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9월 25, 2006

성도의 화평에 대하여

2006년 9월 24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하5:11-25
성도의 중심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고 그것을 위해 사람들은 지혜를 축척해왔습니다. 고전적인 입장에서는 어떤 사회계약설을 말할 수도 있고 통속적인 측면에서는 처세술과 같은 대인관계를 비롯한 특별관계들에 대한 것으로써 그것들을 재고하는 가운데서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영위해 나간다고 하겠습니다.

관계라는 것은 잘됨을 말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 또 그러한 판단을 받지 못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데 그러한 기술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그 앞서 그 관계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가치 또는 기준이라고 함을 바르게 가지는 것이 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관계를 이해함을 기초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데, 그것은 평안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서로 편안한 관계, 서로에게 화평케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으로 접근하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세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화평이라고 하는 것과 우리 성도들이 인식하게 되어지는 화평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의 바른 중심과 ‘화평케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마 5:9)이라는 그 증거로 주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인데, 아주 기본적인 성도의 중심이라고 하겠습니다. 과연 그것은 무엇인지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 본문 17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2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두로와 히람이 다윗에게 사자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었는데 그것은 여호와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고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다고 함을 인함이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취하였음과 그로 인해서 아들과 딸들이 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다윗을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킴을 말하고 있고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그들을 치라고 하심을 듣고 그들을 침과 그것이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같이 다윗 앞에서 그의 대적을 흩으셨다하여 바알브라심이라 칭함이 기록되어있고 다윗과 그 종자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버린 그 우상을 치웠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함에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께 또 다시 물어 그 말씀하신 병법을 따라 그 전쟁을 이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그들이 있는 곳에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엄습하라고 하셨는데, 그 시기는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동작하라고 말씀하심입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 다윗을 앞서 블레셋 군대를 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인 순종하여서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게 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지혜로써의 처세, 그 처세의 기본으로써의 평안이라고 하는 것을 구하는 그 화평케 하는 것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하는 것이 성도로서 옳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의한 청지기선한 청지기의 중심이 비교되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질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대인관계라고 하는 것은 기본으로 서로 좋게 화목할 수 있는 가운데서의 그 처세를 말하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에 그 화목을 위해 상대방을 배려하고 더 지나친 모습까지도, 즉 상대방에게 필요이상의 정적인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나 또는 요구하는 관계를 근간으로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을 때는 서로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깨어지게 되고 그것은 그 자신의 비참함을 현실적인 고통으로 느낄 수도 있는 것이 그것이라고 함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주목함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비교되어지는 본문인 누가복음을 먼저 주목하고 그것이 현실적인 측면에서 어떤 표현으로 읽게 되어지는가 하는 것에 대한 본문으로써 오늘 본문이 주목됨에 따라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먼저 누가복음(눅 16:8, 눅 16:1~10)에 대한 화평에 대한 견해를 비교하도록 말씀하시는 것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그러한 것이 주인에게 들린 것으로 알고 직분을 빼앗길 것을 생각해서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낱낱이 불러서 그 주인에게 줄 물목들을 고치도록 해서 이러한 불의한 행동으로 그들의 환심을 사서 쫓겨날 때에 그들이 영접할 것을 기대하고 있는 가운데서 그 관계를 성립함을 재고하고 있고 그 화평을 구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그러한 화평을 위한 불의의 재물과 같은 형식으로 화평을 구한다면 그러한 자에게 재물을 다시 말해서 그 달란트를 맡기겠느냐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판단은 오늘날 이러한 처세술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다면, 오늘날과 같은 현대의 그러한 처세술을 알지 못한 자라는 측면에서 비웃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네가 세상을 알아 살기 위해 더 처절해야 돈을 구할 수 있고 살아남는단 말이야’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것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에서는 이미 그들이 세상에서의 지혜로움을 지적하셨으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스스로 옳다는 개념 상대적인 것을 전혀 배제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판단하심에서 사실을 말함에 대한 정당함을 배제한, 임의적 사실은 자존의 절대자 앞에서 취하게 되는 그들의 소송적 입장이 성립되어질 수 없다는 측면을 말씀하시는 것으로써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의 실존이 부정되어지는 자로서의 미움을 그들이 적합하게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두로왕 히람이 다윗에게 목수와 석수를 보내어 집을 지어주는 경의를 표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셨다는 것을 상대적인 정황을 미루어보아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두었고 그러한 가운데서 화평이라고 하는 것을 구하는 가운데서의 관계성을 마음에 두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 정황이라고 하는 것이 일국의 왕에게 미움을 받아 대군의 추격을 받는 자로서 죽지 못해 산 것과 같이 외국으로 도망치고 하더니 온 나라의 신임이 그에게 돌아갔다고 하는 것은 필시 신의 섭리라고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혹 그와 같은 존재라면 서로 관계를 돈독히 해두는 것이 좋기 때문에 히람왕은 화평을 구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정황 속에서 블레셋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즉 