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1월 28, 2005

이가봇의 영광

2005년 11월 27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4:1-22
이가봇의 영광

사람들은 말하기를 어떤 실제적이지 못한 모습을 비교하여 ‘속빈 강정’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원래 과자류로써 ‘강정’이라는 것은 아주 맛있고 좋은 그것이지만 형태적 특성을 고려해서 실속이라는 개념의 부재를 가르킬 때에 사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실증사회에서나 결과가 중요한 그러한 것에 있어서의 가치판단을 하는 그러한 문화에 있어서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러면서도 그러한 결과들의 연속성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나중이라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데 그 되어지는 일들에 대하여서 실증적인 개념은 있어도 그것의 판단 기준의 신실하지 못함에 있어서 실제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냉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실재와 실제적인 것을 따라 판단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사회이면서도 그것의 기준이라고 함을 바르게 준비하지 못한다면 그가 추구한 그 영광과 실제는 의미를 상실한다고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무엇이 진정한 실제인가 하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상대적인 것만을 따라 비로소 판단하는 실제적인 판단은 그 영광이 떠난 것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참되게 신앙생활하게 되는 가운데서도 실상은 그 영광이 의문시되어지는 가운데서의 모습은 세상에 빛이 되라고 하신 가운데서 등불을 켜지 못하는 모습이 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9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됨과 비교되어지는 정황으로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과 전투를 행함에서 패배하고 어찌되어진 것인가를 논하는 가운데서 실로에서 그룹 사이에 계신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왔음과 그 제사장들은 엘리와 비느하스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옴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기충천하였고 오히려 블레셋 사람들이 상식선에서의 경건의 모양을 취하며 담대히 이스라엘과 전투하게 되었는데 이스라엘은 패하고 여호와의 궤는 빼앗기고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전투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에서 달려나와 그 옷을 찢고 엘리제사장에게 패전 소식과 아들들의 죽임 당함을 이야기하매 나이 많고 비둔하여 눈이 어둔 그는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엘리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산기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궤 빼앗긴 것과 그 시부와 남편의 죽은 소문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아기를 낳게 되며 죽어가는데 그의 증거는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는 말과 함께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비느하스의 아내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실증적인 측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모습이었음을 주목하며 이러한 것은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하는 것을 켜지 못하는 미련한 자로 나타나고 있고 이것은 더 나아가서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미련한 처녀들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음을 표현하시고 있음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과 대조되어지는 가운데서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등불이 모두 꺼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패배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예정하신 가운데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과 사무엘에게 주어진 계시로서 엘리에게 알려진 것이 그의 아들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삼상 2:34; 삼상 3:13,14)

