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10월 17, 2006

포도가 익어갈 때에

2006년 10월 13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민13:1-33
포도가 익어갈 때에

어떤 시인은 포도의 익어가는 때를 묘사하는 시를 쓴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란 말로 서정적인 시점적 묘사로 일반 시점적인 개념을 넘어 기억속에서의 우리의 삶의 모습을 되돌아 보도록하는 시점으로 승화하여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구나가 지난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그러힌 시점적 포도익는 계절을 통해 시인은 그 말하고자 하는 중심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그것을 논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의지적 표현이라고 함에서 그 때를 말하고 있다는 점을 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에서도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민 13:20)이라고 함을 언급하시고 있음을 주목하는데 그 말씀하심의 의미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5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에 따라서 각 지파의 족장 된자 한 사람씩 선발하여서 모세가 이들을 가나안 땅을 탐지하려고 보냈음을 기록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들이 거하는 땅에 대한 것을 알아보려고 보내는데 그 때가 포도가 처음 익을 때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보냄을 받은 자들이 탐지하는 가운데서 포도송이를 메어오게 되는 것과 무화과와 석류를 취함에 따라 그 곳을 에스겔 골짜기라고 불렀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5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40일동안의 보냄을 받아 정탐을 한 자들이 돌아와서 보고를 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긍정적인 입장은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이 다녀온 족장 갈렙과는 달리 그곳을 취할 수 없는 정황임을 확신하게 되었음을 보고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 스스로 비교하여 메뚜기 같다는 어떤 피해의식까지 나타내보이는 정황적 보고를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광야 40년의 생활을 하게 되어지는 그 계기적 입장에서의 사건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족장들과 그와 함께한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때를 분별하지 못하는 그러한 중심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르는 포도가 처음익을 즈음이라고 하신 말씀은 이처럼 제철과일로써의 포도의 수확을 현실적으로 하면서도 그 성례전적인 뜻하심을 읽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와는 달리 그들의 당면적인 그 즈음, 그 시기, '포도가 익어가는 그 때'를 말씀하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게 됨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이 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때라고 하는 것을 알고 그 깨어 경성해야할 때와 그 중심을 분별하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의 이름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에 주장되어지고 표현되어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 이름의 뜻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으로써 자존의 절대자가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그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 안에서 우리 성도들의 실존이 정당한 존재로서 인치심에 따라 인정되었음과 그러한 왕적 권세와 구별하는 제사장적 권세와 증거하는 선지적 증거가 우리의 삶의 중심으로 나타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나타내시는 것으로써의 능력의 실제와 사실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이러한 증거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셨던 기도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눅 11:2; 눅 1:49),에서와 같이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자기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가운데 그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성도들의 실존적 정당함과 권세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족장들과 이어서 그들을 신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후에 족장들의 증거를 듣고 울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이라고 하는 정황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자존적 정당함을 비로소 판단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식보편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주의 말씀하심안에서 그 실존을 말할 수 있지 그렇지 않고서는 그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살펴볼 때에 이러한 중심을 바르게 가지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의 기본은 상식이라는 보편으로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보편을 판단가능하다는 개념으로 사실화하려는 어리석음을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포도가 처음 익어갈 즈음에..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몰상식을 우선적으로 재고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이성적 판단의 상식보편적 입장을 바르게 사실화하고 구별하여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때를 알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로서 메말라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그또한 다시 땅을 기경해야하는 40년 한 세대를 지나는 광야를 수고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마 21:19~21)

즉 시기를 알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열매를 찾으심에 있어서는 그 때가 바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인데 그 무화과는 세상적인 일상적 시간을 통해서만 보는 가운데 그 시간관의 사실성을 알지 못하여서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그 열매의 때를 알지 못하는 것은 자존의 절대자로부터 정당함을 얻게 되는 시기를 믿음으로 구별하여 보아야 하는데 형식적인 시간에 따른 인식으로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인 민수기에서는 에스골 골짜기에서 포도송이를 거두며 무화과와 석류 열매를 취하였지만 그 성례전적인 뜻하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포도를 거두면서도 그 때를 말씀하시는 주의 뜻하심의 사실성을 마음에 두지 않았단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의 보편성을 의지하지 않을 때에는 상대적인 보편성에 따라서 판단하는데 이는 에스골골자기에 마른뼈와 같이 소망이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겔 37:1,2)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께서 생기로 들아가게 하도록 대언하게 하심에 따라서 마른뼈들이 군대를 이룸을 주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겔 37:1~14)

