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7월 28, 2005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증거

2005년 7월 28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슥5:1-11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증거

우리가 즐겨 먹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과일들 중에서는 껍질을 제거하지 않고 먹는 경우도 있고 껍질을 제거하고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껍질을 제거하고 먹어야할지의 여부를 알지 못하고 먹는 경우도 있고 그에 따른 유익의 여부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다고 하심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뜻하심에 따라 주의 뜻을 열어주시는 그러한 은혜를 입게 된다면 그 기쁨과 감사는 다윗이 칭송하였던 주의 말씀은 송이꿀보다 달다고 하였던 것을 이해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서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증거를 말씀하시는데 이는 말씀의 운동력을 의미하는 가운데서 증거되어지는 주의 말씀의 자증적 권세로서의 증거로 그 말씀하심 안에서 분별되어지는 것을 읽도록 하심의 은혜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스가랴 선지자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게 됨과 천사가 무엇을 보느냐는 질문과 함께 그것은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고 함을 말하고 있고 도적질하는 자들,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어 맹세하는 자들이 끊쳐질 것과 그 집을 사를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스가랴 선지자에게 말하던 천사가 눈을 들어 보기를 말하며 무엇이냐는 것을 묻는 스가랴 선지자에게 에바와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써 한 여인이 에바 가운데 앉았는데 동시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며 이것은 악이라고 하며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구리 위에 던져 덮음에 대한 것과 두 여인이 나왔는데 학의 날개를 가지고 그 날개에 바람이 있음과 그 에바를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지고 감과 그것의 목적적인 것은 그들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으며 준공되면 그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음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온 땅에 있는 자들의 그들의 모습을 지적하시고 구체적인 것은 교회의 질서를 읽지 못하는, 아니 읽지 않는 순종치 못한 자들의 정체성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두루마리가 날아간다는 것은 그 움직임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이 사람에 날린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자증적 역사를 마음에 두게 되어지며 그 살아 있는 말씀으로서의 증거의 자증적 권세라는 것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내용적인 것은 두 부분으로 해서 전반적인 것과 비유적인 것으로 나누이면서도 전체적인 증거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주라는 개념은 인식적인 측면에서 묘사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죄인들에게 있어서는 저주로 나타나지만 주의 말씀을 받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저주가 아닌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즉 저주를 알고 그것을 피할 수 있고 합당히 행할 수 있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성도들에게 기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분별되어지는 저주라고 함과 사르시는 심판의 내용은 도적질하는 것을 먼저 말씀하시는데 주의 뜻하심의 재가가 있지 않은 가운데서 그것을 취한다면 도적과 같은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임의적으로 주장하여서 자신의 이익을 말하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악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당하지 못한 소유권 행사는 도적이라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어 맹세하는 자들의 집을 사를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세상에 어떤 확실성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절대로 틀림이 없어’라는 식의 말이나 의도성을 가지고 납득당위성을 상대방으로 받게 말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절대’라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 즉 참된 신의 속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맹세한다는 것이 신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확실세계에서 확실한 납득을 위해 신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자존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임의적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이름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의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비유적 의미에서 실제적인 증거를 말씀하시고 있는데 에바속의 여인과 학의 날개를 가진 여인들의 모습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바 가운데 여인이 앉는 것을 악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이라고 하시면서 그 존재부정을 의미하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납조각으로 던져 덮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 뜻은 바로 교회의 질서를 알지 못하는 인간적인 자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실제적으로 총체적으로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예표적 말씀을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다고 하셨고 또한 여인의 후손으로써 오셨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후손들이라고 모두 메시아가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자들 중에 부정되어질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에 대하여서 말씀하실 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 11:11)

