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24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8-17
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義)
시기적으로 지금은 초(初)겨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움출이기 쉬운데 적당한 운동이 필요하고 넘어짐이나 여러 가지 부딪히는 그러한 일은 건강을 위해서 없어야 할 것입니다. 조그마한 충격에도 뼈가 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구쟁이가 아니라고 하여도 넘어서져서 뼈를 다칠 수도 있는데 그 뼈가 부러졌다가 이어지면 그 부분은 오히려 단단하다고 합니다. 다만 뼈가 붙은 바로 옆 부분에서는 자체적인 역학적인 불균형으로 또는 상대적인 약함으로 오히려 전체적으로 다친 부분이 오히려 다칠 수 있는 경우의 위험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이 신구약 성경의 합리적 불연속성에 대하여서 상당히 비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비판 가능하다고 그것이 또한 정당하다는 개념은 항상 같이 있을 수 있는 것만은 또한 아님을 기억할 때에 그러한 임의적 사실에 실제적 사실처럼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신구약 성경에 대하여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 그러한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전반적이고 총체적인 복음의 내용과 자신에 대한 것을 말한 후에 축복함에 이어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짐에 대한 것과 그들을 위한 자신의 기도를 말하며 심히 만나기 원했는데 그것은 성도들의 교제라고 함에서 피차 안위를 받기 위한 것이라고 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로마의 예수님을 믿는 성도로서의 형제들에게 가고자하는 노력이 있음에 대한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그러한 가운데서 길이 막혔음에 대한 언급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열정은 자신이 빚진 자임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고, 로마에 있는 형제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는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언급을 하고 있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심을 언급하고 있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살 것에 대한 언급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도 바울은 성도의 교제라고 함 안에서 문안하고 있음과 그 로마의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자신의 실존적 증거와 함께 그 내용으로써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음에 따라 믿음으로 의인이 살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성도의 교제 안의 정체성으로 로마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함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이단들은 말하기를 ‘기존의 교회에 다시 복음을 전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하면서 교회에 복음을 사도 바울이 전함에 대한 것을 기존교회의 부정의 당위성이 성립되어지는 것으로 말하고 주장하는 경우를 접해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거짓되며 잘못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형제들의 모임으로써 교회를 부정하고 다시 복음을 전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즉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전도함에 있어서 같이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그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는 것으로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 이 글을 쓰는 것은 마치 설교와 같은 서신을 통한 교육과 교제라고 함에서 자신도 그들의 섬김 속에서 안위를 받고자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미 그들의 성도됨을 부정하는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며 바울이 피차 안위를 받고자 함에 의미는 자기모순이라는 개념을 내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과 전도하여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 교제를 나누게 되어질 자들이 있음과 그들과의 안위를 나눔을 위한 것을 말할 수 있지만 사도 바울은 이미 이 수신자들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그들을 축복하며 말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섬김과 성도의 교제 즉 협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한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더 풍성한 성도의 교제를 말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자신들의 행함의 특이한 정체성을 위하여 기존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들의 모임으로써의 교회를 부정하는 모습은 성경해석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있으며 실재와 사실에 대한 분별의 기준도 없다고 함을 말해두겠습니다.
다음으로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적 입장에서도 본다면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 부끄러워한다면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을 기억할 때에 어떤 인위적 사실로써의 복음을 애써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합목적적인 개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보여질 수 있다는 개념과 사실과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할 것입니다.