말씀을 맺습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생명의 참 포도나무이시며 우리는 가지입니다. 그 가지로서 열매를 맺어야 할 즈음에 그 때를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이 진정한 사실을 말할수 있는 자들로서 그 중심을 나타내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상식적으로 교회 출석하고 그 봉사하며 그 성례전적인 섬김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열매로써 주께 드림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포도가 익어갈 때를 말씀하심에서 읽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게 될 때에,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선물로써 일반 상식과 인류의 사상적 입장을 잘 활용하고 사용하여야하겠지만 그것이 주의 뜻하심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기만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주 앞에서 단호히 분명 아니라고 하는 것과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만 된다'(고후 1:19)는 그 중심의 고백으로 힘써 행해 나아감이며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에스겔 선지와 같이 생기를 대언하는 은사를 입은 자들로서의 성령의 능력의 재가를 받은 종들로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가운데 그 포도가 익어갈 즈음에 실제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어 주께 드린바 되는 종들로서 그리고 그 섬김으로써의 열매로써 세세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귀한 은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주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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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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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0월 02, 2006

구름이 머무는 곳에

2006년 10월 2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민 9:15-23
구름이 머무는 곳에

사람들은 어떤 덧없음에 대한 것, 또는 허상에 대한 애착이라고 하는 것을 비교할 때에 '구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갑자기 용납하기 어려운 말을 한다든지, 정황적 어울림을 말하지 못한다고 공감할 수 있는 가운데서 표현되어진 말에 대하여서 '아니 애가 무슨 각중에 무슨 뜬 구름 잡는 소리를 하냐?'라는 말로 핀잔에 비교되어지는 표현을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것입니다.

비교적 기독교에 대하여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아마도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은 구름에 비교되어지는 기독교의 정체성과 성도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묘사하기를 말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물론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과 기술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옳다는 개념은 항상 같은 의미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성막을 설치하고 다시 걷어서 그 구름이 머무는 곳에 거하게 되는 그 모습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이 구름따라 세월따라 헛도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지적할 수 있는데 맹목적으로 성경을 인용가능함을 따르는 자들에게 정작 성경이 그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는 분명하게 사실적으로 증거함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과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말씀은 그러한 세상의 현상적 판단과 부당한 인용적 오용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5절에서 23절까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심에 따라서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그 증거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위에 불모양과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음과 항상 낮에는 구름 밤에는 불모양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을 따라 진행하였고 진을 쳤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보에 있어서도 그 구름이 떠오르기 전까지 그 기간이 짧든지 길든지 머물러 있었음과 떠오르면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인도하심의 사실 안에서 그들의 행보를 그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구름을 따라 행하였음을 기록하고 있고,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고 또 모세로 전하신 여호와의 명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통념적으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구름의 의미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구름을 통한 증거가 그 동일한 표현이 가능하면서도 실제적으로 어떤 다른 차원에서 증거되어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민수기 9장과 그 내용적 증거라고 함의 문맥적 증거를 간단히 살펴보고 이어지는 오늘의 민수기 본문의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민수기의 이름은 그 당시 정황적 인식 즉, 책의 첫 부분의 언어를 사용하는 인식들 따라서 '수'(numbers)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수'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의 갯수를 세다'와 같은 전제적 의미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관심대상에 관련된 경우에 관한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그 관심대상에 대한 '헤아림'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이 민수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보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하심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시게 하시도록 그 백성들을 먼저 헤아리심과 그들에게 적절하고 합당한 생활에 대한 기술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으로 우리 주님께서 '스스로 헤아리라'(막 4:24)고 말씀하심과 사도들의 그 가르침의 연속성에서 '좋은 것을 헤아려 취하라'(살전 5:21)고 함과 같은 것은 이 민수기적인 측면에서 이미 증거되어진 것임을 주목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민수기에서는 출애굽 이후 광야 시내산에서 이제 광야 여정을 출발함에 있어서 소위 인원점검이라고 할 수 있는 백성들의 수를 파악하게 되어지는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할 수 있는 자들로서의 공식적 비공식적 모습을 일괄적으로 읽도록 하시고 장자의 권한 대행이라고 할 수 있는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처음난 자들의 위치에서 행할 수 있도록 구별을 받고 처음난 자들의 속전이라고 하는 것으로 레위인들의 달란트적인 기업을 이루게 하심을 주목하고 그 성막의 기구들도 기름부어 성별하였음을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 앞에서는 유월절을 지냄에 있어서 시체로써 더러워짐을 인한 유월절 지냄에 대한 것을 여호와께 물어서 결정하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성례전적이면서도 실제의 구름의 이동을 통해 그 약속의 땅을 향한 행보를 내 뒤디고 여호와께서 맡기신 직임을 지켰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의 계시를 나타내는 성례전적인 측면에서의 실제로써 '구름'은 세상의 자연현상적 입장에서 구름에 대한 인식과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측면에서 덧없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해되어질 수 있다는 것과 용납의 정당함을 같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먼저 이러한 일반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구름에 대한 통념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죄 가운데서 이루어진 불가지론적 입장을 나타나는 것이고 죄로 인한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판단을 받는 가운데서 있게 되어지는 하나의 인식인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인정하고 하지 않고의 여부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즉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그 실재라고 하는 것에 입각한 그 실제라는 개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사는가에 대한 답변적 입장을 아무리 헤아리려고 해도 그것을 헤아릴 수 없는데 그렇게 대수롭게 보이지 않는 손에 잡히지 않는 구름을 따르는 것과 같은 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일반적인 자연적인 관점에서는 일말의 타당성이 있으나, 그러나 주의 계시라고 하는 것은 '자존자의 자기 증거'라고 하는 것의 실존적 정당함이 있기 때문에 그 자존자의 자존적 절대 보편의 재가가 있는 일반적인 형태의 성경의 특별영감은 일반적인 오늘날의 인생에 있어서 일반적인 그 영감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생각과 그 표현이라고 하는 것의 비판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습니다.

