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 27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18:15-35
불쌍히 여김
사람으로서 어떤 타인의 입장을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고 인간으로서 마땅한 모습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러한 하나님을 바라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생에게 있어서 자신의 의식여부와는 상관없이 남아 있어 상식적인 사람들의 인식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을 위한 살기위한 노력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그 사람의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의 상품화 또는 판매 전략화 시키는 경향이나 아니면 속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인격을 값싸게 팔아버리는 자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이러한 죄로 인한 왜곡되어진 가운데서 가치전도(顚倒)적인 생각 속에서 성도들의 모습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그러한 어그러진 자들의 모습이 교회 안에도 밖에도 있을 수 있는 상황에서 진정으로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을 베품의 지혜는 어디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1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님의 말씀하심이 이어지고 있는데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그 사람과 상대하여 말함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또 세 사람으로 증참하게 하는 것과 교회에 말하여서 교회 공적인 측면에서 권면해도 받지 않게 되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말씀과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또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합심한 기도를 아버지께서 이루게 하실 것과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도 그들과 함께 계신다고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1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베드로가 형제를 몇 번 용서하여 주어야 할 것인지 일곱 번까지 용서할 것인지에 대하여 질문함과 그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 답변하신 것으로써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탕감 받은 자의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알도록 하시며 그것을 알지 못한 자가 옥에 처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의 말씀하심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천국에서 큰 자’에 대한 말씀하심에서 베드로가 이해하기 위한 질문을 함과 그것에 대한 답변하심이 나타나고 있는데 구체적인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이 땅위에서 이루어지게 됨에 있어서 그 분별력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의 기준으로서의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은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질문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답변으로써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로서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을 삶에 분별력 있게 온전히 나타낼 수 있는 자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관점이라고 하는 것과 손으로 몸으로 행함에 따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 기준이 비로소 하나님의 섭리로서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판단하는 자리에 설 것과 같으면 그러한 것을 온전히 버리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눈으로 판단하고 경험한 것들 모두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이 구별되지 않는 가운데서 사실의 판단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못하겠다고 하는 그것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입장에서는 그러한 것이 경험론자나 현상적 입장에서 볼 때에 어리숙한 자의 모습으로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의 판단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른 보편적 판단은 그러한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중심이 가히 천국에서 큰 자의 모습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인데 그러한 것의 일환이 길 잃은 양을 찾아 기뻐하며 양무리를 칠 때에 그 양이 잘못을 범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질서적 의미를 찾아서 목양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어떤 질서적인 것이란 개인적으로 또 두세 사람의 증참으로 객관성을 취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교회의 하나님 앞에서 판단되어진 가르침을 가르치게 하여서 받지 않는 자는 이방인과 같이 생각하라고 함과 그 사실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최종적인 개념의 사실은 주님이 이후에 심판하실 때에 있게 되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가르침을 의지적으로 받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에게 이방인으로서 생각함의 사실적 판단이 가능하고 재가가 되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것에 있어서 주의 말씀을 성경적인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말씀하심에 있어서 받지 않음은 이미 결정적인 것인데, 잘못을 회개하는 자가 그 연약함이라고 함으로 반복적일 때에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것과 그것이 또한 기만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 대하여서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베드로의 질문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형제들의 연약함에서 이루어지는 반복된 실수는 받아야 하지만 기만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가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없는 자라는 것을 분별하도록 주님께서 답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비유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 옥에 처하게 되어지는 자는 불쌍히 여김이라고 함의 마땅함을 분별하지 않은 자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탕감이라고 하는 것을 받았음에 대한 사실을 임의적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임의적인 개념으로 또한 그 미련함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탕감이라고 하는 것은 또 하나의 빚으로써 당위성을 가지는 것임을 기억할 때에 그에 따른 행동의 당위성에서의 바른 윤리적 가치를 가지는 가운데서 자신에게 행한 자에게 판단함에 있어서도 그러한 판단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의 존재의 모습으로서 마땅한 것입니다.