‘여자가 낳은 자중에’라는 말씀과 같이 사람들은 창조적 질서를 따라서 여자가 남자에게서 낳았으면서도 이제는 여자가 낳은 자들로 오게 된다는 것과 그러한 자들 중에 세례요한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그러한 여자의 후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의 후손을 의식하게 되어지는 여자에 대한 부정을 말씀하시는 즉 에바에 앉은 여인을 보고 악이라고 규정하심을 볼 때에 이것은 과연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잘못된 정당함을 입지 않은 여인의 후손을 의미하는 것이며, 여인의 후손들이란 것이 결국 잘못된 사상적 체계로 낳게 되어지는, 복음으로 낳게 되어지는 자들이 아닌 자들로서, 그 악함이 있을 것을 말씀하심으로 본문 스가랴의 비유의 말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연 하나님 앞에서 창조의 질서 그리고 그 창조의 질서의 실제적 연속성에 있게 되어지는 예수님을 믿어 거룩하게 새롭게 재창조되어진 자들의 질서적 의미를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을 받기를 거절하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함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11장에서 말하고 있는 여자가 교회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는 규례를 지킴에 대하여 말하게 될 때에 창조적 질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규례라는 개념 자체만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말하고자 했던 그 창조적 질서를 믿음으로 받으며 이해할 수 있도록 권면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교회의 연합의 증거로서의 성찬에 참여하여 교회의 하나됨에 대한 증거를 할 수 있도록 함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1:1~16참고)

더욱 두 여인의 경우를 주목하면 그들이 학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데 그 아래 바람이 있었음에 대한 것은 그만한 추진력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 대한 것을 의미하며 그러한 재가 받지 못한 가운데서의 부정의 영적인 능력으로써 행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부정되어진 것은 그 부정되어지고 악으로 규정되어진 그 에바를 가지고 시날땅으로 가서 집을 짓고 제 처소에 머물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시날’ 땅은 바벨탑이 세워진 곳입니다. 즉 구음이 하나인 가운데서 언어가 하나인 가운데서 그들이 그 부정되어진 인식을 같이 하였던 것입니다. 즉 바벨탑은 바로 탑을 쌓아서 하늘에 닿게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자는 합목적적인 의도에서 행해진 것인데..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증거를 배반하는 것으로써 자신들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기에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들이 아무리 여자에게서 난 자들로서 그 큼을 말하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존의 하나님의 계시적 정당함을 얻어 탄생한 세례요한보다도 낮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마 11:11)하셨던 것입니다.

즉 시날땅에 거하는 자들의 크다 함은 이미 부정되어진 것이며 심판을 자초한 것으로 불심판에 사르기로 내어준 자들의 처소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조심하여야 할 것은 주의 몸된 교회의 성도들은 그 교회의 통일성을 정체성을 잘 이해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창조의 질서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 안에서 재창조함을 얻은 자들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우위적 개념 인위적인 정당함에 따른 교회 이해를 할 때에 합당하지 않은 악의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관이 없어서 신학적으로 속성적 전달과 같은 의미에서 마리아와 예수님에 대한 동격적인 경우나 또는 종속적 개념까지 언급되어질 수 있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위적인 것으로 그 악을 말하게 되며 대표적인 악으로 자리매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성신학과 같은 어떤 상대적인 인권적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교회를 해석하려고 하는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라고 하는 개념이 성립되어질 수 없는 것과 같이 생각해서 인위적인 여성의 권위를 위한 측면에서 주의 종들로서의 질서적 입장을 흐리게 하는 것으로도 나타남을 보는데 이러한 것도 역시 악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인 증거를 마음에 두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과 그러한 경향들의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이름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기억하고, 여러 가지 가능성의 정황이라고 함의 요구에서 비로소 교회의 질서를 생각함 보다는 주의 말씀하신 창조적 질서를 기억하여서, 참되게 교회의 질서를 생각하는 가운데 악을 멸하고, 하나님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하는 종들로서 주께 합당한 기도를 드리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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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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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질서이해

