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11월 04, 2004

그 섬은 멜리데라

2004년 11월 3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28:1-15
그 섬은 멜리데라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굴곡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기본적인 인식이라고 하겠습니다.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고 무엇인가 형통을 말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한 때도 있고 그리고 그러한 대비적인 개념으로만 말할 수 있는 때가 아닌 때도 있고, 등등,

그러한 인생의 여정의 기복적인 때 중에서도 소위 ‘슬럼프’(slump)라고 하는 그러한 때를 만날 때에는 너무나 곤고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길을 다 막힌 듯한 때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 때에는 상대적으로 어떤 나름대로의 반전을 시도하지만 그렇게 실제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지지 않을 때에는 더욱 곤고함을 느끼게 되어지는 고통도 감수해야 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우리 인생들 우리 성도들이 힘을 얻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시는 말씀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 항상 우리를 주장하신 것과 같이 현실적인 실제에서 주장하시는 가운데 힘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로마로 호송되어지게 되는 바울을 태운 배가 파선되어서 헤엄쳐 섬에 이르러 구원을 얻고 나서 알게 되니 그 섬의 이름은 ‘멜리데’라고 함을 알았음을 기록하고 있고 그 섬에서의 일들이 기록되어지고 있습니다.

그 내용인 즉 바울이 나뭇가지를 거두어 불에 넣는 가운데서 뱀에게 물린 사건과 그 가운데서도 해함을 당하지 않았던 일과 섬에 가장 높은 보블리오의 열병과 이질을 기도하고 안수하여 낫게 함과 그 가운데서 호의를 받게 되어지고 여정을 위한 쓸 것을 공급받게 되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석 달 후에 디오스구로라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이윽고 로마에 도착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고 그 여정에서 형제들을 만난 것이 간단하게 기술되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수라구사’와 ‘레기온’을 지나 ‘보디올’에 이르러서 형제들을 만나 저희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유하다가 로마로 가며 거기에서 형제들이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나옴으로 바울이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 ‘멜리데’에서의 석 달간 있었던 일에 대한 증거와 형제들을 만남에 대한 여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하며 우리의 인생여정에서의 주의 동행하심이 어떤 것인지 주목하며 기뻐하며 주께 영광을 돌리게 하심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이 ‘멜레데 섬’에서의 사도 바울의 모습이라고 함은 세상에 우겨쌈(고후 4:8)을 당하지 않는 성도들의 모습과 그 가운데서의 주의 뜻하심을 성실히 행하게 되어지는 자들의 모습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에 가서도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주의 뜻하심이라고 함을 이미 믿음으로 알게 하심에 따라서 자신이 무죄하다는 판결을 받을 수 있는 가운데서도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호소함에 따라서 믿음으로 그 여정을 선택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일행은 로마로 가는 배를 타게 되는데 그것은 ‘아드랏뭇데노’(Adramyttium)라는 배였습니다.(행 27:2) 그 이름의 뜻은 ‘죽음의 공회’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인력적인 측면에서 사도 바울의 행보를 막음으로써 하나님의 뜻하심을 막으려고 하는 그러한 의도함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믿어주시는 성도들의 전형적 모습으로서의 일시적으로 바울을 내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배를 바꿔 탔지만 그러한 의도라고 함은 이미 배를 바꾼다고 하여도 바뀌지 않았던 것입니다. 2주간 동안 그러한 죽음이라고 함의 공회를 지나는 것으로써의 항해여정에서 주의 뜻하심의 예정하심을 이루실 것을 믿는 바울의 믿음대로 그들은 그 한 섬 멜리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멜리데’의 이름의 뜻은 ‘꿀’(honey)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례요한의 외치는 자로서 들에 있을 때에 먹었던 ‘석청’(마 3:4, 막 1:6)이라는 것과 동일한 어근과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이 말하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그러한 표현을 사람들이 의미와 실제를 말하지 못하면서도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이 사람이 죄인된 것을 알지 못하며 자신의 존재의 정체성과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죽음이라고 함의 인생여정을 행하고 있는 것이 바울이 타고 가던 배들의 실제적 존재적 증거의 이름으로써 ‘아드라뭇데노’라는 ‘죽음의 공회’의 인생이었던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두 죽음이라는 인생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뜻하심의 섭리를 바라보는 가운데서 구원의 사실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함의 외침이 들에 있을 것이며 또한 그것이 세상이 받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진정한 구원을 받게 되어지며 그러한 구원받음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에서의 동떨어진 마치 우겨쌈을 당하는 것과 같이 현실로 다가 온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섬이 하나님을 앙망하리라는 것이 주의 교회에 이루어짐과 그 어떠함을 알도록 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사 42:4, 사51:5)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위로하심에서 믿음으로 씨를 뿌리며 그러한 일을 온전히 마칠 수 있도록 하심의 위로하심과 권고하심이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성도들의 만남에서 기쁨의 샘을 보게 하시고 담대하게 하심의 은혜를 입는 바울의 존재적 증거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는 가운데서 형제들을 처음만나는 곳은 바로 ‘보디올’이라는 곳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작은 우물’, ‘샘물’이라는 뜻입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샘물을 여신 것입니다.(시 104:10)

이제 우리 성도들은 주의 이름으로 주 안에서 그 샘물을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말씀을 맺습니다.

삶의 여정에서 곤고함과 그것으로 인하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리에 설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을 말씀하심이 오늘 본문에서는 세례요한과 같이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주의 위로하심이 있게 되며 주의 회복하게 하심의 은혜를 입게 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소위 사면초가라는 그러한 정황 속에서도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믿음으로 분별하여 행하여 나갈 때에는 그 우겨쌈(고후 4:8)이라고 함에서도 실제적인 하나님의 뜻하심을 받들 수 있고 또한 더 일할 수 있는 달란트와 인도하심이 있으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기업을 다윗과 같이 기뻐하는 자리에 서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종으로서 세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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