일시적이라고 하여도 그 블레셋의 나라의 한 신하가 되었던 다윗을 볼 때에 그가 나라를 세웠다면 그것은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기억되어지는 다윗의 정황은, 다윗이 블레셋 아기스왕에게 가서 살기위해 미친척을 해야 했던 것과 그의 종자들과 그들의 신하적 입장에서 시글락에 머물렀던 것은 주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은 하나님의 금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이스라엘나라에 있어서 정당방위라고 하더라도 사울의 침공에 그를 죽일 수도 있는 그러한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상책으로서 그의 나라를 하나님이 공식적으로 주시기까지 자신은 이민자의 자리에 서겠다는 그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블레셋이라는 그 이름의 뜻은 '이민자'라는 뜻인데, 다윗이 여러족속가운데서 그 족속을 택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른 자신의 기업에 대한 것을 맡긴다는 것과 그들의 신하가 되었을 때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질서 안에서 그의 복잡한 시글락이라고 하는 곳에서의 행보도 성실히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살기위해서 아부적 개념에서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 선하게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운데서의 질서적 자리매김에서 그 사실의 거룩함을 받아들여서 그 신앙으로 그 열심을 다했던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원수와도 화목케하시는 그 능력에 따라서 허락되어진 그 질서에 거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블레셋은 다윗에게 그 골리앗을 죽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가운데서 과연 상식적으로 다윗을 신하로 신임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화목케하심이 아니고는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자신들이 다윗에게 배려해준 것과 같은 덕분이라고 생각했고 그 화평의 주체가 자신들이기 때문에 그 화평의 주체로서 다윗의 분깃으로 그 나라에 대한 소유권이라고 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임의적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으로 인해 화평의 이해에 대한 중심이 다윗과 다른 가운데서 그 화평의 관계는 깨어지고 전쟁이 있게 되어지는데 그 전쟁에서 다윗의 중심이 하나님의 받으신 바가 된 것으로 말씀하심을 읽게 하는 그 승리를 말씀하셨고 다윗은 그것이 ‘바알브라심’이라고 함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갈라진 틈의 소유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깨어짐에 있어서 주관자, 승리자’(lord of the breaks)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화평이라고 함에 대한 시비가 있을 때에 하나님의 판단하심의 재가를 따른 자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알이 격파한다’라는 뜻도 되면서도 이것은 세상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다음에 인격적인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써 그 확고히 전쟁을 통해 분명히 하심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블레셋의 두번째 다윗의 이스라엘을 침공함에 대한 주 하나님의 병법에서 읽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 병법에서 인간의 걸음에 비교되어지는 걸음소리가 나는 가운데서 그 공격의 시작 점을 말씀하셨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다윗의 병사들보다 앞서 나가신다는 것은 인격의 창조자이시며 인격적인 자신의 행보를 주목하도록 하심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상대적인 시비가 있을 수 있는 그러한 자의 모습이라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변론하시는 인격적인 주 하나님의 판단하심이 그 사랑하는 자들에게 실제적으로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 역사적 시기과 분량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분량과 그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그 뜻하심 안에서 사람마다 다 달리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주를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의 화목의 사실을 믿고 누리고 증거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의 현실적인 증거로서 다른 사람들과의 화목도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실제의식에서 화목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로 인한 사람들의 인식과 질서와 그에 따른 예의와 더 나아가서 처세라고 하는 것도 존중하고 그들의 업적이라고 하는 것도 주의 말씀하심에서 벗어나지 않는한 기본적인 존중을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에 직접적으로 부인되어질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존중의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일반적인 사회의 질서라고 하는 것과 보편인식들과 그에 따른 세상의 모든 것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들의 관계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로써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관계를 주의 구원하심의 화평에서 새롭게 규정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볼 때에는 그 잘하는 것이 특이하게 보여서 아부의 수준처럼 또는 필요이상의 비하의 자리에 서는 것처럼 또는 맹목적인 순종을 하는 것과 같이 오해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비록 시비를 불러오고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고 하여도 낙심하지 않고 주의 구원하심에 따른 화목케하심을 마음에 바르게 두는 성도의 중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에 많은 처세술적인 기술(技術,記述)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반은혜에 따라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참고하고 재고함이 옳은 것이며, 주의 말씀하심에서 받을만한 사실적인 것을 취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처세술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 하는 것에서 좀더 지나쳐서 상대방의 비위를 맞춘다는 것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있고 또한 그것은 물질적 개념이나 심지어 맹목적인 신앙적 입장에서 정당화하려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평케된다는 것과 그 정황에 따른 주어진 상황에서 질서적 화목을 이루는 평안을 구할 때에 세상의 주고 받음의 보상적 개념에서 비롯되어지는 화평이라고 하는 것에 비로소 의미를 두지 않고,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가운데서 정당함을 따른 화목의 능력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 천국의 아들된 성도들의 화목의 기본이며 또한 불의한 청지기가 아니라 주의 뜻에 합당한 청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다윗에게 화평케함에 대한 신원하심과 같은 그것이 일률적인 상대적 입장에서 우리 성도들의 현실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인 신원하심이 실제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낙심하지 않을 수 있으며 주의 구원에 따른 화평을 전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의 자녀로서의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선한 청지기로서의,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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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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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9월 04, 2006