이러한 주인의 탕감이라는 개념에서 파생되는 정당함에서의 사실규명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은 임의적 자신의 정당함에서 사실규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하시게 되는 것은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권세라고 함이 실제적으로주어졌다고 함을 말할 때에 분별의 기준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요 19:30)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에서 죄 용서함을 입은 종들은 믿는다고 하는 형제들의 연약함에 있어서는 항상 열어놓지만 기만적인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 사실 규정을 하는 중심이 없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연약함을 받게 되는 불쌍히 여김을 받음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사실로 받음에 당연함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과 신앙에 대한 토론을 하게되었는데 그 사람의 증거가 합당하지 못하여 비난을 받을 때면 의래히 자신은 교회에 다닌다는 말을 하면서 위기모면을 조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정으로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사실규정을 하는 중심이 있어야 하였는데 그에게는 그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기만하는 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어떤 비슷한 모습으로 양의 탈을 쓰고 교회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불상히 여김'이라는 점에서 맹목적으로 용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열매로 보아 연약함에서 나타나는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사실 규정을 따라 판단하려는 중심이 있는지 그 여부로 판단하여 형제로 받아 불쌍히 여김으로 대하든지 아니면 이방인과 세리의 모습으로 받음에 있어서 그 합당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실천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즉 교회의 질서에 따른 권징이라고 하는 것이 필요한 때에도 그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 기준을 알지 못하여서 교회의 어려움을 자초하는 것은 천국에서의 큰자로서의 마땅한 자로서의 모습을 갖추지도 못하고 그러한 자들로서의 마땅한 가르침을 가르치지도 못하는 것으로 주 앞에서 책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천국에서 큰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나와 아버지의 집에 왔습니다는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한 모습이 교회의 출석의 당위성과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곳에서 큰자로서 말씀하심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으로써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자존의 절대자의 상대적인 것을 가지고도 절대적인 것으로 말씀하심을 깨닫고 받음에 있어서 모습이 어린아이의 모습과 같이 나타나는 것의 실제적 모습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 서는 것과 또한 목양에 있어서 양의 탈을 쓰고 오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즉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사실규정이라고 함에서 신앙의 사실로 받는여부를 따라서 형제된 자들에게 불쌍히 여김을 베푸는 마땅한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러한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서, 주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에 따른 사실 규정을 받아 주의 말씀을 진정한 사실로 받으며 그 말씀하심 안에서 형제들을 마땅히 불쌍히 여기는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천국에서의 큰 자라 칭함을 받으시는 자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마18:15-35
불쌍히 여김
사람으로서 어떤 타인의 입장을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고 인간으로서 마땅한 모습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러한 하나님을 바라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생에게 있어서 자신의 의식여부와는 상관없이 남아 있어 상식적인 사람들의 인식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을 위한 살기위한 노력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그 사람의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의 상품화 또는 판매 전략화 시키는 경향이나 아니면 속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인격을 값싸게 팔아버리는 자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이러한 죄로 인한 왜곡되어진 가운데서 가치전도(顚倒)적인 생각 속에서 성도들의 모습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그러한 어그러진 자들의 모습이 교회 안에도 밖에도 있을 수 있는 상황에서 진정으로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을 베품의 지혜는 어디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1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님의 말씀하심이 이어지고 있는데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그 사람과 상대하여 말함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또 세 사람으로 증참하게 하는 것과 교회에 말하여서 교회 공적인 측면에서 권면해도 받지 않게 되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말씀과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또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합심한 기도를 아버지께서 이루게 하실 것과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도 그들과 함께 계신다고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1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베드로가 형제를 몇 번 용서하여 주어야 할 것인지 일곱 번까지 용서할 것인지에 대하여 질문함과 그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 답변하신 것으로써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탕감 받은 자의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알도록 하시며 그것을 알지 못한 자가 옥에 처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의 말씀하심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천국에서 큰 자’에 대한 말씀하심에서 베드로가 이해하기 위한 질문을 함과 그것에 대한 답변하심이 나타나고 있는데 구체적인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이 땅위에서 이루어지게 됨에 있어서 그 분별력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의 기준으로서의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은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질문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답변으로써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로서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을 삶에 분별력 있게 온전히 나타낼 수 있는 자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관점이라고 하는 것과 손으로 몸으로 행함에 따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 