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1월 01, 2004

부끄럽지 않은 복음

2004년 10월 31일 소망교회 종교개혁주일예배설교
롬1:1-17
부끄럽지 않은 복음

일반적으로 어떤 일이나 사안, 그리고 그 밖에 어떤 정체성에 대하여서 ‘부끄럽지 않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그러한 태제라고 하는 것, 즉 부끄러움을 애써 감추고자 하는 것의 한 표현일 뿐이라는 것으로 일축할 수도 있는 것이 사실로써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의 사실의 실제를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그러한 일축함이라고 함이 그 경솔함과 모자람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31일에 루터의 면죄부 사건에 대한 토론을 위한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성 ‘캐슬교회당’ 문에 붙임으로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진정으로 그 종교개혁에 대한 분명하고 실재적인 것에 대한 증거로써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은 내용적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신 주의 말씀과 그 복음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종들의 중심을 증거하시는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종 사도 바울이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음과 이 복음은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임을 말하고 있고 이러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을 증거하는 가운데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평강이 있기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항상 쉬지 않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함과 만나보기를 심히 원하였는데 그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견고케 하려 함과 피차 안위를 얻으려고 하기 위함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는 길이 막혔지만 빚진 자로서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심과 같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복음을 전하고자 심히 원했던 사도 바울이 그 입을 열었을 때에 자신은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에서의 팽배할 수도 있었던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정황을 읽고 있었다는 것임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더욱 오늘날의 정황도 이와 비교되어진다고 할 때에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님에 대한 것을 그 실상을 마음에 둠이 아름다운 것이며 또한 그 사실의 실상의 정당함을 주목하는 것도 합당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한 대학인 소르본느 대학에서 제출되어진 한 논문에서는 기독교를 의식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의 신화로 취급하면서 비이성적이라고 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자신들의 실증주의적 입장이 정밀과학적 입장으로 받아들임이 좋을 것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조르주 귀스도르프, 신화와 형이상학, 문학동네 p7)

이러한 것은 중세에 있어서, 또한 구교에 증거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분명한 사실을 증거하지 못함에 대한 것을 합리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신론을 말하는 자들은 신의 형상이라고 함을 배척하는 가운데서 신도 배척할 수 있다는 지극히 자의적인 합리성을 쫓아서 결론적으로 종교는 아편이라는 개념으로 일관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일반적인 상식적 측면에서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측면을 맹목적으로 주장하는 자들로써 기독교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느냐는 식으로 그 맹목성을 따르는 자라는 측면에서 기독교의 신앙이라고 함을 복음을 믿는 것이라고 함을 부끄러운 것으로 인식시키려고 하는 미련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적 사회인식에 대하여서 우리 성도들이 분명하게 기억해야할 것은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이 인식하고 증거하는 중심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보내심이라고 함의 뜻하심을 확신(행 27:24)하는 가운데서 성도들의 만남을 위해 힘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로마라고 하는 뜻은 ‘세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러한 곳에 주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게 하심의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선지자로 그 아들에 대하여서 증거한 것입니다. 그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앞선 자로써 주의 복음을 전하는 종들을 표현하는 구약적 표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믿음의 종들의 증거적 차원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 의로움의 한 믿음의 조상을 부르심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입니다. 즉 그 아브라함의 언약적 계보가 바로 예수께서 세우신 자신의 교회로써 오늘 날의 교회의 정체성과 모습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마 1:1)

‘아브라함이 의로 여기심을 받게 되는 것은 여호와를 믿음에 대한 것’(창 15:6)임을 다른 자들(약 2:23)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도 인식하고 있었고(롬 4:3, 롬4:) 그러한 중심을 가지고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인 기반에서의 합리성의 정당함을 의지하여 증거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셨음과 그렇게 하심에 대한 것을 기억할 때에, 상대적인 합리성의 여지라는 개념이나 또는 합리성의 재고라는 개념이 ‘상대적으로 성립되어질 수 있느냐’ 그러한 말들을 말할 때 그것들은 이미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도행전에서 아그립바 왕의 판결 앞에 서 있는 바울과 그의 증거를 통하여서 주목할 수 있는데, 상당한 분별 있는 가운데서 그 아그립바 왕은 그 반론을 내놓지 못하고, 정적인 측면의 입장에 서 있는 베스도는 사도 바울에게 미쳤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참으로 정신차린 말을 한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행 26:17~25)

중세의 가르침의 연속성이 있는 구교에서는 그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인 증거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름이라고 하는 것 상대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기술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한편으로 옳은 것이지만, 자존의 하나님을 믿었더라면,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자기 정당하심으로 상대적인 것으로도 말씀하신다면 그 이름과 상대적인 것으로도 그 상대적인 비판적 불확실성이라는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도 사실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함이 진정한 경건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하나님 앞에서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가서도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로써 그 스스로 지혜로움의 정당함을 하나님께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롬 1:22, 23) 아무리 많은 말을 하고 지식의 열쇠를 가졌다고 하여도 자존의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경건한 모습은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이제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서 그로부터의 상대적으로도 절대의 말씀하심을 믿는 가운데 성경과 그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며 그 아들에 관한 증거로서의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으로써의 복음을 믿는 것은 전혀 비이성적이지도 않고 진정으로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며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서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서 제한된 지식의 참됨이라고 함과 그 보편성이 하나님을 의지한 절대 보편적인 생각일 때에 그것은 상대적 보편의식보다도 더 보편적인 생각을 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결코 비이성적이라는 판단에서 파생되는 부끄러움을 취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 하나님을 믿음과 하나님 자신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음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지극히 참된 것으로 인생이 정신차린 말로써 받아야 함이 그 합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던 사도 바울이 사슬에 매인 것 외는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했던 것과 같이 그러한 자리에 서도록 권고함에 있어서 그 첫 번째가 주의 복음을 분별하는 가운데서 복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에 담게 되어지는 가운데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택한 그릇과 같이 쓰임을 받으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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