2005년 7월 27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11:1-16
교회의 질서이해

일반적인 생각에서만 본다면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는 가운데서 동시에 하나를 말할 수 있는가 또 하나를 말하면서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 그리고 여러 가지 중에서 이질적인 것을 분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논의는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도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한 생각을 해왔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의 형상대로 그 영광대로 인간을 지으심에 있어서 기본적인 자기 모습들이라고 하는 것을 말함에서 이미 비롯되었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자존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만드신 바 피조물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 여럿과 하나의 그 관계적 모습의 이해는 중요하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의식해야만 했던 것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교회의 모습과 그 정체성에 있어서도 우리 성도들은 믿음의 분량이라고 함의 다양성과 그 통일성을 이해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교회의 통일성을 이해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렇게 말함은 성도들의 연합하여 협력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에 서게 하심의 기본적인 입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하나 됨의 이해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오늘 본문을 포함한 고린도교회에 대한 정황적 입장을 통하여 증거함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질서와 통일성을 위한 주의 뜻하심의 증거는 무엇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의 말씀과 본문 2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과 같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사도 바울 자신을 본받는 자 되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고린도교회에서 유전되어짐에 대한 것으로 여인들이 수건을 머리에 쓰는 문제에 대한 것으로 그것에 대한 해석적 의미를 말하고 있고 본래적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남자와 여자의 질서적 의미에 대한 것과 그 표적으로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에 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6절까지에서는 그러나 주님 안에서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함에 대한 언급과 함께 스스로 판단할 것에 대한 것과 긴 머리가 쓰는 것을 대신하여 준 것을 생각하게 하며 변론하게 되는 태도를 가진 자들이 있을찌라도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전반적인 문맥 가운데서 본문의 위치를 주목하여야 함을 먼저 주목하는 것입니다. 즉 우상에 대한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실족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은 것이며 그 앞서 음란이라고 하는 것에 있게 되어지는 탐심으로써의 우상이 있지 않도록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며 그것에서 자신의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믿음의 분량으로 서는 것을 본받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이제 교회의 통일성을 말하기 위해서 교회의 질서적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창조적 질서라고 함의 입장과 그것을 해석한 유전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고 주의 세우신 언약으로써의 성찬이라고 함이 그리스도의 한 몸에 참여함이라고 함의 사실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써 교회의 통일성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교회의 질서적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창조적 질서라고 함의 입장과 그것을 해석한 유전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에 대한 성도들의 연합하지 못한 것은 율법의 행함이냐 믿음이냐는 그것을 놓고 하나됨에 대한 것을 권면하였다면 고린도교회에서는 전통에 대한 이해와 그것에 따른 믿음의 행함이라고 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과 그 믿음의 다양성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그 통일성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그러한 다양성이라고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서 정당함을 찾는 것이 옳은 것이며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의 당위성이 성립되어도 그 권한을 다 쓰지 않는 것과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받을 성도들의 상급이라고 함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급으로써 권한을 다 쓰지 않는 믿음의 중심으로 연약한 성도들을 받음으로 나타나는 성도들의 연합합을 말함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의 통일성을 의미하며 협력하여야 하는데 그 중에서 전통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교회의 창조적 질서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리고 주의 세우신 언약의 하나로써 성만찬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연합을 위한 교회의 다양성에서 읽게 되어지는 통일성으로써의 정체성을 위한 것은 바로 교회의 질서가 창조적 질서를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실 때에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아담을 돕는 배필로서 하와를 지으셨다고 할 때에 그러한 질서를 이해하면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과 같이 교회는 주의 구원하심에 따른 언약에 따른 새로운 창조물로서 새움을 받았다고 함을 기억할 때에 재창조적 질서를 반영한다고 할 때에 교회에서 여성도님들의 섬김이라고 하는 것이 돕는 배필과 같은 입장에서 해석되어야 함이 사실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과 같은 것은 그러한 것의 실제적 증거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 질서를 존중하고 있다고 하면 그 전통으로써 그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따르고 있는 것이고 또한 그 증거적 목적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해에서 수건을 쓴다는 행위만 가지고 말한다는 것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의 기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마도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서 분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었다면 음란으로 인한 탐심으로써의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 전통의 사실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인데 그렇게 행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 하나가 바로 전통을 이해함에 있어서 교회의 기본적인 창조적 질서라고 하는 것을 읽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주의 종들의 잘못된 모습으로 여성도님들의 교회에서의 남성도를 주장하는 것으로써의 섬김이라는 그러한 직책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교회는 재창조적 역사하심에서 그 정체성을 가지기 때문에 그 돕는 배필로서의 섬김의 달란트로 머무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많아지고 또한 능력에 있어서 남성을 능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며 그에 따른 적절한 보수가 주어져야 하는 것에 있어 그 당연함을 말할 수 있고 또 지도자적인 입장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가정에서 남편을 돕는 배필로써 가정을 위해 사회생활을 한다고 할 때에는 그만한 노력을 함에 대한 보수와 또 직위에 따른 해택도 정도에 맞게 형평성을 말해야 할 것이고 또한 어떤 특별한 능력을 사회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때에도 당연히 합당한 남성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는 여건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러한 개념으로 접근함에 대한 옳지 못한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이 가정 밖에서 남성을 대신하는 또는 돕는 개념으로 정착되어진 노동력의 제공이라는 것으로 교회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여자 사사 드보라도 남자를 세우기를 바라고 그 드보라는 교회라고 함의 실제적 증거자로서 교회에서 주의 종들을 도와 일을 하도록 하게 하는 것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의 증거임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생활의 변화라는 개념으로 교회의 질서의 정체성을 말하는 창조적 질서를 상황적 정황적 이해로 변개하는 것은 옳지 않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분란의 직접적인 것은 아마도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전통적인 개념을 해석함에 있어서 종들의 탐욕적인 입장에서 교회의 질서를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사 드보라의 섬김이라고 하는 것을 개인적인 여성신장의 표본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사사기의 본문은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창조적 질서라는 것에서 돕는다는 배경이 주체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함을 말할 수 있지만 정황에 따른 주체로서 당연함을 공식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교회의 창조적 질서를 나타내는 재창조적 질서의 모습을 잃는 가운데서의 질서적 혼돈이 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말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니라는 말을 한 요한을 주님이 증거하심을 기억하고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는 나의 감정과 어떤 명예욕과 나의 하고자 하는 욕망의 탐심과 그에 따른 우상적 입장을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할 때에 주께서 허락하신 줄로 재어준 기업이 실로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주의 창조적 질서에 따른 교회 질서 안에서 기뻐하시며 협력하는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주의 선하신 뜻을 협력하여 이루는 주의 기쁨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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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7월 16, 2005

