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 13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민13:1-33
포도가 익어갈 때에
어떤 시인은 포도의 익어가는 때를 묘사하는 시를 쓴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란 말로 서정적인 시점적 묘사로 일반 시점적인 개념을 넘어 기억속에서의 우리의 삶의 모습을 되돌아 보도록하는 시점으로 승화하여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구나가 지난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그러힌 시점적 포도익는 계절을 통해 시인은 그 말하고자 하는 중심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그것을 논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의지적 표현이라고 함에서 그 때를 말하고 있다는 점을 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에서도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민 13:20)이라고 함을 언급하시고 있음을 주목하는데 그 말씀하심의 의미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5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에 따라서 각 지파의 족장 된자 한 사람씩 선발하여서 모세가 이들을 가나안 땅을 탐지하려고 보냈음을 기록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들이 거하는 땅에 대한 것을 알아보려고 보내는데 그 때가 포도가 처음 익을 때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보냄을 받은 자들이 탐지하는 가운데서 포도송이를 메어오게 되는 것과 무화과와 석류를 취함에 따라 그 곳을 에스겔 골짜기라고 불렀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5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40일동안의 보냄을 받아 정탐을 한 자들이 돌아와서 보고를 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긍정적인 입장은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이 다녀온 족장 갈렙과는 달리 그곳을 취할 수 없는 정황임을 확신하게 되었음을 보고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 스스로 비교하여 메뚜기 같다는 어떤 피해의식까지 나타내보이는 정황적 보고를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광야 40년의 생활을 하게 되어지는 그 계기적 입장에서의 사건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족장들과 그와 함께한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때를 분별하지 못하는 그러한 중심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르는 포도가 처음익을 즈음이라고 하신 말씀은 이처럼 제철과일로써의 포도의 수확을 현실적으로 하면서도 그 성례전적인 뜻하심을 읽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와는 달리 그들의 당면적인 그 즈음, 그 시기, '포도가 익어가는 그 때'를 말씀하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게 됨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이 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때라고 하는 것을 알고 그 깨어 경성해야할 때와 그 중심을 분별하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의 이름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에 주장되어지고 표현되어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 이름의 뜻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으로써 자존의 절대자가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그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 안에서 우리 성도들의 실존이 정당한 존재로서 인치심에 따라 인정되었음과 그러한 왕적 권세와 구별하는 제사장적 권세와 증거하는 선지적 증거가 우리의 삶의 중심으로 나타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나타내시는 것으로써의 능력의 실제와 사실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이러한 증거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셨던 기도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눅 11:2; 눅 1:49),에서와 같이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자기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가운데 그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성도들의 실존적 정당함과 권세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족장들과 이어서 그들을 신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후에 족장들의 증거를 듣고 울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이라고 하는 정황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자존적 정당함을 비로소 판단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식보편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주의 말씀하심안에서 그 실존을 말할 수 있지 그렇지 않고서는 그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살펴볼 때에 이러한 중심을 바르게 가지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의 기본은 상식이라는 보편으로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보편을 판단가능하다는 개념으로 사실화하려는 어리석음을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포도가 처음 익어갈 즈음에..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몰상식을 우선적으로 재고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이성적 판단의 상식보편적 입장을 바르게 사실화하고 구별하여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때를 알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로서 메말라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그또한 다시 땅을 기경해야하는 40년 한 세대를 지나는 광야를 수고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마 21:19~21)
즉 시기를 알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열매를 찾으심에 있어서는 그 때가 바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인데 그 무화과는 세상적인 일상적 시간을 통해서만 보는 가운데 그 시간관의 사실성을 알지 못하여서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그 열매의 때를 알지 못하는 것은 자존의 절대자로부터 정당함을 얻게 되는 시기를 믿음으로 구별하여 보아야 하는데 형식적인 시간에 따른 인식으로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인 민수기에서는 에스골 골짜기에서 포도송이를 거두며 무화과와 석류 열매를 취하였지만 그 성례전적인 뜻하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포도를 거두면서도 그 때를 말씀하시는 주의 뜻하심의 사실성을 마음에 두지 않았단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의 보편성을 의지하지 않을 때에는 상대적인 보편성에 따라서 판단하는데 이는 에스골골자기에 마른뼈와 같이 소망이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겔 37:1,2)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께서 생기로 들아가게 하도록 대언하게 하심에 따라서 마른뼈들이 군대를 이룸을 주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겔 37:1~14)
말씀을 맺습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생명의 참 포도나무이시며 우리는 가지입니다. 그 가지로서 열매를 맺어야 할 즈음에 그 때를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이 진정한 사실을 말할수 있는 자들로서 그 중심을 나타내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상식적으로 교회 출석하고 그 봉사하며 그 성례전적인 섬김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열매로써 주께 드림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포도가 익어갈 때를 말씀하심에서 읽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게 될 때에,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선물로써 일반 상식과 인류의 사상적 입장을 잘 활용하고 사용하여야하겠지만 그것이 주의 뜻하심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기만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주 앞에서 단호히 분명 아니라고 하는 것과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만 된다'(고후 1:19)는 그 중심의 고백으로 힘써 행해 나아감이며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에스겔 선지와 같이 생기를 대언하는 은사를 입은 자들로서의 성령의 능력의 재가를 받은 종들로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가운데 그 포도가 익어갈 즈음에 실제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어 주께 드린바 되는 종들로서 그리고 그 섬김으로써의 열매로써 세세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귀한 은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주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민13:1-33
