 성장과 그에 따른 열매라고 함이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남을 주목한 사마리아인은 주님께 감사하는 그 실제의 열매의 맛을 보았으며 그의 삶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증거자로서의 실제적 자리에 서게 되는 것으로써의 증거자로써의 모습을 가지도록 하심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상대적이면서도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가운데서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이 상대적인 것으로도 실제를 말할 수 있음과 그 정당함을 기뻐할 때에 사실을 말하며 진정으로 구원함의 사실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라고 하심과 같이 그 존재의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 주님의 구원하심을 믿는 자가 그 구원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 구원하심이 상대적인 형태를 띠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유일한 구원의 사실인 것을 믿고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증거에 주의 인(印)치시는 재가가 있으니 본문에서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 17:19)고 말씀하심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믿음으로써 우리의 존재를 경영한다고 할 때에 그 상대적인 표현들과 사실들로서 식상(食傷)(배탈, 식중독 food poisoning)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진짜인지 ‘생각하기 나름이다’는 생각에서 고통스러워할 수 있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자신 외부에서만 와야 한다는 것으로 인식할 때에는 그 믿음의 부재는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적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재가를 받게 되어지는 것은 참된 사실로서 말할 수 있음에 그 믿음의 확신을 가지며 주의 주신 믿음은 내 속에서 주의 말씀 안에서 성장하는 형태로 그 때를 따라서 그 열매의 실제를 통해 우리의 삶의 경영을 실제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피곤의 여정 속에서도 존재의 고민의 형태가 있다고 하여도 실제적으로 그 종들의 존재의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마음에 두고 가르친 내용 중의 하나였습니다.(살후 1:3) 그러한 것이 오늘 본문에서 주의 가르침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우리 성도들도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상대적 실족이라는 연약함에 따른 존재 고민 속에서도, 주의 말씀하심에 따른 믿음의 성숙함에 따른 분별로써, 진정한 주의 위로의 실제를 찾으며 주의 구원을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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