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9월 16, 2004

깊이 잠들게 하는 신

2004년 9월 16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사29:9-24
깊이 잠들게 하는 신

잠들지 않는다는 개념으로써 깨어 있으라는 표현과 개념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계속한다는 것과 주의를 상기시킨다는 개념과 그리고 일상적인 잠을 자지 않는다는 개념 등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깨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과 그의 사도들의 증거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비유적 개념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있고 또한 상황적 차원에서 행위의 열심을 내어야 하는 것들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깨어있음에 대한 상반적 개념에서 주목할 수 있는,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부어주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기본적인 깨어있다는 것의 실제, 그 사실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분명한 사실로 나타나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9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2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놀라고 놀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와 선견자가 눈이 감김에 대한 것과 묵시가 봉한 책으로 유식한 자도 무식한 자도 읽을 수 없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이 백성이 입으로는 가까이 하며 그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떠났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며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질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말한 자들, 즉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의 자리에 서게 되는 자들의 화가 있을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그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들이 행하는 것을 누가 보겠으며 누가 알겠느냐는 식의 입장과 피조된 것이 피조를 행한 자의 판단을 함이 가능한 것과 같이 어리석음의 자리에 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과 소경의 눈이 볼 것에 대한 것과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서 기뻐할 것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서 즐거워하는데 이는 그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음이며 그들이 헛된 일로 억울케 하였던 것입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데 야곱의 족속이 부끄러워 아니할 것에 대한 것과 그 자손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다 하며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마음이 혼미하던 자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깊이 잠들게 하는 신’(타르데마 루아흐)을 부어주심과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증거가 성도의 교회에서의 증거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깨어 있다는 것의 사실과 그 실제가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의 문맥을 주목하면 이사야 29장의 내용은 ‘아리엘’에 임하는 화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아리엘’의 뜻은 ‘하나님의 사자’ "lion of God" or "lioness of God" 라는 뜻이 있는데 이는 예루살렘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성도에 대한 총체적인 지칭적인 입장으로써 해석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앗수르 나라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그러한 화가 있는 가운데서도 그러한 정복하며 주의 이름이 있는 자들을 해하는 자들의 행함이 이미 실제적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꿈에 많이 먹어도 깨고 나면 여전한 것에 비유하여 말씀하시고 있음이 그것입니다.(사 29:8)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인생막대기와 같은 것으로 징계하시는 것은 그들의 죄악을 인함인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다 상대적이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고 자신들의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감출 수 있다는 점에서 누가 알겠는가 누가 그 비판적 사실을 말할 수 있느냐는 식의 입장에서 임의적인 증거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부어주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허용하심에 주권적 표현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의 소산으로써 언급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머뭇머뭇 거리는 자들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들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 그 증거적인 확실성을 말하지 못하고 그 결과적인 것은 그 영적인 것에 눈이 감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선지자도 선견자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사실을 말하기를 머뭇거린다면 그러한 깊이 잠들게 되는 신 그러한 영의 사역적인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우리나라에 추석과 같은 명절이 되면 제사에 대한 문제로 사회적으로는 어떤 경배의 뜻보다는 화목의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고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의 사회자는 말하기를 옛날에는 제사라는 것이 포식의 기회가 되어지지만 요즘에는 칼로리를 계산함이 더 유익한 것으로써 언급한 것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즉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이고 형식적인 측면에서의 동의로 일관하고 있고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 실제적 입장을 달리하고 있으면서도 같이 하는 그러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교적 문화로써의 그러한 것은 그러한 판단을 함에 있어서 그럴 수 있는 당위성이 성립되어지지만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상대적 신관의 납득 당위성이 없는 것들과 비교되어질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비교되어지는 것과 같이 몸 따로 마음 따로 행하는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말할 수 없고 그러한 것이 오늘 본문에서 책망(사 29:13~14)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의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22절에서는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자신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으므로 이것을 의로 여기심’(창 15:6, 롬 4:3)을 받는 존재이며 그러한 의로움의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게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의 시작적인 증거로써,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마 1:1)를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이 예언되어지고 있음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23절에서는 ‘.. 내 이름이 거룩하다 하며 ..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음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의 실제적 사실 기반의 정당함을 통하여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이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 위격적인 차원의 합리성의 상대적 표현의 어려움과 불연속성이라고 하는 것이 삼위 일체 하나님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자존의 성부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 ‘주님께서 성경의 말씀의 인을 떼시는 은혜의 계시’의 말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계 5:1~14)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은 바로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창 15:6)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고 있고, 이것을 알고 있는 바울은 로마서에서는 그냥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고 이후에는 아브라함의 의가 모든 믿는 자들(롬 4:23~25)의 의로움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깊이 잠들게 하는 신(영)’은 이처럼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확실성을 말하지 못하고 말함에 그 능력을 말하기 어려웠던 것이며 머뭇머뭇하게 되고 인위적으로 말하는 가운데서 그들의 선지자적 선견자적인 견해는 하나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단인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로써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칭할 뿐 진정으로 하나님이름의 정당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존(自存)의 하나님을 믿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의지하여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자들로서, 항상 깨어 있어, 하나님의 교훈을 혼미함 없이 원망 없이 받으며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로서의 기쁨과 감사가 평생에 함께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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