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21일 소망교회 추수감사주일예배설교
시50:22-23
감사로 제사드리는 자
오늘은 교회의 절기를 따라서 추수감사주일로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일반적으로 이 절기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오게 되어진 청교도들의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한 해의 지은 결실에 대한 감사를 하게 되어진 것에서 연유한 절기입니다. 물론 이 절기(thanksgiving day)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써 그것은 감사함에 따른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증거하는 것에 있습니다.
신앙의 절개(節槪)를 지키기 위해서 그 여러 어려움들에서 결실을 얻게 하심에 대한 구원을 기뻐하는 가운데서 지키게 되어지고 그러한 가운데서 교회의 절기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전통을 이해함에 있어서 전통이기 때문에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동일한 표현과 증거를 할 수 있음에 있어서 신앙의 전통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모범적인 행위라는 것을 맹목적으로 따른다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하심인 감사로 인한 구원이라고 함에 대한 증거를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에게 생각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찢으실 것으로 건질 자가 없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기억할 것으로써 감사로 제사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 행위를 옳게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그 행위를 옳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맙다는 표현이나 자신의 감사함을 표현할 때에 ‘물질적인 것’을 가지고 내놓고 고마움에 대하여서 표현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너무 정형화 되어지는 가운데서 가지지 못한 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고마움에 대한 표현까지도 어렵게 하며 부끄럽게 하는 그러한 강요된 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더 나아가서 비방하는 사람들은 역시 물질적인 것에 대한 관심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에 상당한 불만적인 것과 또한 돈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공식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여도 실제적인 것으로 느껴서 교회에 대하여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기본화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여도 감사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할 때에는 감사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부담되어지게 되는 것으로써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으로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야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으로 예물의 강요적 개념으로 형제를 공박하며 그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20절) 그러한 자리에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모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4절, 5절)
이러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없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나타나고 있음에 대한 주의 판단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물질적인 것을 받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과 같이 착복하는 자로 생각하는 자들의 악한 인식과 그러한 감사라는 명목으로 도적질하며 착복하는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을 잊어버림의 것으로써의 그 행위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감사한다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 얼마만큼 감사의 표현을 하여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행하는 만큼이라는 개념에서 통념적으로 이해하고 그 기준을 삼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잊은 자들로서의 착복의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진정한 실제를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다면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며 상대적인 기준 즉 착복하는 자들의 기준을 포장한 것으로써 행하여도 누가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도적의 의미가 되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것의 논란이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같은 관련된 혈연적 개념에서도 그 도적함을 위하여서 그 악함의 변론으로 형제들을 공박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착복함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에게서 울며 겨자 먹는다는 식의 감사를 드리는 자들의 모습까지도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잊은 까닭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써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성도들을 삼음에 있어서는 그 상대적인 것의 감사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림이 옳은 것입니다.
그 구별이라고 함은 야곱과 같은 언약의 백성으로서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 즉 언약의 하나님 아바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라는 중심으로 돌을 세우고 그곳에서 기름을 부어 성별하고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이 만나주심 안에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림에 대한 것을 약속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창 28장 참고)
우리 성도들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라는 그 중심으로 한 예배처소를 준비하고 그곳에 출석하며 주의 구원하심을 증거하는 중심으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관적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인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믿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증거로써 드리는 것으로써 상대적으로 많고 적음에 상대적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러한 물질을 하나님이 받으셔야만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로서 하나님이 상대적인 것에서 어떤 도움이나 조력을 필요로 한다는 식으로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되어지는 것은 또한 옳지 않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소위 사람들이 인식하는 상대적인 절대 빈곤이라고 함에 있어서 감사의 빈곤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을 강요하는 현실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신실하심은 그러한 것에서 판단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우리의 작은 모습들 속에서도 감사의 실재를 찾을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자존적 신실하심을 찬양하며 증거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잊은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자존적 신실하심에서 실제적인 감사의 자리에 서지 못하며 그 표현에만 급급한 가운데, 잘못된 기복적 신앙으로 비록 그 표현의 많고 적음에 따른 당위성을 갖춘다고 하여도 주의 판단을 받게 되며 주의 구원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본문에서 그 행위를 옳게 하는 것은 십일조와 헌물을 비롯하여 모든 예물은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에 대한 증거로써 드려짐이 옳은 것이며 주관적이면서도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실제를 찾게 되어지는 가운데서는 많고 적음이라는 개념에서 형제를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않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때에, 우리가 우리의 존재의 작은 것으로써의 판단을 받는 자리에 서게 된다고 하여도 그러한 가운데서도 자존의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기억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은혜도 입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하심에 대한 증거와 자존의 절대자로서 절대 정당함을 인하여 상대적으로도 절대 신실하시게 말씀하심을 나타내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초라함이라고 함에서 감사의 빈곤을 말하지 않으며 감사의 진정한 실재와 증거를 찾아내는 자로서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그 행위를 옳게 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는 종들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시50:22-23
감사로 제사드리는 자
오늘은 교회의 절기를 따라서 추수감사주일로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일반적으로 이 절기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오게 되어진 청교도들의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한 해의 지은 결실에 대한 감사를 하게 되어진 것에서 연유한 절기입니다. 물론 이 절기(thanksgiving day)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써 그것은 감사함에 따른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증거하는 것에 있습니다.
