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11월 01, 2006

삼켜진 다원주의 지팡이

2006년 11월 1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민17:1-13
주님의 지팡이

인생 경영이라는 말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용하게 되지만 어릴때부터 요령을 배우는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를 세우는 가운데서 본능적으로 준비되어지는 것으로서 인식하게 될 수 있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너무 늦은 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한다면, 인생에 대하여서 조금 알 것같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어느 정도 알게 되면 머리에 이슬이 내리는, 너무 많이 와버린 것과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우리 인생경영에 있어서는 그러한 가운데서도 선함을 말할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음에 대한 것도 알게 될 때에 더욱 인생의 선함과 그 경영이라는 삶을 마음에 두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인생에 대한 것을 마음에 둘 때에 여러 상황에 대한 인식과 판단이라고 하는 것에 여러가지 기원과 이해와 상황에 대한 대안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하게 되는데 그러한 것이 오늘날에 있어서 소위 '다원주의적 시대'라는 말로 이해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여러 대안들이 있건만 어느 하나만 집착하는 듯한 접근을 한다면 그것은 너무 지나친 모습으로 옳지 못하다는 비난을 할 수 있는 것이 상식이라는 하는 보편적인 다원적 입장의 판단이라고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다원주의적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특히 성경의 가르침을 마음에 둘 때에 그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것의 다원주의적 개념에서 읽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여러가지 해석적 가능성을 따라 해석하고 신앙도 마찬가지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진정으로 주의 가르침은 어떤 말씀으로 나타나서 우리 인생경영의 일상적 삶에 계시적 가르치심으로 다스리시기를 기뻐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 성경해석중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가르침으로써 주의 지팡이로서 주의 백성을 안위하는 그러한 가르침과 그것을 행하는 종들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2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각 종족을 따라 열둘 지팡이를 취하게 하고 각 지팡이에 열 두 지파의 두령들의 이름을 그 지팡에 쓰게 하고 레위 자손의 막대기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게 하셔서 그것을 증거의 장막 안 여호와 앞에 두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본문과 세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튿날 모세가 증거 장막 안에 들어가 보니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음과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찌니라'고 기록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그들 자신이 모두 죽게 되었다고 망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말을 하고 있고, '여호와의 성막에 가까이 나아가는 자마다 다 죽사오니 우리가 다 망하여야 하리이까'라는 말을 하고 있음이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또 앞으로 더하게 되어지는 다원주의적 시대에 있어서 '어떠한 것이 주의 말씀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과 여러 '합리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인가' 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도 들 수 있는데 그러한 원망을 그치게 하는 말씀으로 우리를 헤이리시며 헤아리도록 하시는 말씀으로서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여러 인생막대기 중에 어느 것이 주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주의 택한 백성을 위로하는 안위의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시 23:4)로 받게 되는가에 대한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해석은 본문 문맥적 흐름 속에서 세워지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기에 먼저 문맥적 흐름속에서 본문의 독특성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도록 하시고 열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탐지하라고 하였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속된 표현으로 그 땅은 '그림의 떡'이지 결코 취할 수 없다는 현실적 당위성에서 실제적 판단을 말하게 되었고 이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울기까지 한 상태에 하나님의 임재에서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백성들이 받게 되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 민수기 15장의 말씀이후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합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결코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힘들어도 오히려 애굽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인 것으로 인식하고 돌아가자고 했던 것입니다.

