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 3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2:1-12
서기관의 의문
입추도 지난지 오래되어 기억하지 않는 이 때에도 아직도 매미는 울고 있는 그러한 때.. 아직도 한 낮에는 덥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국내에서도 식중독에 따른 보도가 있어서 음식을 주의해야 한다는 그러한 경각심을 가지게 됩니다.
음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써 귀한 것이지만 상하거나 해롭게 된다면 때로는 버릴 수도 있는 특권이 또한 같이 주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아깝지만 건강을 위한 것으로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소위 어느 '먹자 골목'에서 팥이든 빵을 사먹고 힘들어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더위에 상하였던 모양입니다. 차라리 빵속이 없는 것을 사먹을 것을 하는 생각도 하게되었는데 그래도 빵은 그 안에 들어있는 첨가물이 맛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어서 사먹은 기억이 있는데, 그것은 나만의 선택이 아니라 사람들의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맛없는 빵을 '앙꼬없는 빵(bean jam)'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가 봅니다.
생명의 떡되신 예수그리스도 주님에 대한 바른 이해없는 신앙 형식적인 신앙에서는 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자의적인 것으로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생명의 떡의 중심은 예수는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사람들은 구주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속칭 '구원파'와 같은 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수일후에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고 집에 계심이 소문이 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용신할 수도 없었는데 한 문둥병자를 네명이 메고 와서 지붕을 뚫어 예수님 앞에 내리게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어떤 서기관이 그곳에 앉았다가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하며 참담함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죄를 사하지 못한다는 그 중심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그 서기관의 마음 속의 의문을 아시고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상을 들고 가라고 병자에게 말하자 그는 일어나 상을 들고 감에 따라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여러가지 일 수 있습니다. 그 문둥병자 그리고 그 네명의 사람들 그리고 그 함께한 사람들, 서기관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중에서 서기관의 의문이라고 하는 것이 중심적으로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 또한 오늘의 주목할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서기관의 의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을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본문 앞장이 되어지는 마가복음 1장에서는 예수님이 사역하시는데, 사람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필요라는 개념으로 한정시켜서 하나님의 풍성함을 인위적으로 받으려는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문둥병자를 고쳐주시면서 성경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제사장에게 보이고 그 나은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니시지 못하게 했고 그것은 복음 전도를 막는 것과 같은 착시현상적 실제를 나타내고 있지만 주께서는 사람들이 주님께 나오도록 하시며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는 가운데서 행하실 수 있는 분으로 나기를 나타내시고 성도들의 복음 전파에 있어서 귀감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동안 시험을 받으신 후에 있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들짐승과 같이 계셨던 것과 같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인간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기까지, 짐승의 마음과 같이 있게 되어지는 자들의 모습 그러한 다니엘의 증거(단 4:32)을 읽게 하시는 것이 본문의 이해의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에 있어서 종말의 때에 있게 되어지는 예언에 대하여서 분명함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지 않는 자들은 주검이 있는 곳(마 24:28; 눅 17:37)에 있게 되어지는 독수리처럼 되어짐으로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서기관의 의문에 대하여 주께서 말씀하신 바로써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하여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자의 모습이면서도 성경을 말씀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들 주님의 중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만을 가지고 임의적으로 당위성을 말하는 것이 주의 책망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보면 그 행함에 열심이 있는 자들 즉 문둥병자를 짊어지고 온 자들은 예수님이 그 데려온 자를 낳게 하실 것이라고 함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상식적으로나 정황적으로 볼 때에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고 존경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능력을 나타내셔서 구원과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시는 메시아로서의 존경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능력이 많으신 참으로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의사의 모습 자체로서의 존경을 말하는 것인지는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문둥병자를 보시고 네 죄사함을 얻었다고 말씀하심에 있어서는 그러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메시아적 믿음으로써 인쳐주시기 위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즉 그 낳게 해주시는 의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에서 주께서는 그에게 진정한 믿음의 실체를 마음에 두도록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죄사함을 얻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죄사함이라고 하는 것에 임의적인 실제의식을 부여하여서 그것에 비로소 목을 메는 것처럼 말하려고 하는 구원파의 입장을 지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이 주목하였던 것과 같이 예수께서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 사실적 증거였던 것입니다.
본문의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그 서기관이 더 잘 읽고 있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예수님의 재가적 입장을 읽을 수 있는데, 그 서기관의 판단에 대한 시비를 직접 거론하시면서 인자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이것은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하나님의 아들 이신 예수께 있다는 것과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예수님이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그가 그러한 것을 선언하심에 있어서는 서기관과 같은 상대적인 인식에서의 비판적 당위성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정황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심방하고 치료하시고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것과 같이 행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야적 증거와 사역과 그 풍성함인데,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그 풍성이라는 인식을 현실적인 필요성에서 이해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국한하려는 그러한 악한 모습에서 예수께서 누구이신지 그리고 예수께서 어떠한 의도로 말씀하시는지를 눈감게 만들어버려려는 것입니다.