성곽 없는 촌락

2005년 7월 15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슥2:1-13
성곽 없는 촌락

역사적으로 어떤 자유에 대한 이상을 가진 한 사람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는 어떤 규정되어지는 것 어떤 한계지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아무 경계가 없는 자유를 원한 사람이었음을 봅니다. 그러나 경계가 없다는 개념은 아무 정체성이 없는 가운데서 자유라고 하는 개념자체도 성립되어질 수 없는 것으로 오히려 불안이라고 함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에서 어떤 인위적인 담력과 자유를 말하고 싶지만 그것의 자유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을 알아보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결코 이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중세에 있었던 지역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되어지는 잘못되어진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속박되어진 것으로써 나타나는 가운데 유아기적인 발상이라는 개념을 피하고자 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러한 것들이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규모있게 하는 주관적인 모습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하였고 오늘날 모든 규범이라고 함을 매이게하는 구속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려는 순종하지 못하는 세대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자유라고 하는 것의 실상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서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을 주목합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스가랴가 눈을 들어 봄에 한 사람이 척량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그것을 물었음과 그것에 대한 답변과 그가 가는 예루살렘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을 것을 말하며 여호와의 말씀에 그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될 것을 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에 하늘의 사방 바람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 이제는 북방 땅에서 도망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바벨론 성에 거하는 시온에게 너는 피할찌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 그 시온에 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노략한 열국의 영광을 위하여 그 천사를 보냈으니 그들을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이 노래하고 기뻐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할 것임을 말씀하시고 그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백성이 될 것이요 그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을 말씀하시며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잠잠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본문 중에 ‘성곽없는 촌락’과 ‘하나님의 눈동자’와 같이 여기시는 주의 백성으로서의 시온에서 주의 백성된 성도들의 자유의 실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을 보면 스가랴 선지의 증거의 기본은 그의 존재적 사역을 나타내는 것으로 받을 수 있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억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현상적인 우리 성도들의 삶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이해되며 받음이 합당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1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성소을 지으시고 그것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실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으로 그 왜소한 성전의 현실적인 개념 가운데서 판단되어지지 않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한 사실로써 이스라엘의 열심을 내지 못하는 자들을 책망하시면서도 주의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에 대한 것으로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실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본 2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스가랴 선지자가 보는 천사가 예루살렘에서의 그의 사역적 입지를 말하고 있는 것을 듣게 되어지는데 그것은 주의 말씀하심에 대한 것에서 정당함을 얻는 예루살렘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4절과 5절에서는 그 가운데 사람이 거하니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촌락’과 같다는 말씀과 그 천사가 그곳에 서면 불 성곽이 되며 영광이 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그 이름의 뜻이 “평화의 성”이라고 함과 같이 주의 말씀하심의 기준아래서 주의 주신 말씀 안에서 평화의 성으로서의 지금의 교회의 실재를 예표하는 존재로서의 예루살렘을 말씀하심을 봅니다. 이것은 현상적인 개념만 볼 때에는 성곽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는 분명한 심판적인 성곽이 있다는 것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참으로 그들의 예표적 실제의 모습으로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의 믿음의 분량을 본다면 여러 교파도 있을 수 있고 믿음의 분량이 있고 그러한 주관적 개념으로 가라지들도 교회에 함께 자라는 모습이 과연 ‘성곽 없는 촌락’으로써의 교회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중세의 사람들 구교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조직이라는 개념만 한정하고 그들의 질서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나라의 밖에 있다는 식의 ‘성곽 있는 촌락’을 제시하였던 잘못을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성곽 없는 촌락과 같이 실존하게 되어지는 불성곽 안에서의 주의 눈동자같이 지키심이라고 하는 것에서 열외되어진 자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한 것의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는 사람들의 불안심리에서 그 성곽 있는 촌락이라는 잘못된 구교적 가톨릭 개념의 교회관을 지지하는 잘못된 모습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인위적 자유를 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이제 그러한 인위적 개념의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무리하여 모험할 필요가 없는 ‘안일한 열국’(슥 1:15)의 자리에서 진노의 자리에 이르게 되며 고난이 그들의 삶에 더함이라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슥 1:15 참고)

