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8월 23, 2004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2004년 8월 22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8:1-17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삶에 있어서 선물이라고 하는 것의 감동과 기쁨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고 또한 그것은 삶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며 어떤 방향의 계기를 제공해주는 경우가 있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선물이라고 하는 개념이 상대적으로 옳지 못한 뇌물로써 자리매김 되기도 하고 또한 선물이라고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취하려고 하는 능동적 모습에서의 옳지 못한 모습도 주목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이 반문하시는 말씀인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말씀하심의 의미를 주목하면서 그 믿음이 선물이라고 함을 상기하며 그에 따른 간구라고 하는 것 즉 기도라고 하는 것의 상관성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즉 믿음의 기도라는 개념의 정체성을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기도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 제한적 규정적 의미의 믿음이라고 함을 분명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그 기도라고 함이 얼마나 왜곡되어지는 것인가 하는 것과 그 기도라고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전반적인 내용으로써 의도함과 기획하는 것과 힘써 행하는 것들로써 자리매김 되어진다는 것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5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본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심을 나타내시는데 한 과부의 간구로써,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을 무시하는 재판관이 번거로워서 과부의 간구를 들어주고자하는 결정을 내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주께서 그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아니하겠느냐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원한을 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인자가 오실 때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신앙적인 면에서의 해석적 입장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두 사람의 기도가 기록되어지고 있습니다. 즉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옴에 그들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낙심하지 말고 기도할 것이라고 함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를 함에 있어서 주의하여야 할 것은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으로써의 기도라고 하는 그 ‘믿음의 기도의 정체성’을 분별해야 할 것이 앞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이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하심에서는 ‘세상의 자체적 믿음의 기도’라는 거짓 형태를 취하는 것이 있을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도 주께서 주시는 믿음의 기도가 있을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비유에서 나타나고 있는 한 과부의 간구라는 개념이 기도로써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자신이신 예수께서 비유로써 사용하시고 기도로써의 정체성으로 규정하심에서 그 과부의 간구라는 개념이 비로소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즉 임의적인 간구라는 개념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이 없는 그러한 한 약한 자의 억울함이라고 하는 것이 기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일반적인 정당함이 있어서 그 간구함을 하나님께서 부여하시고 들으심을 말씀하시는 것이 사실이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규정하시고 받으심에서 그 일반적인 간구의 실제라는 정당함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반적인 정당함에서 한 과부의 간구라고 하는 개념이 그 불의한 자로써 일반적인 정당함을 따라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의식한 불의한 재판관이라고 하는 자의 모습은 하나님 자신과 비교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는 그러한 당위성에 대한 것이 신앙적으로 채색되어진 가운데서 마치 선물이라고 하는 것을 받을 당연함이 있는 것과 같이 기도하는 바리새인들은 그 기도로써의 간구라는 개념의 실제를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것에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역시 신앙적인 은혜를 베푸는 주체로서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존재의 정당함을 비롯하여서 그 재가의 은혜를 간구하는 가운데서 모습과 그 정체성을 찾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일반적인 겸손을 말하는 것이면서도 하나님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신앙의 겸손으로써의 정체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 비유에서는 아이들과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사람들은 아이들처럼 모자르고 유치한 모습을 하면서 천국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모습으로써 잘못되게 기뻐하고 있음을 종종 봅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하심은 자신의 존재의 정체성을 자기 자신의 부모에게서 배우고 그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신의 존재의 정당함을 찾는 자로서의 정당함에 따른 그 삶의 일부로써 그 삶의 방향과 의지라고 함의 기본으로써의 믿음의 기도의 정체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받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신앙의 행위들을 공로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거짓된 삶이며 거짓된 삶 자체로써의 기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 더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기도라고 함을 말할 때에 진정 자신의 존재적 정당함을 하나님으로부터의 찾는 자로서 그 계획하고 의도하고 그 뜻하심의 재가를 받을 수 있는 자리에서 시행하는 자의 모습.. 그것이 믿음으로써의 기도의 정체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기도는 우리의 삶이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선한 싸움의 길을 잘 달려가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써의 삶이기에 낙심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삶을 믿음에 따른 중심으로 계획하고 판단하며 실행에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써 주신 것입니다.이러한 믿음은 세상 자체에서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재가 없는 자들의 스스로 행함에 하늘이 스스로 도와야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범신적인 개념의 간구를 지나서, 진정으로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께 있으며 그가 허락하신 우리의 삶에 주의 뜻하심의 정당함을 따라서 계획하고 판단하고 선한 믿음의 싸움을 정진하는 것을 주께서는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받는 자들로서 주께서 주신 믿음으로 구원받았음(눅 18:42)에 대한 주의 재가가 있게 되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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