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 25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20:1-12
적지 않은 위로
사람이 어떤 일을 했다고 할 때에, 어떤 일에 힘써 일을 했다고 할 때에, 그에게 주어지는 어떤 보상적 개념이 그 사람에게는 하나의 위로가 되어질 수 있습니다. 성경 전도서에서는 우리 인생에게 그러한 일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써의 어떤 이익들과 또한 누릴 수 있는 기득권들을 주셔서 그 분복으로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는 그것들이 모두 헛되고 헛되다고 함을 말씀하심이 그 내용적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실리라는 개념 물질적 실제의식이라고 하는 것으로 사실을 판단하고 이익단체적인 활동으로 소요가 있었는데 그것의 의미에서 진정한 실제적 의미를 찾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 안에서 실제를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적지 않은 위로를 받게 됨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7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소요가 그침에 있어서 마게도냐를 지나 그 지경으로 다니며 헬라에 이름과 아시아로 함께 가는 사람들이 있어 먼저 보내고 빌립보에서 무교절후에 배로 떠나 드로아로 향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7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안식 후 첫 날에 떡을 떼려고 모였는데 바울이 밤중까지 강론함에 졸음을 이기지 못한 ‘유두고’라는 청년의 죽음과 바울이 그 청년을 살려냄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적지 않는 위로를 받았다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본문에서 말씀하신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음에 대한 말씀하심의 뜻하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즉 정황과 직접적인 증거라고 함을 주목하며 받을 때에 그 위로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처해있는 정황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평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오늘본문인 20장 앞서 언급되어지는 19장에서는 소요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소요라고 하는 것의 내용은 실리적 개념의 이익단체적인 압력행사로 정치적인 측면에서 사도 바울을 해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즉 실리적 개념으로는 신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참된 하나님에 대하여서 말한다고 그것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을 정당화하려고 하였었는데 그것을 주장하려고 하면 사도 바울을 해치고 그의 증거의 정당함을 무시하는 것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식공동체적인 그 실리적 관계자들의 연합적 입장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정치적 입장에서는 결코 용납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팔레스타인을 식민지화하고 있는 로마에서 특히 그들의 신들에 대한 정당함이 아덴, 아테네에서 사도 바울이 알지 못하는 신들을 위함이라고 함의 거짓됨과 참된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그들은 이미 답변하지 못한 가운데 있는데 그러한 알지 못하는 신들의 정당함의 권위를 실리적으로 다시 언급하자고 하는 것의 시위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정당함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정당함이 없는 그러한 실리적 조건의 집회는 그 질서적 정당함까지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산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앞서 말씀드린 판례가 있는 가운데서, 다시 아데미 우상의 신상적인 입장의 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소요가 끝나게 된 전말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실리적인 개념에서의 신을 말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순전하게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위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소요가 있게 되었던 마게도니야의 첫 성 빌립보에서의 소요와 그것의 그침과 그곳에서의 가르침에 다른 이들은 아시아로 가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사도 바울이 무교절을 지나고 그곳을 지나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무교절이라고 하는 것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그 절기적인 개념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게 되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실리적 개념이라는 살기위한 종노릇하는 가운데서의 합리적 개념의 요소들을 말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주의 말씀의 신실성을 확보하는 가운데서 순종하는 것을 그의 몸소 지키는 중심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이 안식 후 첫날이라고 함은 주일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주일은 주님의 부활하심이라고 함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것은 배타적인 상대적 우월적 존재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기념하는 마음에 두고 주의 부활하심에 대한 중심의 고백을 하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사도 바울의 증거라고 함에 있어서 유두고 청년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주의 말씀을 순전하게 받는 가운데서 사도 바울이 밤늦게까지 주의 성실하심의 증거를 힘써 증거하고 있는 가운데 그 말씀의 선포에서 죽음과 부활의 종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힘써 증거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증거의 핵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실리적인 개념에서 실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그가 거룩하게 하는 자와 모든 것들이 거룩하게 되어지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주님을 믿으며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믿느냐는 것(요 11:26)을 사도 바울이 증거한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두고 청년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이라고 하는 것에서 주의 말씀의 가르침이 실제적인 것에 대한 증거를 받음에 있어서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신실하게 말할 수 있는 자는 그러한 인식과 말자체도 상대적인 것을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들이 실리적으로 믿고 있는 사실을 말하는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실에 대한 증거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가 그침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같은 상대적인 사회를 사는 교회의 모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자존하시는 절대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을 따를 때에 상대적인 여지의 개연성의 판단을 벗어나서 순전하게 주의 말씀의 사실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 사실을 말씀하시고 있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서 상대적인 여러 가지 말만 만들어내는 것을 의지하지 않고 신실하게 주의 말씀을 받으며 주 앞에 나오는 무교절을 지키는 중심을 가지도록 하였던 사도 바울의 증거와 오늘 본문에서 그 주의 말씀의 신실성이 자존의 절대자의 신실함에 있다고 할 때에 세상의 상대적인 여러 가지 개연적 판단을 벗어나서 주의 구원의 확실성과 사실을 받을 수 있었기에 진실로 적지 않은 위로를 교회가 받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 주의 적지 않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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