이제 우리 성도들은 사람들의 모임으로써의 어떤 조직체라는 교회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 그러한 정형적인 개념에서 비로소 자유와 안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교파의 여러 모습들이라고 함이 아픔이 되면서도 믿음의 분량적 개념으로 받게 되어지는 교회의 통일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믿음의 분량의 차이로 보아야 할 것인지 결코 주의 말씀에서 벗어났는지의 여부는 믿음으로 분별하는 가운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참으로 고통이며 교회의 정체성과 자유라는 개념을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의문이 되어지지만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주의 말씀이 나오는 예루살렘’(미 4:2)에서의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것으로써의 아래로 늘여진 척량줄임을 볼 때에 주의 말씀에 따른 그 평강은 불성곽이라는 그 영광으로 그 성도와 함께하는 것이며 주 앞에서 사실이라는 것을 믿을 때에 그 현상적인 불안감으로 자유의 실제를 부인하는 것에서 자유하며 진정한 자유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그러한 것은 주의 말씀을 따르는 시온의 성도들의 모습들 이들은 주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자들로서 믿음으로 행하는 가운데서 시온으로써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행함을 요구하는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시온에서 나온다는 것’(미 4:2)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그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서 거룩하여진 믿음의 산 제사를 드리는 오늘날 성도들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시온에 거하는 자들로서 예표적 실제의 구약의 성도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범하는 자들은 여호와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씀하심을 기억할 때에 전능자의 눈을 거스릴 수 있다는 것의 성립되어지지 않는 거짓된 행위들이 있다고 하여도 결코 성도들의 견인을 말할 수 있다는 가운데서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성도들과 함께 하심이 주의 영광의 불 성곽이라는 성곽없는 촌락의 실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이 불안해하며 어떤 규범을 원하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속박으로 생각하고 배척하는 사람들 모두는 게으른 안일한 자들이거나 순종하지 못하는 자들로서 경건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들로 모두 경건지 못한 자로서 주 앞에 설 수 없는 거짓된 성곽의 촌락에 거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하신 바에서 정당함을 찾는다면 그 말씀하심의 재가를 얻는 주관적 표현의 교회를 그 제반적인 질서를 사랑하고 그러한 것에서 비로소 자유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주의 눈동자 같이 지켜주심에 대한 신뢰에서 비로소 자유하며 주께서 주시는 믿음 안에서 ‘화석류나무 사이에 두루 다니라고 주의보내신 자들’(슥 1:10~12 참고)과 같이 믿음의 선한 싸움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라는 것과 그 질서는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구별되어진 것으로 존중되어야 하며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의 말씀 안에서 비로소 그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말씀하심을 따라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하는 자들로써 나타날 때에는, 인위적인 성곽이 있는 촌락으로써 비로소 교회를 해석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하심을 따라서 주의 구원받은 자들로서 주의 구원을 증거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임에 대한 증거로 야곱의 서원을 이행하는 것과 같이 교회 출석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한두 번 식사를 거를 수 있다고 하여도 식사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면 그것이 억측인 것과 같이 교회 출석의 실제를 부정하는 것은 또 하나의 극단적인 자유자로서 그 자유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의 말씀 안에서 자유의 실제를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주께서 주의 말씀을 의지하는 자들을 그의 눈동자같이 지키심에 대한 뜻하심을 읽게 하시는데 그것이 우리 성도들의 현상적인 고통과 고난으로 부정되어 보이는 자유의 부정의 강요에서 자유하여 비록 성곽 없는 형태에서 노출되어진 가운데서도 주의 불 성곽 안에서의 보호하심 가운데 믿음의 선한 싸움의 자리에 기쁨으로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로서 ‘성곽 없는 촌락’과 같은 가운데서 실제로는 주의 불 성곽 안에 있는 주의 영광이 된 성도들로서, 바벨론에서 벗어나는 가운데, 즉 상대적인 ‘신들의 문’이라는 상대적 절대의 확신이라는 맹세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참으로 주의 복음을 전하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시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바가 된 자들로서의 귀한 주의 성도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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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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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의 신앙

