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 2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민 9:15-23
구름이 머무는 곳에
사람들은 어떤 덧없음에 대한 것, 또는 허상에 대한 애착이라고 하는 것을 비교할 때에 '구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갑자기 용납하기 어려운 말을 한다든지, 정황적 어울림을 말하지 못한다고 공감할 수 있는 가운데서 표현되어진 말에 대하여서 '아니 애가 무슨 각중에 무슨 뜬 구름 잡는 소리를 하냐?'라는 말로 핀잔에 비교되어지는 표현을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것입니다.
비교적 기독교에 대하여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아마도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은 구름에 비교되어지는 기독교의 정체성과 성도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묘사하기를 말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물론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과 기술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옳다는 개념은 항상 같은 의미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성막을 설치하고 다시 걷어서 그 구름이 머무는 곳에 거하게 되는 그 모습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이 구름따라 세월따라 헛도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지적할 수 있는데 맹목적으로 성경을 인용가능함을 따르는 자들에게 정작 성경이 그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는 분명하게 사실적으로 증거함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과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말씀은 그러한 세상의 현상적 판단과 부당한 인용적 오용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5절에서 23절까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심에 따라서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그 증거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위에 불모양과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음과 항상 낮에는 구름 밤에는 불모양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을 따라 진행하였고 진을 쳤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보에 있어서도 그 구름이 떠오르기 전까지 그 기간이 짧든지 길든지 머물러 있었음과 떠오르면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인도하심의 사실 안에서 그들의 행보를 그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구름을 따라 행하였음을 기록하고 있고,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고 또 모세로 전하신 여호와의 명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통념적으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구름의 의미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구름을 통한 증거가 그 동일한 표현이 가능하면서도 실제적으로 어떤 다른 차원에서 증거되어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민수기 9장과 그 내용적 증거라고 함의 문맥적 증거를 간단히 살펴보고 이어지는 오늘의 민수기 본문의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민수기의 이름은 그 당시 정황적 인식 즉, 책의 첫 부분의 언어를 사용하는 인식들 따라서 '수'(numbers)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수'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의 갯수를 세다'와 같은 전제적 의미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관심대상에 관련된 경우에 관한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그 관심대상에 대한 '헤아림'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이 민수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보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하심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시게 하시도록 그 백성들을 먼저 헤아리심과 그들에게 적절하고 합당한 생활에 대한 기술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으로 우리 주님께서 '스스로 헤아리라'(막 4:24)고 말씀하심과 사도들의 그 가르침의 연속성에서 '좋은 것을 헤아려 취하라'(살전 5:21)고 함과 같은 것은 이 민수기적인 측면에서 이미 증거되어진 것임을 주목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민수기에서는 출애굽 이후 광야 시내산에서 이제 광야 여정을 출발함에 있어서 소위 인원점검이라고 할 수 있는 백성들의 수를 파악하게 되어지는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할 수 있는 자들로서의 공식적 비공식적 모습을 일괄적으로 읽도록 하시고 장자의 권한 대행이라고 할 수 있는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처음난 자들의 위치에서 행할 수 있도록 구별을 받고 처음난 자들의 속전이라고 하는 것으로 레위인들의 달란트적인 기업을 이루게 하심을 주목하고 그 성막의 기구들도 기름부어 성별하였음을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 앞에서는 유월절을 지냄에 있어서 시체로써 더러워짐을 인한 유월절 지냄에 대한 것을 여호와께 물어서 결정하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성례전적이면서도 실제의 구름의 이동을 통해 그 약속의 땅을 향한 행보를 내 뒤디고 여호와께서 맡기신 직임을 지켰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의 계시를 나타내는 성례전적인 측면에서의 실제로써 '구름'은 세상의 자연현상적 입장에서 구름에 대한 인식과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측면에서 덧없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해되어질 수 있다는 것과 용납의 정당함을 같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먼저 이러한 일반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구름에 대한 통념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죄 가운데서 이루어진 불가지론적 입장을 나타나는 것이고 죄로 인한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판단을 받는 가운데서 있게 되어지는 하나의 인식인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인정하고 하지 않고의 여부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즉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그 실재라고 하는 것에 입각한 그 실제라는 개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사는가에 대한 답변적 입장을 아무리 헤아리려고 해도 그것을 헤아릴 수 없는데 그렇게 대수롭게 보이지 않는 손에 잡히지 않는 구름을 따르는 것과 같은 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일반적인 자연적인 관점에서는 일말의 타당성이 있으나, 그러나 주의 계시라고 하는 것은 '자존자의 자기 증거'라고 하는 것의 실존적 정당함이 있기 때문에 그 자존자의 자존적 절대 보편의 재가가 있는 일반적인 형태의 성경의 특별영감은 일반적인 오늘날의 인생에 있어서 일반적인 그 영감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생각과 그 표현이라고 하는 것의 비판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습니다.