이러한 주의 말씀하심을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그 나타내심의 사실을 믿었다면 엘리는 자신의 아들들을 회개하게 하는 그러한 중심을 가지도록 가르쳤어야 했는데 그러한 것은 기록되어지지 않고 있고 처음부터 상식적으로 상대적으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는 개념으로 일관했던 것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이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말씀을 하심과 그 가운데서 사실 규명을 찾아야 한다는 것에 별로 마음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엘리 자신의 목이 부러진 것의 사실조차도 받지 못하게 되었고 그의 며느리, 그의 아들 비느하스, 그의 기업의 영광인 그가 볼 때에 그가 그 기업을 실제적으로 이을 수 없음을 주목하는 비운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좀더 주목하면 엘리의 가르침은 상식적인 설명의 합리적인 것만 생각하고 있지 그것의 재가를 하나님께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로 말미암는 현숙한 여인으로서의 며느리 즉 자기 기업의 영광을 얻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 자식은 그 낳은 자의 기업이라는 말씀을 기억할 때에 그 기업으로써 홉니는 손으로 치는 자 ‘복서’를 의미하고 즉 폭력을 가하는 자이며 비느하스는 그 이름이 ‘뱀의 입’이라는 뜻도 있는데 이는 정당함을 입지 못한 입술로서 간교함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와를 타락시켰던 뱀은 하와에게 합리적인 설명으로만 일관하여 비로소 타당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정하신 바로서의 정당함을 무시하도록 한 아주 간교한 모습이었는데, 그것에 비교되어지는 것과 같이 비느하스 즉 ‘뱀의 입’이라는 것으로 그의 기업을 가지려고 하는, 즉 복음으로 낳은 자식이 아닌 정당함이 없는, 합리성만으로 낳은 자식들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적인 그들의 존재가 부정되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죽으면서 한 말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 그 아들의 이름은 이가봇이다’라는 말에 담겨진 내용적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에게서 그 영광이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틀렸지만 그러나 그들의 입장에서의 해석한 이스라엘의 영광은 떠났다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적인 개념에서 개연적으로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면 그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과 같은 모양은 있을 수 있으나 그 경건의 능력은 상실한 것이 실제적인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달려가는 가운데서도 상대적인 납득당위성만 생각하지 말고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실제적인 것으로서 옳고 그름과 그 사실규정을 바라볼 때에 이러한 이가봇의 영광의 자리에 서는 어리석음을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다니엘이 예언한 것과 같이 갈수록 빨라지고 지식이 더해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증거하는 그러한 것이 필요하고 또한 세상의 답변을 온유함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만 상식선에서의 설명과 비로소 당위성을 생각하는 그러한 모습들은 진정 세상의 빛을 비출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빛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을 때에, 지혜로운 처녀들이 신랑 되신 주님을 만나뵙기에 예비하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교회의 모습에서는, 참으로 하나님의 들으심이라는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뜻하심에서 정당함을 따라 사실규정을 말하고 증거할 때에 참된 복음의 사실을 말하게 되고 구원의 복음의 사실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 사실인지 모르는 세상에서 빛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분별하여서, 그 ‘이가봇의 영광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참되게 세상에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온전히 증거하시는 가운데,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등불을 밝히는 깨어있는 지혜로운 처녀들과 같이 주님을 맞이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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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히 여김

2005년 11월 27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18:15-35
불쌍히 여김

사람으로서 어떤 타인의 입장을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고 인간으로서 마땅한 모습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러한 하나님을 바라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생에게 있어서 자신의 의식여부와는 상관없이 남아 있어 상식적인 사람들의 인식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을 위한 살기위한 노력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그 사람의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의 상품화 또는 판매 전략화 시키는 경향이나 아니면 속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인격을 값싸게 팔아버리는 자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이러한 죄로 인한 왜곡되어진 가운데서 가치전도(顚倒)적인 생각 속에서 성도들의 모습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그러한 어그러진 자들의 모습이 교회 안에도 밖에도 있을 수 있는 상황에서 진정으로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을 베품의 지혜는 어디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1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님의 말씀하심이 이어지고 있는데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그 사람과 상대하여 말함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또 세 사람으로 증참하게 하는 것과 교회에 말하여서 교회 공적인 측면에서 권면해도 받지 않게 되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말씀과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또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합심한 기도를 아버지께서 이루게 하실 것과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도 그들과 함께 계신다고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1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베드로가 형제를 몇 번 용서하여 주어야 할 것인지 일곱 번까지 용서할 것인지에 대하여 질문함과 그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 답변하신 것으로써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탕감 받은 자의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알도록 하시며 그것을 알지 못한 자가 옥에 처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의 말씀하심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천국에서 큰 자’에 대한 말씀하심에서 베드로가 이해하기 위한 질문을 함과 그것에 대한 답변하심이 나타나고 있는데 구체적인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이 땅위에서 이루어지게 됨에 있어서 그 분별력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의 기준으로서의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은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질문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답변으로써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로서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을 삶에 분별력 있게 온전히 나타낼 수 있는 자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관점이라고 하는 것과 손으로 몸으로 행함에 따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 기준이 비로소 하나님의 섭리로서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판단하는 자리에 설 것과 같으면 그러한 것을 온전히 버리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눈으로 판단하고 경험한 것들 모두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이 구별되지 않는 가운데서 사실의 판단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못하겠다고 하는 그것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입장에서는 그러한 것이 경험론자나 현상적 입장에서 볼 때에 어리숙한 자의 모습으로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의 판단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른 보편적 판단은 그러한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중심이 가히 천국에서 큰 자의 모습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인데 그러한 것의 일환이 길 잃은 양을 찾아 기뻐하며 양무리를 칠 때에 그 양이 잘못을 범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질서적 의미를 찾아서 목양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어떤 질서적인 것이란 개인적으로 또 두세 사람의 증참으로 객관성을 취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교회의 하나님 앞에서 판단되어진 가르침을 가르치게 하여서 받지 않는 자는 이방인과 같이 생각하라고 함과 그 사실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최종적인 개념의 사실은 주님이 이후에 심판하실 때에 있게 되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가르침을 의지적으로 받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에게 이방인으로서 생각함의 사실적 판단이 가능하고 재가가 되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것에 있어서 주의 말씀을 성경적인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말씀하심에 있어서 받지 않음은 이미 결정적인 것인데, 잘못을 회개하는 자가 그 연약함이라고 함으로 반복적일 때에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것과 그것이 또한 기만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 대하여서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베드로의 질문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형제들의 연약함에서 이루어지는 반복된 실수는 받아야 하지만 기만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가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없는 자라는 것을 분별하도록 주님께서 답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비유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 옥에 처하게 되어지는 자는 불쌍히 여김이라고 함의 마땅함을 분별하지 않은 자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탕감이라고 하는 것을 받았음에 대한 사실을 임의적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임의적인 개념으로 또한 그 미련함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탕감이라고 하는 것은 또 하나의 빚으로써 당위성을 가지는 것임을 기억할 때에 그에 따른 행동의 당위성에서의 바른 윤리적 가치를 가지는 가운데서 자신에게 행한 자에게 판단함에 있어서도 그러한 판단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의 존재의 모습으로서 마땅한 것입니다.