판단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도 비판의 사실의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재고요청을 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해도, 절대라는 범주의 재가를 받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여전히 그 절대에 비길 수 있는 비판과 그에 따른 부정적 규정의 사실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해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찾기를 거절한 불순종의 모습들에서는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하나님의 재가가 있는 것외에는 일반적인 은총적 입장에서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헛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전 1:2,3)

그러나 이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구름을 따른다는 실제의 개념을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헛됨을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서의 사실이 절대의 보편적 정당함을 부여받았음을 기억할 때에는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시의 실존과 정당한 인생의 행보의 실재와 실제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생활이 헛됨의 비판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하여도, 결코 헛됨이라는 판단의 사실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하여서 불가지적 입장에서 현실적인 사실성을 임의적으로 규정하여서 열심히 우리의 삶을 경영한다고 하여도 인생의 실존과 사실에 대하여서 절대적인 확신과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를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구름을 잡는 헛된 인생이 되어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서 반문되어질 수 있는 것을 증거하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구름을 따르는 것과 같은 현실에서 누가 별볼일 없어 보이는 신앙생활에 의미를 두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주께서 말씀하신 이상 그러한 기우적인 개념의 판단에 의미를 비로소 부여할 필요성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더우기 오늘 본문에서 구름과 '불 모양'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바로 구름과 이질적인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재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요한 계시록에서는 '구름위에 인자가 있는데 그가 낮을 휘두르니 곡식이 거두어짐'(계 14:14~20)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주의 구원하심과 심판하심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주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며 철장으로 심판하실 예수님의 사역적 증거를 주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구름이 머무는 곳, 쓸데없이 소위 '시간죽인다'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는 용납부당함을 말할 수 있는 헛됨을 말하는 곳을 의미하는 것으로 통념화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세상적으로 비판적 입장을 취해본다면, 우리 인생이 헛되다는 측면에서 별로 특정한 장소를 말하기 보다는 인생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곳에서 어떤 특별한 선민의식을 가진 것과 같이 말한다면 한마디로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미련한 웃음의 행보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자기의 머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아주 평범해보이고 헛된 삶의 연속과 별로 차이없어 보이는 신앙생활 하지만, 자존의 절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세우셨음의 정당함을 의지하여 헤아려 볼 때에, 우리 성도의 실존과 행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그러한 구름을 따르는 헛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인생의 실존과 사실로써의 구원을 보게 되며 그 헤아림 속에서 주의 헤아리심으로 더욱 받게 되는 가운데 잘 했다 칭찬이 있는 주의 맡겨진 소임을 보게 되며 감당하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성도로서의 모습의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를 바르게 보며, 그 직임을 잘 감당해내시는 가운데 잘했다 칭찬함을 얻게 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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