판단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도 비판의 사실의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재고요청을 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해도, 절대라는 범주의 재가를 받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여전히 그 절대에 비길 수 있는 비판과 그에 따른 부정적 규정의 사실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해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찾기를 거절한 불순종의 모습들에서는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하나님의 재가가 있는 것외에는 일반적인 은총적 입장에서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헛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전 1:2,3)
그러나 이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구름을 따른다는 실제의 개념을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헛됨을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서의 사실이 절대의 보편적 정당함을 부여받았음을 기억할 때에는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시의 실존과 정당한 인생의 행보의 실재와 실제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생활이 헛됨의 비판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하여도, 결코 헛됨이라는 판단의 사실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하여서 불가지적 입장에서 현실적인 사실성을 임의적으로 규정하여서 열심히 우리의 삶을 경영한다고 하여도 인생의 실존과 사실에 대하여서 절대적인 확신과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를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구름을 잡는 헛된 인생이 되어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서 반문되어질 수 있는 것을 증거하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구름을 따르는 것과 같은 현실에서 누가 별볼일 없어 보이는 신앙생활에 의미를 두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주께서 말씀하신 이상 그러한 기우적인 개념의 판단에 의미를 비로소 부여할 필요성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더우기 오늘 본문에서 구름과 '불 모양'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바로 구름과 이질적인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재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요한 계시록에서는 '구름위에 인자가 있는데 그가 낮을 휘두르니 곡식이 거두어짐'(계 14:14~20)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주의 구원하심과 심판하심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주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며 철장으로 심판하실 예수님의 사역적 증거를 주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구름이 머무는 곳, 쓸데없이 소위 '시간죽인다'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는 용납부당함을 말할 수 있는 헛됨을 말하는 곳을 의미하는 것으로 통념화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세상적으로 비판적 입장을 취해본다면, 우리 인생이 헛되다는 측면에서 별로 특정한 장소를 말하기 보다는 인생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곳에서 어떤 특별한 선민의식을 가진 것과 같이 말한다면 한마디로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미련한 웃음의 행보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자기의 머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아주 평범해보이고 헛된 삶의 연속과 별로 차이없어 보이는 신앙생활 하지만, 자존의 절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세우셨음의 정당함을 의지하여 헤아려 볼 때에, 우리 성도의 실존과 행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그러한 구름을 따르는 헛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인생의 실존과 사실로써의 구원을 보게 되며 그 헤아림 속에서 주의 헤아리심으로 더욱 받게 되는 가운데 잘 했다 칭찬이 있는 주의 맡겨진 소임을 보게 되며 감당하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성도로서의 모습의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를 바르게 보며, 그 직임을 잘 감당해내시는 가운데 잘했다 칭찬함을 얻게 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민 9:15-23
구름이 머무는 곳에
사람들은 어떤 덧없음에 대한 것, 또는 허상에 대한 애착이라고 하는 것을 비교할 때에 '구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갑자기 용납하기 어려운 말을 한다든지, 정황적 어울림을 말하지 못한다고 공감할 수 있는 가운데서 표현되어진 말에 대하여서 '아니 애가 무슨 각중에 무슨 뜬 구름 잡는 소리를 하냐?'라는 말로 핀잔에 비교되어지는 표현을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것입니다.
비교적 기독교에 대하여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아마도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은 구름에 비교되어지는 기독교의 정체성과 성도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묘사하기를 말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물론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과 기술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옳다는 개념은 항상 같은 의미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성막을 설치하고 다시 걷어서 그 구름이 머무는 곳에 거하게 되는 그 모습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이 구름따라 세월따라 헛도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지적할 수 있는데 맹목적으로 성경을 인용가능함을 따르는 자들에게 정작 성경이 그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는 분명하게 사실적으로 증거함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과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말씀은 그러한 세상의 현상적 판단과 부당한 인용적 오용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5절에서 23절까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심에 따라서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그 증거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위에 불모양과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음과 항상 낮에는 구름 밤에는 불모양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을 따라 진행하였고 진을 쳤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보에 있어서도 그 구름이 떠오르기 전까지 그 기간이 짧든지 길든지 머물러 있었음과 떠오르면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인도하심의 사실 안에서 그들의 행보를 그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구름을 따라 행하였음을 기록하고 있고,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고 또 모세로 전하신 여호와의 명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통념적으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구름의 의미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구름을 통한 증거가 그 동일한 표현이 가능하면서도 실제적으로 어떤 다른 차원에서 증거되어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민수기 9장과 그 내용적 증거라고 함의 문맥적 증거를 간단히 살펴보고 이어지는 오늘의 민수기 본문의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민수기의 이름은 그 당시 정황적 인식 즉, 책의 첫 부분의 언어를 사용하는 인식들 따라서 '수'(numbers)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수'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의 갯수를 세다'와 같은 전제적 