이러한 주인의 탕감이라는 개념에서 파생되는 정당함에서의 사실규명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은 임의적 자신의 정당함에서 사실규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하시게 되는 것은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권세라고 함이 실제적으로주어졌다고 함을 말할 때에 분별의 기준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요 19:30)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에서 죄 용서함을 입은 종들은 믿는다고 하는 형제들의 연약함에 있어서는 항상 열어놓지만 기만적인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 사실 규정을 하는 중심이 없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연약함을 받게 되는 불쌍히 여김을 받음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사실로 받음에 당연함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과 신앙에 대한 토론을 하게되었는데 그 사람의 증거가 합당하지 못하여 비난을 받을 때면 의래히 자신은 교회에 다닌다는 말을 하면서 위기모면을 조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정으로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사실규정을 하는 중심이 있어야 하였는데 그에게는 그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기만하는 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어떤 비슷한 모습으로 양의 탈을 쓰고 교회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불상히 여김'이라는 점에서 맹목적으로 용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열매로 보아 연약함에서 나타나는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사실 규정을 따라 판단하려는 중심이 있는지 그 여부로 판단하여 형제로 받아 불쌍히 여김으로 대하든지 아니면 이방인과 세리의 모습으로 받음에 있어서 그 합당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실천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즉 교회의 질서에 따른 권징이라고 하는 것이 필요한 때에도 그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 기준을 알지 못하여서 교회의 어려움을 자초하는 것은 천국에서의 큰자로서의 마땅한 자로서의 모습을 갖추지도 못하고 그러한 자들로서의 마땅한 가르침을 가르치지도 못하는 것으로 주 앞에서 책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천국에서 큰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나와 아버지의 집에 왔습니다는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한 모습이 교회의 출석의 당위성과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곳에서 큰자로서 말씀하심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으로써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자존의 절대자의 상대적인 것을 가지고도 절대적인 것으로 말씀하심을 깨닫고 받음에 있어서 모습이 어린아이의 모습과 같이 나타나는 것의 실제적 모습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 서는 것과 또한 목양에 있어서 양의 탈을 쓰고 오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즉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사실규정이라고 함에서 신앙의 사실로 받는여부를 따라서 형제된 자들에게 불쌍히 여김을 베푸는 마땅한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러한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서, 주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에 따른 사실 규정을 받아 주의 말씀을 진정한 사실로 받으며 그 말씀하심 안에서 형제들을 마땅히 불쌍히 여기는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천국에서의 큰 자라 칭함을 받으시는 자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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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11월 24, 2005

꺼지지 않는 등불

2005년 11월 20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3:1-21
꺼지지 않는 등불