그 본문의 구문만 주목할 때에는 그러한 일상적인 인식이라고 함의 이입하여서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문맥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그 성경의 문맥적인 측면에서는 그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이미 1절에서 7절에 나타나고 있는 복음이라고 함이 그 아들에 관한 것으로 예수께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인하여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음에 대한 사실에 있어서 부끄럽지 않다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자신이 주관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생명의 주로서 ‘스스로 존재하는 자’외에는,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외에는 그 이상도 이하도 없고 어느 누구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러한 자존적 자기 절대 정당함이 예수께서 하나님 자신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타내심에, 그러한 자기 절대 정당함을 상대적인 범주에서는 비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 비판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이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가 육신적 개보로써의 언약이 있게 하였던 할례라는 개념에 주의 언약하심이 매여 있어 정죄 받게 되어지는 자리에 있지 않은 것과 같이 모든 이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질 것이라고 함을 주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그의 사역가운데서 실제적으로 깨닫게 하심에 대한 증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자들에게 빚진 자의 심정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은 그의 신앙의 윤리적 동기부여의 힘이 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서 마지막으로 주목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의로 여기심에 있어서는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음에 의로 여기셨던 것입니다.(창 15:6) 그런데 복음이 그 아들에 대하여서 언급한 것인데 그 아들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에 대한 증거의 실제는 바로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증거와 그에 따른 의로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는 자로서 죽음이라는 상대적 부정이라는 개념의 실제적 판단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심의 의미를 함축하여 증거함에 대한 합당한 증거자로 서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에 있어서 그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는 것의 동일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는 것의 내용적 의미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실재의 증거를 마음에 두지 못한 가운데서 루터의 오직 믿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상대적 개연성에 따른 불 분명성에 대하여서 비판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실재에 대하여서 분별이 없는 가운데서의 합리성의 나락에서의 탄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신구약의 통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마태복음 1장 1절에 나타나고 있는 증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함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서 그 실재적인 증거가 되었음에 대한 것을 분별하는 것에서 답변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는 합리성의 완전성을 의지하지 않고 그것의 판단으로 부끄러움에 이르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음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떤 목적을 위한 의지적 개념에서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에 한계가 있고 그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존하신 하나님에 증거로써의 예수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그로 인하여 의롭다하심의 그 증거의 사실은 하나님의 절대 신실하심에서 이루어짐을 기억할 때에는 결코 너무나도 합당한 실제로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고 있음을 기억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의 의롭다 하심의 칭함을 받은 자들로서 이 의로운 복음 예수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온전히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롬1:8-17
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義)
시기적으로 지금은 초(初)겨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움출이기 쉬운데 적당한 운동이 필요하고 넘어짐이나 여러 가지 부딪히는 그러한 일은 건강을 위해서 없어야 할 것입니다. 조그마한 충격에도 뼈가 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구쟁이가 아니라고 하여도 넘어서져서 뼈를 다칠 수도 있는데 그 뼈가 부러졌다가 이어지면 그 부분은 오히려 단단하다고 합니다. 다만 뼈가 붙은 바로 옆 부분에서는 자체적인 역학적인 불균형으로 또는 상대적인 약함으로 오히려 전체적으로 다친 부분이 오히려 다칠 수 있는 경우의 위험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이 신구약 성경의 합리적 불연속성에 대하여서 상당히 비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비판 가능하다고 그것이 또한 정당하다는 개념은 항상 같이 있을 수 있는 것만은 또한 아님을 기억할 때에 그러한 임의적 사실에 실제적 사실처럼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신구약 성경에 대하여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 그러한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전반적이고 총체적인 복음의 내용과 자신에 대한 것을 말한 후에 축복함에 이어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짐에 대한 것과 그들을 위한 자신의 기도를 말하며 심히 만나기 원했는데 그것은 성도들의 교제라고 함에서 피차 안위를 받기 위한 것이라고 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로마의 예수님을 믿는 성도로서의 형제들에게 가고자하는 노력이 있음에 대한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그러한 가운데서 길이 막혔음에 대한 언급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열정은 자신이 빚진 자임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고, 로마에 있는 형제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는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언급을 하고 있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심을 언급하고 있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살 것에 대한 언급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도 바울은 성도의 교제라고 함 안에서 문안하고 있음과 그 로마의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자신의 실존적 증거와 함께 그 내용으로써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음에 따라 믿음으로 의인이 살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성도의 교제 안의 정체성으로 로마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함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이단들은 