사상사적인 입장에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확실성을 말할 수 없다는 회의적인 경향이 신앙과 신학적인 입장에 들어오면서 사회주의 복음과 같이 사회활동과 노력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비로소 복음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을 붙든다는 측면에서 사람들이 성경을 주목할 때에 과연 소위 이단인 '구원파'와같이 '죄사함'과 '구원'이라는 개념의 사실성에 비로소 의미를 두려고 하는 경향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할 것은 우리가 실용적 필요성에 따라서 구원을 실제적으로 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자신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지으신 분으로서 믿는 것이 절대적으로 합당한 것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고 그러한 것은 이미 주의 정하신 바 구원을 실제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흐름을 주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바라봄에서 비롯되어질 때에 진정 생명의 떡이 진정한 양식의 떡으로 나타날 것이며,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 생명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이 변질되어져서 신앙의 식중독을 가져오게 될 것이며 급기야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잘해보자는 인지상정과 또 잘못된 것에 대한 상대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유익성을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보편의식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그 실존을 말하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을 때에는 느부갓네살의 이름과 같이 즉 '지경을 확고히하다'라는 그 뜻과 같이 임의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는 가운데서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적 입장에서 짐승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인간나라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기까지 묶여있어야하는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인용하더라도 그것이 정당화되어질 수 있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이심을 먼저 기억하고 그가운데서의 사실의 실존을 비로소 말할 수 있을 때에 진정한 성경적인 신앙을 가지고 바른 생명의 떡되신 예수님으로 그 풍성함과 구원함을 증거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서기관과 같이 성경을 많이 알고, 지위를 가졌다고 하나 그 실제의식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비로소 두는 것보다도 다른 것을 우선시하고 실제화한다면 그것은 서기관과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 대한 것을 믿지 못하는 가운데서 주의 판단에 침묵하여야 할 것이며 그 진밖에,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신앙이 되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벗어나서 참으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 가운데서 말씀하심의 실제의식을 비로소 잘 구별하여 보는 가운데 참으로 생명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귀한 주의 성도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막2:1-12
서기관의 의문
입추도 지난지 오래되어 기억하지 않는 이 때에도 아직도 매미는 울고 있는 그러한 때.. 아직도 한 낮에는 덥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국내에서도 식중독에 따른 보도가 있어서 음식을 주의해야 한다는 그러한 경각심을 가지게 됩니다.
음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써 귀한 것이지만 상하거나 해롭게 된다면 때로는 버릴 수도 있는 특권이 또한 같이 주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아깝지만 건강을 위한 것으로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소위 어느 '먹자 골목'에서 팥이든 빵을 사먹고 힘들어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더위에 상하였던 모양입니다. 차라리 빵속이 없는 것을 사먹을 것을 하는 생각도 하게되었는데 그래도 빵은 그 안에 들어있는 첨가물이 맛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어서 사먹은 기억이 있는데, 그것은 나만의 선택이 아니라 사람들의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맛없는 빵을 '앙꼬없는 빵(bean jam)'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가 봅니다.