서기관의 의문

2006년 9월 3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2:1-12
서기관의 의문

입추도 지난지 오래되어 기억하지 않는 이 때에도 아직도 매미는 울고 있는 그러한 때.. 아직도 한 낮에는 덥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국내에서도 식중독에 따른 보도가 있어서 음식을 주의해야 한다는 그러한 경각심을 가지게 됩니다.

음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써 귀한 것이지만 상하거나 해롭게 된다면 때로는 버릴 수도 있는 특권이 또한 같이 주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아깝지만 건강을 위한 것으로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소위 어느 '먹자 골목'에서 팥이든 빵을 사먹고 힘들어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더위에 상하였던 모양입니다. 차라리 빵속이 없는 것을 사먹을 것을 하는 생각도 하게되었는데 그래도 빵은 그 안에 들어있는 첨가물이 맛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어서 사먹은 기억이 있는데, 그것은 나만의 선택이 아니라 사람들의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맛없는 빵을 '앙꼬없는 빵(bean jam)'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가 봅니다.

생명의 떡되신 예수그리스도 주님에 대한 바른 이해없는 신앙 형식적인 신앙에서는 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자의적인 것으로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생명의 떡의 중심은 예수는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사람들은 구주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속칭 '구원파'와 같은 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수일후에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고 집에 계심이 소문이 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용신할 수도 없었는데 한 문둥병자를 네명이 메고 와서 지붕을 뚫어 예수님 앞에 내리게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어떤 서기관이 그곳에 앉았다가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하며 참담함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죄를 사하지 못한다는 그 중심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그 서기관의 마음 속의 의문을 아시고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상을 들고 가라고 병자에게 말하자 그는 일어나 상을 들고 감에 따라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여러가지 일 수 있습니다. 그 문둥병자 그리고 그 네명의 사람들 그리고 그 함께한 사람들, 서기관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중에서 서기관의 의문이라고 하는 것이 중심적으로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 또한 오늘의 주목할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서기관의 의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을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본문 앞장이 되어지는 마가복음 1장에서는 예수님이 사역하시는데, 사람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필요라는 개념으로 한정시켜서 하나님의 풍성함을 인위적으로 받으려는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문둥병자를 고쳐주시면서 성경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제사장에게 보이고 그 나은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니시지 못하게 했고 그것은 복음 전도를 막는 것과 같은 착시현상적 실제를 나타내고 있지만 주께서는 사람들이 주님께 나오도록 하시며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는 가운데서 행하실 수 있는 분으로 나기를 나타내시고 성도들의 복음 전파에 있어서 귀감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동안 시험을 받으신 후에 있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들짐승과 같이 계셨던 것과 같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인간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기까지, 짐승의 마음과 같이 있게 되어지는 자들의 모습 그러한 다니엘의 증거(단 4:32)을 읽게 하시는 것이 본문의 이해의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에 있어서 종말의 때에 있게 되어지는 예언에 대하여서 분명함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지 않는 자들은 주검이 있는 곳(마 24:28; 눅 17:37)에 있게 되어지는 독수리처럼 되어짐으로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서기관의 의문에 대하여 주께서 말씀하신 바로써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하여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자의 모습이면서도 성경을 말씀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들 주님의 중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만을 가지고 임의적으로 당위성을 말하는 것이 주의 책망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보면 그 행함에 열심이 있는 자들 즉 문둥병자를 짊어지고 온 자들은 예수님이 그 데려온 자를 낳게 하실 것이라고 함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상식적으로나 정황적으로 볼 때에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고 존경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능력을 나타내셔서 구원과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시는 메시아로서의 존경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능력이 많으신 참으로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의사의 모습 자체로서의 존경을 말하는 것인지는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문둥병자를 보시고 네 죄사함을 얻었다고 말씀하심에 있어서는 그러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메시아적 믿음으로써 인쳐주시기 위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즉 그 낳게 해주시는 의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에서 주께서는 그에게 진정한 믿음의 실체를 마음에 두도록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사함을 얻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죄사함이라고 하는 것에 임의적인 실제의식을 부여하여서 그것에 비로소 목을 메는 것처럼 말하려고 하는 구원파의 입장을 지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이 주목하였던 것과 같이 예수께서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 사실적 증거였던 것입니다.