말하기를 ‘기존의 교회에 다시 복음을 전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하면서 교회에 복음을 사도 바울이 전함에 대한 것을 기존교회의 부정의 당위성이 성립되어지는 것으로 말하고 주장하는 경우를 접해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거짓되며 잘못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형제들의 모임으로써 교회를 부정하고 다시 복음을 전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즉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전도함에 있어서 같이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그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는 것으로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 이 글을 쓰는 것은 마치 설교와 같은 서신을 통한 교육과 교제라고 함에서 자신도 그들의 섬김 속에서 안위를 받고자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미 그들의 성도됨을 부정하는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며 바울이 피차 안위를 받고자 함에 의미는 자기모순이라는 개념을 내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과 전도하여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 교제를 나누게 되어질 자들이 있음과 그들과의 안위를 나눔을 위한 것을 말할 수 있지만 사도 바울은 이미 이 수신자들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그들을 축복하며 말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섬김과 성도의 교제 즉 협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한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더 풍성한 성도의 교제를 말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자신들의 행함의 특이한 정체성을 위하여 기존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들의 모임으로써의 교회를 부정하는 모습은 성경해석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있으며 실재와 사실에 대한 분별의 기준도 없다고 함을 말해두겠습니다.
다음으로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적 입장에서도 본다면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 부끄러워한다면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을 기억할 때에 어떤 인위적 사실로써의 복음을 애써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합목적적인 개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보여질 수 있다는 개념과 사실과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할 것입니다.
그 본문의 구문만 주목할 때에는 그러한 일상적인 인식이라고 함의 이입하여서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문맥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그 성경의 문맥적인 측면에서는 그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이미 1절에서 7절에 나타나고 있는 복음이라고 함이 그 아들에 관한 것으로 예수께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인하여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음에 대한 사실에 있어서 부끄럽지 않다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자신이 주관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생명의 주로서 ‘스스로 존재하는 자’외에는,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외에는 그 이상도 이하도 없고 어느 누구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러한 자존적 자기 절대 정당함이 예수께서 하나님 자신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타내심에, 그러한 자기 절대 정당함을 상대적인 범주에서는 비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 비판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이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가 육신적 개보로써의 언약이 있게 하였던 할례라는 개념에 주의 언약하심이 매여 있어 정죄 받게 되어지는 자리에 있지 않은 것과 같이 모든 이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질 것이라고 함을 주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그의 사역가운데서 실제적으로 깨닫게 하심에 대한 증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자들에게 빚진 자의 심정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은 그의 신앙의 윤리적 동기부여의 힘이 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서 마지막으로 주목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의로 여기심에 있어서는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음에 의로 여기셨던 것입니다.(창 15:6) 그런데 복음이 그 아들에 대하여서 언급한 것인데 그 아들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에 대한 증거의 실제는 바로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증거와 그에 따른 의로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는 자로서 죽음이라는 상대적 부정이라는 개념의 실제적 판단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심의 의미를 함축하여 증거함에 대한 합당한 증거자로 서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에 있어서 그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는 것의 동일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는 것의 내용적 의미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실재의 증거를 마음에 두지 못한 가운데서 루터의 오직 믿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상대적 개연성에 따른 불 분명성에 대하여서 비판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실재에 대하여서 분별이 없는 가운데서의 합리성의 나락에서의 탄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신구약의 통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마태복음 1장 1절에 나타나고 있는 증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함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서 그 실재적인 증거가 되었음에 대한 것을 분별하는 것에서 답변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는 합리성의 완전성을 의지하지 않고 그것의 판단으로 부끄러움에 이르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음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떤 목적을 위한 의지적 개념에서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에 한계가 있고 그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존하신 하나님에 증거로써의 예수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그로 인하여 의롭다하심의 그 증거의 사실은 하나님의 절대 신실하심에서 이루어짐을 기억할 때에는 결코 너무나도 합당한 실제로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고 있음을 기억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의 의롭다 하심의 칭함을 받은 자들로서 이 의로운 복음 예수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온전히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