이미 출애굽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정당함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말씀하셨는데도(민 15:41), 이들은 이제 상황적 논리를 위해서 고라와 그 함께한 자들이 모세의 권위라고 하는 것이 분수에 지난다는 것을 말하면서 자신들의 레위지파적 입장에서의 합리성을 의지하는 중심으로 말함에 모세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를 구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고라 일족은 땅이 갈라져서 삼키움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뜻하심과 섭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합리성에 잡혀서 모세가 고라자손을 죽였다는 그러한 말로 어지럽게 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염병을 명하셨습니다.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여서 향로에 불을 담아 향을 두어 그들에게 가서 속죄하라는 것을 말하고 그것에 순종하여 아론이 그들에게 가서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문맥적 정황속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문맥적 정황을 살피게 되는 것은 고라 자손과 그들의 연민적 정황을 읽어 그들을 따르는 자들의 염병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다원주의적 합리적 당위성을 생각하게 하는 것과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무엇이 사실인가 그것에 대한 가치관은 상대적이라고 할 때에 절대의 인증이 없는 가운데서는 임의적일 수밖에 없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러한 가치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없고 지적인 판단의 이상적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인생을 괴롭히는 병 중에 '간질'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염되지는 않지만 의식적 통제가 어려운 행동을 하게 되는, 생각과 달리 행동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속된 표현으로 '지랄병'이라는 병으로 알려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주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잘 사용되어지기 민망한 말입니다만 '지랄 염병하고 있네'라는 말이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구약교회의 백성들의 실존과 생활에 대한 본질적인 판단을 지랄병과 염병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그러한 병명을 가진 자들이 교회에서 고침을 받게 되는 것으로써, 그 고침의 연속성에서 있게 되어지는 인간적인 불화적 개념의 고통이며 치료하는 몸된 교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며 성화되어지는 교회로서의 현실적인 일시적 모습일 수 있음을 이해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모습이 마치 일시적으로 염병과도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섭리가 있도록 기도하며 순종하는 가운데서 그 염병을 고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개혁을 말하면서 어떤 돌을 던지고 변혁을 말하고 어떤 특단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주의 몸된 교회를 헤아리지 못한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들의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주의 안위의 지팡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볼 때에, 이런 불소시개에 해당되어지는 것과 달리, 주의 안위의 지팡이는 어떤 것인가에 주의가 환기 되어지는데, 이것은 아론의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아론의 지팡이에 창조적 생명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으로써 그 직임이 레위 특히 아론의 제사장적인 입장이라고 함을 지적하셨는데, 그 앞서 아론의 성례전적인 행위에 해당하는 모습을 주목할 수 있음이 본문 말씀에서 그렇게 받게 하심에 대한 합당함을 더욱 주목하게 한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씀하심을 주목합니다.
"아론이 모세의 명을 좇아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 간즉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는지라 이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민 16:47:48)

아론이 '죽은 자와 산자 앞에 섰을 때'라는 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그 뜻하심의 자리에 서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성례전적인 입장에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예수님이 '산다' 또는 '죽는다'와 같은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증거하심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자로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그분 자신이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는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 증거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예수께서 자존의 절대자로 자기 절대 정당함을 합당하게 의지하셔서 상대적인 모습을 취하시는 방법으로써 자신의 절대적 계시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상대성이라고 하는 합리성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상대적인 범주에서의 다원적인 비판적 입장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성이라는 것에서만 비로소 본다면 고라 즉 기회주의적 개념에서 백성의 지도자가 될 수 있고 또 그렇지 않다고 하여도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대한 것을 말함에 있어서 상대적인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소위 생각이 열린다는 보편성으로 생각에 따라서는 인정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을 시비함에 있어서는 그 실존적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이성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행동하는 소위 '지랄병'으로 알려지는 '간질환자'와 같이 여겨질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관점의 상대적 보편성에서 그 상대적 필연성으로 그러한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 이렇한 것은 상대적 보편의식을 가진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 정당함이 임의적으로도 당연한 것같이 기만되어지기 때문에 득세할 수 있는 특징적 개념이 있고 이것은 역시 염병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 성도들은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되는 이유'(고후 1:19)와 그 정당함을 의지할 때에 아론과 같이 창조적 생명의 능력을 나타내는 주의 지팡이와 같은 주의 백성을 안위하는 종들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합당하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이들은 종교라고 하는 것은 자기 합리화를 한다는 것을 놓고 비평의 개념없이 비평하고 있음을 봅니다. 자기 합리화라는 개념의 말에는 임의성이 있어서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고 그것을 주장할 때에는 보편적인 입장에서 그 비판적 당위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마음에 두고 말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합리적 비판 자체의 실존이 이미 정당함을 잃었는데 그러한 합리적인 판단의 기술이 가능하다고 해서 비로소 판단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합리성과 정당성은 그 실존적 관계에서 합리성 자체에서 정당함을 추구하지만,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그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고 인증되어지는 가운데서 국한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두 상대적인 타당성이라는 정당함을 일말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존의 절대자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에서의 상대성은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상대적인 타당성의 실존 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지팡이가 변한 뱀이 애굽의 술사의 지팡이가 변한 뱀을 삼킨 것에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켰고 이러한 주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보고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비록, 못나고 세상의 간질과 같은 염병에서 자유할 수 없는 생명력없던 나무토막 같은 우리의 모습이라고 하여도 주의 택하심을 믿고,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은총을 받을 때에는 주의 백성을 안위하는 모세의 지팡이와 같이 또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같이 창조적 능력을 나타내어 주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원망을 그치게하는 종들로서 주의 길을 예비할 수 있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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