신앙의 절개(節槪)를 지키기 위해서 그 여러 어려움들에서 결실을 얻게 하심에 대한 구원을 기뻐하는 가운데서 지키게 되어지고 그러한 가운데서 교회의 절기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전통을 이해함에 있어서 전통이기 때문에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동일한 표현과 증거를 할 수 있음에 있어서 신앙의 전통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모범적인 행위라는 것을 맹목적으로 따른다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하심인 감사로 인한 구원이라고 함에 대한 증거를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에게 생각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찢으실 것으로 건질 자가 없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기억할 것으로써 감사로 제사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 행위를 옳게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그 행위를 옳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맙다는 표현이나 자신의 감사함을 표현할 때에 ‘물질적인 것’을 가지고 내놓고 고마움에 대하여서 표현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너무 정형화 되어지는 가운데서 가지지 못한 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고마움에 대한 표현까지도 어렵게 하며 부끄럽게 하는 그러한 강요된 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더 나아가서 비방하는 사람들은 역시 물질적인 것에 대한 관심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에 상당한 불만적인 것과 또한 돈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공식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여도 실제적인 것으로 느껴서 교회에 대하여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기본화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여도 감사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할 때에는 감사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부담되어지게 되는 것으로써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으로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야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으로 예물의 강요적 개념으로 형제를 공박하며 그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20절) 그러한 자리에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모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4절, 5절)
이러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없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나타나고 있음에 대한 주의 판단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물질적인 것을 받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과 같이 착복하는 자로 생각하는 자들의 악한 인식과 그러한 감사라는 명목으로 도적질하며 착복하는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을 잊어버림의 것으로써의 그 행위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감사한다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 얼마만큼 감사의 표현을 하여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행하는 만큼이라는 개념에서 통념적으로 이해하고 그 기준을 삼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잊은 자들로서의 착복의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진정한 실제를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다면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며 상대적인 기준 즉 착복하는 자들의 기준을 포장한 것으로써 행하여도 누가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도적의 의미가 되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것의 논란이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같은 관련된 혈연적 개념에서도 그 도적함을 위하여서 그 악함의 변론으로 형제들을 공박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착복함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에게서 울며 겨자 먹는다는 식의 감사를 드리는 자들의 모습까지도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잊은 까닭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써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성도들을 삼음에 있어서는 그 상대적인 것의 감사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림이 옳은 것입니다.
그 구별이라고 함은 야곱과 같은 언약의 백성으로서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 즉 언약의 하나님 아바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라는 중심으로 돌을 세우고 그곳에서 기름을 부어 성별하고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이 만나주심 안에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림에 대한 것을 약속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창 28장 참고)
우리 성도들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라는 그 중심으로 한 예배처소를 준비하고 그곳에 출석하며 주의 구원하심을 증거하는 중심으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관적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인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믿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증거로써 드리는 것으로써 상대적으로 많고 적음에 상대적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러한 물질을 하나님이 받으셔야만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로서 하나님이 상대적인 것에서 어떤 도움이나 조력을 필요로 한다는 식으로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되어지는 것은 또한 옳지 않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소위 사람들이 인식하는 상대적인 절대 빈곤이라고 함에 있어서 감사의 빈곤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을 강요하는 현실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신실하심은 그러한 것에서 판단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우리의 작은 모습들 속에서도 감사의 실재를 찾을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자존적 신실하심을 찬양하며 증거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잊은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자존적 신실하심에서 실제적인 감사의 자리에 서지 못하며 그 표현에만 급급한 가운데, 잘못된 기복적 신앙으로 비록 그 표현의 많고 적음에 따른 당위성을 갖춘다고 하여도 주의 판단을 받게 되며 주의 구원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본문에서 그 행위를 옳게 하는 것은 십일조와 헌물을 비롯하여 모든 예물은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에 대한 증거로써 드려짐이 옳은 것이며 주관적이면서도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실제를 찾게 되어지는 가운데서는 많고 적음이라는 개념에서 형제를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않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때에, 우리가 우리의 존재의 작은 것으로써의 판단을 받는 자리에 서게 된다고 하여도 그러한 가운데서도 자존의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기억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은혜도 입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하심에 대한 증거와 자존의 절대자로서 절대 정당함을 인하여 상대적으로도 절대 신실하시게 말씀하심을 나타내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초라함이라고 함에서 감사의 빈곤을 말하지 않으며 감사의 진정한 실재와 증거를 찾아내는 자로서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그 행위를 옳게 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는 종들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