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7월 28, 2005

교회의 질서이해

2005년 7월 27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11:1-16
교회의 질서이해

일반적인 생각에서만 본다면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는 가운데서 동시에 하나를 말할 수 있는가 또 하나를 말하면서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 그리고 여러 가지 중에서 이질적인 것을 분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논의는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도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한 생각을 해왔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의 형상대로 그 영광대로 인간을 지으심에 있어서 기본적인 자기 모습들이라고 하는 것을 말함에서 이미 비롯되었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자존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만드신 바 피조물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 여럿과 하나의 그 관계적 모습의 이해는 중요하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의식해야만 했던 것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교회의 모습과 그 정체성에 있어서도 우리 성도들은 믿음의 분량이라고 함의 다양성과 그 통일성을 이해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교회의 통일성을 이해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렇게 말함은 성도들의 연합하여 협력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에 서게 하심의 기본적인 입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하나 됨의 이해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오늘 본문을 포함한 고린도교회에 대한 정황적 입장을 통하여 증거함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질서와 통일성을 위한 주의 뜻하심의 증거는 무엇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의 말씀과 본문 2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과 같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사도 바울 자신을 본받는 자 되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고린도교회에서 유전되어짐에 대한 것으로 여인들이 수건을 머리에 쓰는 문제에 대한 것으로 그것에 대한 해석적 의미를 말하고 있고 본래적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남자와 여자의 질서적 의미에 대한 것과 그 표적으로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에 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6절까지에서는 그러나 주님 안에서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함에 대한 언급과 함께 스스로 판단할 것에 대한 것과 긴 머리가 쓰는 것을 대신하여 준 것을 생각하게 하며 변론하게 되는 태도를 가진 자들이 있을찌라도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전반적인 문맥 가운데서 본문의 위치를 주목하여야 함을 먼저 주목하는 것입니다. 즉 우상에 대한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실족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은 것이며 그 앞서 음란이라고 하는 것에 있게 되어지는 탐심으로써의 우상이 있지 않도록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며 그것에서 자신의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믿음의 분량으로 서는 것을 본받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이제 교회의 통일성을 말하기 위해서 교회의 질서적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창조적 질서라고 함의 입장과 그것을 해석한 유전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고 주의 세우신 언약으로써의 성찬이라고 함이 그리스도의 한 몸에 참여함이라고 함의 사실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써 교회의 통일성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교회의 질서적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창조적 질서라고 함의 입장과 그것을 해석한 유전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에 대한 성도들의 연합하지 못한 것은 율법의 행함이냐 믿음이냐는 그것을 놓고 하나됨에 대한 것을 권면하였다면 고린도교회에서는 전통에 대한 이해와 그것에 따른 믿음의 행함이라고 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과 그 믿음의 다양성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그 통일성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그러한 다양성이라고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서 정당함을 찾는 것이 옳은 것이며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의 당위성이 성립되어도 그 권한을 다 쓰지 않는 것과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받을 성도들의 상급이라고 함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급으로써 권한을 다 쓰지 않는 믿음의 중심으로 연약한 성도들을 받음으로 나타나는 성도들의 연합합을 말함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의 통일성을 의미하며 협력하여야 하는데 그 중에서 전통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교회의 창조적 질서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리고 주의 세우신 언약의 하나로써 성만찬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연합을 위한 교회의 다양성에서 읽게 되어지는 통일성으로써의 정체성을 위한 것은 바로 교회의 질서가 창조적 질서를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실 때에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아담을 돕는 배필로서 하와를 지으셨다고 할 때에 그러한 질서를 이해하면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과 같이 교회는 주의 구원하심에 따른 언약에 따른 새로운 창조물로서 새움을 받았다고 함을 기억할 때에 재창조적 질서를 반영한다고 할 때에 교회에서 여성도님들의 섬김이라고 하는 것이 돕는 배필과 같은 입장에서 해석되어야 함이 사실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과 같은 것은 그러한 것의 실제적 증거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 질서를 존중하고 있다고 하면 그 전통으로써 그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따르고 있는 것이고 또한 그 증거적 목적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해에서 수건을 쓴다는 행위만 가지고 말한다는 것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의 기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마도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서 분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었다면 음란으로 인한 탐심으로써의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 전통의 사실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인데 그렇게 행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 하나가 바로 전통을 이해함에 있어서 교회의 기본적인 창조적 질서라고 하는 것을 읽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주의 종들의 잘못된 모습으로 여성도님들의 교회에서의 남성도를 주장하는 것으로써의 섬김이라는 그러한 직책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교회는 재창조적 역사하심에서 그 정체성을 가지기 때문에 그 돕는 배필로서의 섬김의 달란트로 머무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많아지고 또한 능력에 있어서 남성을 능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며 그에 따른 적절한 보수가 주어져야 하는 것에 있어 그 당연함을 말할 수 있고 또 지도자적인 입장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가정에서 남편을 돕는 배필로써 가정을 위해 사회생활을 한다고 할 때에는 그만한 노력을 함에 대한 보수와 또 직위에 따른 해택도 정도에 맞게 형평성을 말해야 할 것이고 또한 어떤 특별한 능력을 사회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때에도 당연히 합당한 남성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는 여건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러한 개념으로 접근함에 대한 옳지 못한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이 가정 밖에서 남성을 대신하는 또는 돕는 개념으로 정착되어진 노동력의 제공이라는 것으로 교회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여자 사사 드보라도 남자를 세우기를 바라고 그 드보라는 교회라고 함의 실제적 증거자로서 교회에서 주의 종들을 도와 일을 하도록 하게 하는 것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의 증거임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생활의 변화라는 개념으로 교회의 질서의 정체성을 말하는 창조적 질서를 상황적 정황적 이해로 변개하는 것은 옳지 않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분란의 직접적인 것은 아마도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전통적인 개념을 해석함에 있어서 종들의 탐욕적인 입장에서 교회의 질서를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사 드보라의 섬김이라고 하는 것을 개인적인 여성신장의 표본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사사기의 본문은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창조적 질서라는 것에서 돕는다는 배경이 주체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함을 말할 수 있지만 정황에 따른 주체로서 당연함을 공식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교회의 창조적 질서를 나타내는 재창조적 질서의 모습을 잃는 가운데서의 질서적 혼돈이 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말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니라는 말을 한 요한을 주님이 증거하심을 기억하고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는 나의 감정과 어떤 명예욕과 나의 하고자 하는 욕망의 탐심과 그에 따른 우상적 입장을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할 때에 주께서 허락하신 줄로 재어준 기업이 실로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주의 창조적 질서에 따른 교회 질서 안에서 기뻐하시며 협력하는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주의 선하신 뜻을 협력하여 이루는 주의 기쁨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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