어두운 곳을 가게 된다면 반드시 갖추게 되는 것이 등불 오늘날로 표현하면 전등과 같은 것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건전지가 소모되었다든지 아니면 불빛이 약해서 계획에 또는 해야하는 어떤 일에 있어서 차질을 빚게 될 때에는 상당히 마음고생을 단단히 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에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주님의 영광의 나라를 위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그 능력과 영광의 빛을 잘 나타내지 못한다는 의식을 느낄 때에는 그보다 더 참담한 느낌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우리 성도들은 어디에서 그러한 자리에서 벗어나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은혜의 자리에 나가게 될까요 그것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에서의 사무엘에 관한 말씀하심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0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9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섬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던 때였다는 것과 엘리의 눈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라고 함을 말하면서 밤에 하나님이 성전에 있던 사무엘을 세 번 부르셨음과 엘리의 조언으로 하나님께 응답함을 배워 잠자리에 들었던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네 번째 여호와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큰 일을 하실 것과 엘리의 집을 영원히 심판하겠다고 함과 그 이유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에 대한 것을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아침까지 누웠다가 엘리가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물어보게 되는 것과 사무엘이 그것에 대하여서 숨김없이 답변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심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 알았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제사장 엘리의 지도를 받고 있는 사무엘과 그 당시에 하나님의 계시가 사무엘에게 있게 되어지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과 또한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신다고 하신 것이 구체적으로 또는 실제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가 하는 이 두 가지입니다.

먼저 대제사장 엘리의 지도를 받고 있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계시를 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상적인 하나님의 질서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나타내면서도 그 질서라는 개념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지 못할 때에는 질서적 정당함이 부인되어지고 주의 뜻하심 안에서 자신의 기뻐하시는 질서를 창조적으로 선택하시고 그 뜻하심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기준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을 수 있는 자로 은혜를 베푸심의 자리에 세우심이 그것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들으심’이라는 이름의 뜻으로부터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한 존재적 입장에서 사실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엘리의 모습과 그의 아들들의 모습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진정 그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라고 함의 뜻하심을 따라서 신앙의 양심대로 섬겼던 것입니다. 즉 부정되어질 수 있는 상대성 속에서도 주의 뜻하심 안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그는 엘리의 성전에서 그 제사장과는 달리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언급한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한 그러한 뜻하심을 따르는 가운데서 그에게서 나오는 말을 하나님께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사실구별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적당한 상식적 가르침으로 죄악을 죄악의 실제로 생각하지 못한 자들에게 큰 경종이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그와 같은 자존의 하나님의 뜻하심에서의 실제적인 사실 규정을 받게 되어지는 것이 없는 가운데 '멸망의 가증한 것들'(마 15:24)이 있게 되지만 그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와 관련되어서 한 가지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은 마태복음 18장에 나타나는 천국에서 큰 자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되고 그러한 자를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잃은 양을 위한 열정을 가지도록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서 받쳐진 어린 아이의 믿음의 오병이어로써 벳세다들녁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것과 주의 축사하신 것을 제자들이 나누어주어 사천 명을 먹이신 것과 같이 어린아이의 믿음의 중심을 가지게 되는 때가 있게 되어질 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서 사실 규정을 다 상대적인 것으로 알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드린 것을 업신여기고 그렇게 행한 아이들의 잘못과 그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를 실제적으로 가르쳐 회개하게 하는 것을 행하지 않은 자들이 책망받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사도의 가르침으로서의 성경말씀 안에서 그 삶의 정당함을 찾을 때에 과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증거하는 등불은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고 하나님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로서 자신의 뜻하심을 스스로 절대 정당하심 안에서 나타내시고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의 말씀을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결국 흔들릴 수밖에 없는 세상의 빛이라고 함이 흔들리는 것과 같이 등불이 꺼져가는 듯한 모습에서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엘리야도 그렇게 그러한 고민에서 굴속에 있고자 했던 것인데, 이것은 진정 예수님이 참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말씀하심 안에서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귀한 것이며 참으로 어둔 세상 속에서 주의 구원과 영광의 빛을 발함에 있어서 애통하는 종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의 등불로서 세상에 빛으로서 오신 예수님의 구원하심과 영광은 꺼지지 않는 등불로써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등불을 든 종들로서 신부된 자들로서 주 앞에 항상 깨어 있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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