포도가 익어갈 때에
어떤 시인은 포도의 익어가는 때를 묘사하는 시를 쓴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란 말로 서정적인 시점적 묘사로 일반 시점적인 개념을 넘어 기억속에서의 우리의 삶의 모습을 되돌아 보도록하는 시점으로 승화하여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구나가 지난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그러힌 시점적 포도익는 계절을 통해 시인은 그 말하고자 하는 중심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그것을 논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의지적 표현이라고 함에서 그 때를 말하고 있다는 점을 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에서도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민 13:20)이라고 함을 언급하시고 있음을 주목하는데 그 말씀하심의 의미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5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에 따라서 각 지파의 족장 된자 한 사람씩 선발하여서 모세가 이들을 가나안 땅을 탐지하려고 보냈음을 기록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들이 거하는 땅에 대한 것을 알아보려고 보내는데 그 때가 포도가 처음 익을 때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보냄을 받은 자들이 탐지하는 가운데서 포도송이를 메어오게 되는 것과 무화과와 석류를 취함에 따라 그 곳을 에스겔 골짜기라고 불렀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5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40일동안의 보냄을 받아 정탐을 한 자들이 돌아와서 보고를 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긍정적인 입장은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이 다녀온 족장 갈렙과는 달리 그곳을 취할 수 없는 정황임을 확신하게 되었음을 보고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 스스로 비교하여 메뚜기 같다는 어떤 피해의식까지 나타내보이는 정황적 보고를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광야 40년의 생활을 하게 되어지는 그 계기적 입장에서의 사건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족장들과 그와 함께한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때를 분별하지 못하는 그러한 중심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르는 포도가 처음익을 즈음이라고 하신 말씀은 이처럼 제철과일로써의 포도의 수확을 현실적으로 하면서도 그 성례전적인 뜻하심을 읽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와는 달리 그들의 당면적인 그 즈음, 그 시기, '포도가 익어가는 그 때'를 말씀하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게 됨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이 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때라고 하는 것을 알고 그 깨어 경성해야할 때와 그 중심을 분별하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의 이름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에 주장되어지고 표현되어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 이름의 뜻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으로써 자존의 절대자가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그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 안에서 우리 성도들의 실존이 정당한 존재로서 인치심에 따라 인정되었음과 그러한 왕적 권세와 구별하는 제사장적 권세와 증거하는 선지적 증거가 우리의 삶의 중심으로 나타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나타내시는 것으로써의 능력의 실제와 사실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이러한 증거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셨던 기도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눅 11:2; 눅 1:49),에서와 같이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자기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가운데 그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성도들의 실존적 정당함과 권세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족장들과 이어서 그들을 신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후에 족장들의 증거를 듣고 울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이라고 하는 정황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자존적 정당함을 비로소 판단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식보편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주의 말씀하심안에서 그 실존을 말할 수 있지 그렇지 않고서는 그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살펴볼 때에 이러한 중심을 바르게 가지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의 기본은 상식이라는 보편으로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보편을 판단가능하다는 개념으로 사실화하려는 어리석음을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포도가 처음 익어갈 즈음에..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몰상식을 우선적으로 재고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이성적 판단의 상식보편적 입장을 바르게 사실화하고 구별하여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때를 알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로서 메말라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그또한 다시 땅을 기경해야하는 40년 한 세대를 지나는 광야를 수고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마 21:19~21)
즉 시기를 알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열매를 찾으심에 있어서는 그 때가 바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인데 그 무화과는 세상적인 일상적 시간을 통해서만 보는 가운데 그 시간관의 사실성을 알지 못하여서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그 열매의 때를 알지 못하는 것은 자존의 절대자로부터 정당함을 얻게 되는 시기를 믿음으로 구별하여 보아야 하는데 형식적인 시간에 따른 인식으로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인 민수기에서는 에스골 골짜기에서 포도송이를 거두며 무화과와 석류 열매를 취하였지만 그 성례전적인 뜻하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포도를 거두면서도 그 때를 말씀하시는 주의 뜻하심의 사실성을 마음에 두지 않았단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의 보편성을 의지하지 않을 때에는 상대적인 보편성에 따라서 판단하는데 이는 에스골골자기에 마른뼈와 같이 소망이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겔 37:1,2)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께서 생기로 들아가게 하도록 대언하게 하심에 따라서 마른뼈들이 군대를 이룸을 주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겔 37:1~14)
말씀을 맺습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생명의 참 포도나무이시며 우리는 가지입니다. 그 가지로서 열매를 맺어야 할 즈음에 그 때를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이 진정한 사실을 말할수 있는 자들로서 그 중심을 나타내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상식적으로 교회 출석하고 그 봉사하며 그 성례전적인 섬김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열매로써 주께 드림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포도가 익어갈 때를 말씀하심에서 읽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게 될 때에,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선물로써 일반 상식과 인류의 사상적 입장을 잘 활용하고 사용하여야하겠지만 그것이 주의 뜻하심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기만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주 앞에서 단호히 분명 아니라고 하는 것과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만 된다'(고후 1:19)는 그 중심의 고백으로 힘써 행해 나아감이며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에스겔 선지와 같이 생기를 대언하는 은사를 입은 자들로서의 성령의 능력의 재가를 받은 종들로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가운데 그 포도가 익어갈 즈음에 실제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어 주께 드린바 되는 종들로서 그리고 그 섬김으로써의 열매로써 세세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귀한 은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주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