기준이 비로소 하나님의 섭리로서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판단하는 자리에 설 것과 같으면 그러한 것을 온전히 버리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눈으로 판단하고 경험한 것들 모두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이 구별되지 않는 가운데서 사실의 판단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못하겠다고 하는 그것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입장에서는 그러한 것이 경험론자나 현상적 입장에서 볼 때에 어리숙한 자의 모습으로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의 판단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른 보편적 판단은 그러한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중심이 가히 천국에서 큰 자의 모습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인데 그러한 것의 일환이 길 잃은 양을 찾아 기뻐하며 양무리를 칠 때에 그 양이 잘못을 범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질서적 의미를 찾아서 목양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어떤 질서적인 것이란 개인적으로 또 두세 사람의 증참으로 객관성을 취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교회의 하나님 앞에서 판단되어진 가르침을 가르치게 하여서 받지 않는 자는 이방인과 같이 생각하라고 함과 그 사실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최종적인 개념의 사실은 주님이 이후에 심판하실 때에 있게 되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가르침을 의지적으로 받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에게 이방인으로서 생각함의 사실적 판단이 가능하고 재가가 되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것에 있어서 주의 말씀을 성경적인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말씀하심에 있어서 받지 않음은 이미 결정적인 것인데, 잘못을 회개하는 자가 그 연약함이라고 함으로 반복적일 때에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것과 그것이 또한 기만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 대하여서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베드로의 질문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형제들의 연약함에서 이루어지는 반복된 실수는 받아야 하지만 기만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가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없는 자라는 것을 분별하도록 주님께서 답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비유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 옥에 처하게 되어지는 자는 불쌍히 여김이라고 함의 마땅함을 분별하지 않은 자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탕감이라고 하는 것을 받았음에 대한 사실을 임의적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임의적인 개념으로 또한 그 미련함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탕감이라고 하는 것은 또 하나의 빚으로써 당위성을 가지는 것임을 기억할 때에 그에 따른 행동의 당위성에서의 바른 윤리적 가치를 가지는 가운데서 자신에게 행한 자에게 판단함에 있어서도 그러한 판단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의 존재의 모습으로서 마땅한 것입니다.
이러한 주인의 탕감이라는 개념에서 파생되는 정당함에서의 사실규명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은 임의적 자신의 정당함에서 사실규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하시게 되는 것은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권세라고 함이 실제적으로주어졌다고 함을 말할 때에 분별의 기준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요 19:30)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에서 죄 용서함을 입은 종들은 믿는다고 하는 형제들의 연약함에 있어서는 항상 열어놓지만 기만적인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 사실 규정을 하는 중심이 없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연약함을 받게 되는 불쌍히 여김을 받음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사실로 받음에 당연함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과 신앙에 대한 토론을 하게되었는데 그 사람의 증거가 합당하지 못하여 비난을 받을 때면 의래히 자신은 교회에 다닌다는 말을 하면서 위기모면을 조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정으로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사실규정을 하는 중심이 있어야 하였는데 그에게는 그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기만하는 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어떤 비슷한 모습으로 양의 탈을 쓰고 교회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불상히 여김'이라는 점에서 맹목적으로 용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열매로 보아 연약함에서 나타나는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사실 규정을 따라 판단하려는 중심이 있는지 그 여부로 판단하여 형제로 받아 불쌍히 여김으로 대하든지 아니면 이방인과 세리의 모습으로 받음에 있어서 그 합당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실천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즉 교회의 질서에 따른 권징이라고 하는 것이 필요한 때에도 그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 기준을 알지 못하여서 교회의 어려움을 자초하는 것은 천국에서의 큰자로서의 마땅한 자로서의 모습을 갖추지도 못하고 그러한 자들로서의 마땅한 가르침을 가르치지도 못하는 것으로 주 앞에서 책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천국에서 큰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나와 아버지의 집에 왔습니다는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한 모습이 교회의 출석의 당위성과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곳에서 큰자로서 말씀하심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으로써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자존의 절대자의 상대적인 것을 가지고도 절대적인 것으로 말씀하심을 깨닫고 받음에 있어서 모습이 어린아이의 모습과 같이 나타나는 것의 실제적 모습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 서는 것과 또한 목양에 있어서 양의 탈을 쓰고 오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즉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사실규정이라고 함에서 신앙의 사실로 받는여부를 따라서 형제된 자들에게 불쌍히 여김을 베푸는 마땅한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러한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서, 주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에 따른 사실 규정을 받아 주의 말씀을 진정한 사실로 받으며 그 말씀하심 안에서 형제들을 마땅히 불쌍히 여기는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천국에서의 큰 자라 칭함을 받으시는 자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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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