의미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관심대상에 관련된 경우에 관한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그 관심대상에 대한 '헤아림'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이 민수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보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하심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시게 하시도록 그 백성들을 먼저 헤아리심과 그들에게 적절하고 합당한 생활에 대한 기술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으로 우리 주님께서 '스스로 헤아리라'(막 4:24)고 말씀하심과 사도들의 그 가르침의 연속성에서 '좋은 것을 헤아려 취하라'(살전 5:21)고 함과 같은 것은 이 민수기적인 측면에서 이미 증거되어진 것임을 주목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민수기에서는 출애굽 이후 광야 시내산에서 이제 광야 여정을 출발함에 있어서 소위 인원점검이라고 할 수 있는 백성들의 수를 파악하게 되어지는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할 수 있는 자들로서의 공식적 비공식적 모습을 일괄적으로 읽도록 하시고 장자의 권한 대행이라고 할 수 있는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처음난 자들의 위치에서 행할 수 있도록 구별을 받고 처음난 자들의 속전이라고 하는 것으로 레위인들의 달란트적인 기업을 이루게 하심을 주목하고 그 성막의 기구들도 기름부어 성별하였음을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 앞에서는 유월절을 지냄에 있어서 시체로써 더러워짐을 인한 유월절 지냄에 대한 것을 여호와께 물어서 결정하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성례전적이면서도 실제의 구름의 이동을 통해 그 약속의 땅을 향한 행보를 내 뒤디고 여호와께서 맡기신 직임을 지켰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의 계시를 나타내는 성례전적인 측면에서의 실제로써 '구름'은 세상의 자연현상적 입장에서 구름에 대한 인식과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측면에서 덧없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해되어질 수 있다는 것과 용납의 정당함을 같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먼저 이러한 일반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구름에 대한 통념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죄 가운데서 이루어진 불가지론적 입장을 나타나는 것이고 죄로 인한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판단을 받는 가운데서 있게 되어지는 하나의 인식인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인정하고 하지 않고의 여부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즉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그 실재라고 하는 것에 입각한 그 실제라는 개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사는가에 대한 답변적 입장을 아무리 헤아리려고 해도 그것을 헤아릴 수 없는데 그렇게 대수롭게 보이지 않는 손에 잡히지 않는 구름을 따르는 것과 같은 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일반적인 자연적인 관점에서는 일말의 타당성이 있으나, 그러나 주의 계시라고 하는 것은 '자존자의 자기 증거'라고 하는 것의 실존적 정당함이 있기 때문에 그 자존자의 자존적 절대 보편의 재가가 있는 일반적인 형태의 성경의 특별영감은 일반적인 오늘날의 인생에 있어서 일반적인 그 영감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생각과 그 표현이라고 하는 것의 비판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습니다.
판단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도 비판의 사실의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재고요청을 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해도, 절대라는 범주의 재가를 받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여전히 그 절대에 비길 수 있는 비판과 그에 따른 부정적 규정의 사실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해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찾기를 거절한 불순종의 모습들에서는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하나님의 재가가 있는 것외에는 일반적인 은총적 입장에서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헛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전 1:2,3)
그러나 이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구름을 따른다는 실제의 개념을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헛됨을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서의 사실이 절대의 보편적 정당함을 부여받았음을 기억할 때에는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시의 실존과 정당한 인생의 행보의 실재와 실제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생활이 헛됨의 비판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하여도, 결코 헛됨이라는 판단의 사실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하여서 불가지적 입장에서 현실적인 사실성을 임의적으로 규정하여서 열심히 우리의 삶을 경영한다고 하여도 인생의 실존과 사실에 대하여서 절대적인 확신과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를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구름을 잡는 헛된 인생이 되어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서 반문되어질 수 있는 것을 증거하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구름을 따르는 것과 같은 현실에서 누가 별볼일 없어 보이는 신앙생활에 의미를 두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주께서 말씀하신 이상 그러한 기우적인 개념의 판단에 의미를 비로소 부여할 필요성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더우기 오늘 본문에서 구름과 '불 모양'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바로 구름과 이질적인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재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요한 계시록에서는 '구름위에 인자가 있는데 그가 낮을 휘두르니 곡식이 거두어짐'(계 14:14~20)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주의 구원하심과 심판하심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주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며 철장으로 심판하실 예수님의 사역적 증거를 주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구름이 머무는 곳, 쓸데없이 소위 '시간죽인다'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는 용납부당함을 말할 수 있는 헛됨을 말하는 곳을 의미하는 것으로 통념화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세상적으로 비판적 입장을 취해본다면, 우리 인생이 헛되다는 측면에서 별로 특정한 장소를 말하기 보다는 인생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곳에서 어떤 특별한 선민의식을 가진 것과 같이 말한다면 한마디로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미련한 웃음의 행보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자기의 머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아주 평범해보이고 헛된 삶의 연속과 별로 차이없어 보이는 신앙생활 하지만, 자존의 절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세우셨음의 정당함을 의지하여 헤아려 볼 때에, 우리 성도의 실존과 행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그러한 구름을 따르는 헛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인생의 실존과 사실로써의 구원을 보게 되며 그 헤아림 속에서 주의 헤아리심으로 더욱 받게 되는 가운데 잘 했다 칭찬이 있는 주의 맡겨진 소임을 보게 되며 감당하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성도로서의 모습의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를 바르게 보며, 그 직임을 잘 감당해내시는 가운데 잘했다 칭찬함을 얻게 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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