생명의 떡되신 예수그리스도 주님에 대한 바른 이해없는 신앙 형식적인 신앙에서는 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자의적인 것으로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생명의 떡의 중심은 예수는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사람들은 구주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속칭 '구원파'와 같은 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수일후에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고 집에 계심이 소문이 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용신할 수도 없었는데 한 문둥병자를 네명이 메고 와서 지붕을 뚫어 예수님 앞에 내리게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어떤 서기관이 그곳에 앉았다가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하며 참담함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죄를 사하지 못한다는 그 중심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그 서기관의 마음 속의 의문을 아시고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상을 들고 가라고 병자에게 말하자 그는 일어나 상을 들고 감에 따라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여러가지 일 수 있습니다. 그 문둥병자 그리고 그 네명의 사람들 그리고 그 함께한 사람들, 서기관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중에서 서기관의 의문이라고 하는 것이 중심적으로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 또한 오늘의 주목할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서기관의 의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을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본문 앞장이 되어지는 마가복음 1장에서는 예수님이 사역하시는데, 사람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필요라는 개념으로 한정시켜서 하나님의 풍성함을 인위적으로 받으려는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문둥병자를 고쳐주시면서 성경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제사장에게 보이고 그 나은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니시지 못하게 했고 그것은 복음 전도를 막는 것과 같은 착시현상적 실제를 나타내고 있지만 주께서는 사람들이 주님께 나오도록 하시며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는 가운데서 행하실 수 있는 분으로 나기를 나타내시고 성도들의 복음 전파에 있어서 귀감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동안 시험을 받으신 후에 있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들짐승과 같이 계셨던 것과 같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인간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기까지, 짐승의 마음과 같이 있게 되어지는 자들의 모습 그러한 다니엘의 증거(단 4:32)을 읽게 하시는 것이 본문의 이해의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에 있어서 종말의 때에 있게 되어지는 예언에 대하여서 분명함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지 않는 자들은 주검이 있는 곳(마 24:28; 눅 17:37)에 있게 되어지는 독수리처럼 되어짐으로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서기관의 의문에 대하여 주께서 말씀하신 바로써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하여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자의 모습이면서도 성경을 말씀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들 주님의 중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만을 가지고 임의적으로 당위성을 말하는 것이 주의 책망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보면 그 행함에 열심이 있는 자들 즉 문둥병자를 짊어지고 온 자들은 예수님이 그 데려온 자를 낳게 하실 것이라고 함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상식적으로나 정황적으로 볼 때에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고 존경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능력을 나타내셔서 구원과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시는 메시아로서의 존경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능력이 많으신 참으로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의사의 모습 자체로서의 존경을 말하는 것인지는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문둥병자를 보시고 네 죄사함을 얻었다고 말씀하심에 있어서는 그러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메시아적 믿음으로써 인쳐주시기 위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즉 그 낳게 해주시는 의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에서 주께서는 그에게 진정한 믿음의 실체를 마음에 두도록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죄사함을 얻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죄사함이라고 하는 것에 임의적인 실제의식을 부여하여서 그것에 비로소 목을 메는 것처럼 말하려고 하는 구원파의 입장을 지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이 주목하였던 것과 같이 예수께서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 사실적 증거였던 것입니다.
본문의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그 서기관이 더 잘 읽고 있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예수님의 재가적 입장을 읽을 수 있는데, 그 서기관의 판단에 대한 시비를 직접 거론하시면서 인자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이것은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하나님의 아들 이신 예수께 있다는 것과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예수님이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그가 그러한 것을 선언하심에 있어서는 서기관과 같은 상대적인 인식에서의 비판적 당위성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정황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심방하고 치료하시고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것과 같이 행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야적 증거와 사역과 그 풍성함인데,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그 풍성이라는 인식을 현실적인 필요성에서 이해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국한하려는 그러한 악한 모습에서 예수께서 누구이신지 그리고 예수께서 어떠한 의도로 말씀하시는지를 눈감게 만들어버려려는 것입니다.
사상사적인 입장에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확실성을 말할 수 없다는 회의적인 경향이 신앙과 신학적인 입장에 들어오면서 사회주의 복음과 같이 사회활동과 노력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비로소 복음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을 붙든다는 측면에서 사람들이 성경을 주목할 때에 과연 소위 이단인 '구원파'와같이 '죄사함'과 '구원'이라는 개념의 사실성에 비로소 의미를 두려고 하는 경향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할 것은 우리가 실용적 필요성에 따라서 구원을 실제적으로 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자신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지으신 분으로서 믿는 것이 절대적으로 합당한 것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고 그러한 것은 이미 주의 정하신 바 구원을 실제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흐름을 주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바라봄에서 비롯되어질 때에 진정 생명의 떡이 진정한 양식의 떡으로 나타날 것이며,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 생명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이 변질되어져서 신앙의 식중독을 가져오게 될 것이며 급기야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잘해보자는 인지상정과 또 잘못된 것에 대한 상대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유익성을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보편의식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그 실존을 말하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을 때에는 느부갓네살의 이름과 같이 즉 '지경을 확고히하다'라는 그 뜻과 같이 임의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는 가운데서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적 입장에서 짐승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인간나라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기까지 묶여있어야하는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인용하더라도 그것이 정당화되어질 수 있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이심을 먼저 기억하고 그가운데서의 사실의 실존을 비로소 말할 수 있을 때에 진정한 성경적인 신앙을 가지고 바른 생명의 떡되신 예수님으로 그 풍성함과 구원함을 증거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서기관과 같이 성경을 많이 알고, 지위를 가졌다고 하나 그 실제의식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비로소 두는 것보다도 다른 것을 우선시하고 실제화한다면 그것은 서기관과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 대한 것을 믿지 못하는 가운데서 주의 판단에 침묵하여야 할 것이며 그 진밖에,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신앙이 되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벗어나서 참으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 가운데서 말씀하심의 실제의식을 비로소 잘 구별하여 보는 가운데 참으로 생명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귀한 주의 성도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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