2005년 7월 3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삿11:1-11
입다의 신앙

사람들은 말하기를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결백증이라는 개념의 표현이 가능한 시시콜콜 원칙적인 사람이나 또는 그로 인한 인간미가 없는 자로 사람들의 호흥을 얻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더불어 살아가는 가운데서는 그러한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생활하는 것이 하나의 처세술이 되어질 수 있는 것이 사실이면서도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것이 옳은 것만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주 안에서 그러한 것들을 분별하고 참으로 화목할 줄 아는 것이 귀한 것인데 본문 사사의 중심을 통해 그러한 것을 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심을 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길르앗의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 낳은 아들이었음과 같이 그 입다 사사의 출생적 관련성과 그의 처해있는 상황적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길르앗의 아내들 즉 본처들이 아들을 낳음에 있어서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했던 것과 이에 입다가 그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들이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길르앗의 장로들이 암몬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하자 돕 땅에 가서 입다에게 암몬자손과 싸우려하니 와서 길르앗의 장관이 되어줄 것을 구하는 것과 입다가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신에게 붙이면 과연 그들의 머리가 되겠느냐는 질문함과 길르앗 장로들의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 사이의 증인임을 언급하며 반드시 행하리라는 말과 함께 돌아와서 장관이 되며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고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서자라는 편견과 사회적 개념에서의 반목되어진 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자라는 것과 같은 서자로서 비교되어지는 아비멜렉과의 모습도 주목하면서 하나님 안에서의 화목이라고 하는 것 그것의 정체성에 대한 눈을 열게 하심의 은혜를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반 상식이라는 개념에서 보면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한 일방상식이라는 개념이 진정한 실존을 말하지 못할 때 즉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지는 상식이라는 측면과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재가를 받지 못하는 그러한 상식의 실존에서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함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 정황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전반적인 가르침은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7)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부정적 입장에서는 임의적인 것으로 악함을 드러내는 시대상의 정신을 읽을 수 있는 것이고 긍정적인 입장에서는 주의 말씀하심에서부터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합당한 믿음의 분량적 증거로서의 시대가 있을 것을 말씀하심에서 신약의 교회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실증적인 개념 즉 필요에 따른 소견적 판단으로 일관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사사 '입다'를 통하여서 눈을 열게 하심의 은혜를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본문의 배경이 되어지는 사사기 10장의 말씀에서는 여러 사사들이 거론되어지고 있고 상황적 입장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중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자존의 하나님을 믿었다면 그러한 행보에 있어서 상황적 당위성에 따른 신앙의 흔들림이라고 하는 것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와 같은 신앙에 서지 못하여서 이제 하나님이 암몬자손에게 그들을 파심에 따라 길르앗 사람들이 사사 입다를 찾게 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재가를 얻지 못하는 신앙상식에 있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선하심을 마음에 두는 것보다도 기득권적인 개념에서 상식적인입장을 따랐던 것입니다. 즉 길르앗의 아내들의 소생들이 다른 여인의 자식이라는 것으로 입다를 쫓아내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입다는 잡류들과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잡류들은 기존의 그 때 당시 사람들의 인식의 부적절함과 잘못됨을 감안할 때에 그러한 서자들과 같은 모임이 될 수 있고 비류함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입다의 신앙을 볼 때에 오히려 왜곡되어진 일반적인 판단에서 희생적 입장의 서게 되는 자들로서 그와 함께한 자들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길르앗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증거자임을 내세워서 암몬 족속과 싸우고 자신들의 장관이 되어주기를 사사 입다에게 청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입다는 그것을 허락하게 되는데 그 조건이 자존의 하나님으로 그 뜻함의 재가를 말하는 것으로 삼았다는 것과 그가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께 다 고하였다는 것을 기록함을 볼 때에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진정한 사실이라는 것을 믿고 따른 자의 모습을 봅니다.