본문의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그 서기관이 더 잘 읽고 있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예수님의 재가적 입장을 읽을 수 있는데, 그 서기관의 판단에 대한 시비를 직접 거론하시면서 인자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이것은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하나님의 아들 이신 예수께 있다는 것과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예수님이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그가 그러한 것을 선언하심에 있어서는 서기관과 같은 상대적인 인식에서의 비판적 당위성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정황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심방하고 치료하시고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것과 같이 행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야적 증거와 사역과 그 풍성함인데,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그 풍성이라는 인식을 현실적인 필요성에서 이해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국한하려는 그러한 악한 모습에서 예수께서 누구이신지 그리고 예수께서 어떠한 의도로 말씀하시는지를 눈감게 만들어버려려는 것입니다.

사상사적인 입장에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확실성을 말할 수 없다는 회의적인 경향이 신앙과 신학적인 입장에 들어오면서 사회주의 복음과 같이 사회활동과 노력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비로소 복음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을 붙든다는 측면에서 사람들이 성경을 주목할 때에 과연 소위 이단인 '구원파'와같이 '죄사함'과 '구원'이라는 개념의 사실성에 비로소 의미를 두려고 하는 경향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할 것은 우리가 실용적 필요성에 따라서 구원을 실제적으로 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자신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지으신 분으로서 믿는 것이 절대적으로 합당한 것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고 그러한 것은 이미 주의 정하신 바 구원을 실제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흐름을 주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바라봄에서 비롯되어질 때에 진정 생명의 떡이 진정한 양식의 떡으로 나타날 것이며,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 생명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이 변질되어져서 신앙의 식중독을 가져오게 될 것이며 급기야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잘해보자는 인지상정과 또 잘못된 것에 대한 상대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유익성을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보편의식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그 실존을 말하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을 때에는 느부갓네살의 이름과 같이 즉 '지경을 확고히하다'라는 그 뜻과 같이 임의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는 가운데서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적 입장에서 짐승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인간나라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기까지 묶여있어야하는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인용하더라도 그것이 정당화되어질 수 있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이심을 먼저 기억하고 그가운데서의 사실의 실존을 비로소 말할 수 있을 때에 진정한 성경적인 신앙을 가지고 바른 생명의 떡되신 예수님으로 그 풍성함과 구원함을 증거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서기관과 같이 성경을 많이 알고, 지위를 가졌다고 하나 그 실제의식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비로소 두는 것보다도 다른 것을 우선시하고 실제화한다면 그것은 서기관과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 대한 것을 믿지 못하는 가운데서 주의 판단에 침묵하여야 할 것이며 그 진밖에,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신앙이 되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벗어나서 참으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 가운데서 말씀하심의 실제의식을 비로소 잘 구별하여 보는 가운데 참으로 생명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귀한 주의 성도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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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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