자신을 서자의 입장으로 밀어냈던 사회와 그 사람들에게 그들을 섬기는 자로서 장관적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그 말과 되어짐과 인도하심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음을 믿을 때에 하나님께 자신의 감정과 입장과 판단보다도 그것을 진정으로 사실로 받아들여 순종할 수 있는 사실에 서는 모습이 우리 성도들의 눈을 열게 하심의 은혜를 입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을 인하여 참고 행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잘못된 기득권의 입장에서 그와 함께해줄 사람이 없었던 사사 입다

그가 하나님 여호와를 기쁘게 하시매 하나님께서 원수와도 화목케 하심으로 그 자신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에 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우리 성도들의 세상과의 화목은 맑은 물이라는 개념과 같이 지나치게 완벽하거나 또는 인간미가 없다는 평을 받지 않기 위해서 부정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지 못하는 것에 있어서도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당위성에 서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를 때에 그 기쁘심에 따라서 원수라도 화목케 하심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사역과 사업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의 동료와 친구와 관계를 통한 그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음이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서자 아비멜렉은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서 아버지를 진정 믿음으로 존경하는 자들의 모습이 아닌 도의적 개념에서 자유치 못한 자들의 모습을 하나님의 재가 없이 읽어내어서 임의적으로 비류한 자들을 바알브릇의 묘에서 꺼낸 돈으로 사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려고 했던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참으로 머리 아픈 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여인의 던진 돌에 그의 머리가 깨어지고 결국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사실을 믿는 사사 입다는 그들의 잘못된 기득권을 시기하지 않았으며 주의 뜻하심 안에서 화목케 하심의 인도하심 안에서 충성된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사람들의 필요성에 따라서 주 5일제와 같은 가운데서 임의적으로 주일 예배시간 조정등과 같이 기본적인 신앙까지도 타협하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는데, 그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실상은 그 능력을 상실하여서 인본주의적 개념으로 흐르고 있음은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불의한 청지기의 모습을 기드온의 서자 아비멜렉의 모습에서 주목할 수 있었다면 믿음으로 행한 사사 입다의 모습에서 볼 때에 과연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의 화목이라는 것이 세상을 오히려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신앙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고 기득권을 다 빼앗기는 것과 같이 잘못되게 인식되어지고 그러한 인식의 강요가 있는 가운데서 성도들은 아비멜렉을 택하도록 하는 강요까지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성도들은 주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운데 원수까지도 화목(잠 16:7)케 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라 사사 입다의 신앙과 같이 주 앞에서 우리의 삶을 지혜롭고 합당하게 경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더욱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자리에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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