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0월 25, 2004

히스기야의 세상읽기

2004년 10월 22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사39:1-8
히스기야의 세상읽기

어떤 분야에서 공적으로 시험을 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과목으로 선정되어 공부하게 되어지는 것들 중에 일반상식이라고 하는 것도 고려하는 곳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상식을 시험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보편적인 일상적 생각과 사고가 필요한 것이 요구되어지는 가운데서 마련되어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러한 일반적인 상식에 대하여서 일반적으로 알려지는 학문들과 세상의 일들에 대하여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가 그러한 것에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앙인은 세상과 결별되어진 가운데서 경건을 말할 수 있다거나 아니면 세속화 신학에서 말하는 세상의 사람들의 모습 자체가 경건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일반적인 세상들의 일들에 대하여서 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 속에서 일반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을 분별하여야 하며 그러한 가운데 옳은 것을 택하는 것이 성도들의 순전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경건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히스기야의 세상적 입장의 모습을 바르게 읽지 못하는 가운데서 죄악된 자리에 잠시나마 서게 되어지는 그러한 모습이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데 그것을 통하여서 주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문맥적인 것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 있는 가운데 남쪽 유다 왕 히스기야가 한번은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가 주의 구원하심의 뜻하심 안에서 낫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은 이어지고 있는데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의 병 나음을 인하여서 예물을 보내왔는데 히스기야가 기뻐하여 그의 궁중의 보물과 무기고와 보물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서 이사야 선지자가 묻기를 그 온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으며,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보았는가를 질문함에 대충 답변하는 히스기야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집의 소유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가 되고 남을 것이 없을 것과 그 자손 중에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될 것에 대한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히스기야의 몇 마디의 언급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이 히스기야는 성도들의 모습의 단면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종말의 때에 있게 되어지는 그러한 연단의 시기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비교되어지는 것은 바로 욥의 순수성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사야가 질문한 것에 히스기야가 다 답한 것으로 언급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벌을 내리심을 언급하는 것을 보았는데, 사실은 히스기야의 옳은 답변이 아닌 것과 또한 다 답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히스기야는 이사야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답변에는 ‘그들이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과 ‘그들이 무엇을 보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답변만 있고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하였느냐’는 이사야 선지자의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함과 그 순전함을 잃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사야 37장과 38장에서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훼방하는 그러한 글들을 하나님 앞에 펴놓고 그 정당하지 못함에 대한 것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분별력을 나타내고 있고 또한 자신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함을 이루어주시기를 위한 자신의 고통이라고 함의 부당함을 놓고 기도할 줄 알면서도 자신이 들은 말 중에서 하나님 앞에서 질문된 답변에 답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은 그의 순전함이라고 함의 정당함이 이미 판단되어진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욥과 비교되어지는 것으로 언급한 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욥에게도 있었는데 그는 순전함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욥은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 2:10)

욥의 아내가 욥의 받는 고통을 인하여서 말하기를 그래도 그대의 순전함을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을 했을 때에 욥의 고백인 것입니다. 삶의 모습에서 정황에서 하나님의 뜻하심에서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모습이라고 함을 통한 그의 경건의 순전함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히스기야의 모습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히스기야에게 다가온 그 예물이라고 함과 방문함에 대한 예를 갖춘 것은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그에게 선함을 말하지만 이교도의 입장에서 그 정황적 입장에서 그 되어진 것의 그 근원이 무엇이냐는 측면의 답변을 구하는 것으로 주목되어질 수 있는 가운데서 히스기야에게 듣기 좋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가 취하여야할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에게 핍박의 실체로 돌아오고 있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였던 것이며 이것을 묻는 이사야에게 답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심에 있어서 그가 기뻐하며 그 존재적 정당함을 찾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그의 본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하지 않은 가운데서 시험에 넘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시험을 통한 분명한 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앞서 히스기야의 본분은 그의 이름에서도 보는 것과 같이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다’라는 증거가 그의 존재적 모습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던 것을 기억할 때에 그의 모습을 잊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핍박’이라고 하는 것이 형태적 순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고 강압적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죄악의 교묘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스기야는 주의 말씀 안에서 분별하여야 했으며 그것이 경건으로 인한 순전함을 지키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을 증거하여야 함이 옳았던 것입니다.

핍박의 순한 모습의 형태를 취함에 대한 예를 든다면, ‘요나’ 선지자의 경우입니다.(욘 1:1~3)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그 소명을 받았는데 큰 성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꺼려하여 도망하여 욥바로 내려가는데 다시스로 가는 배가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의 순전함이라고 생각하기에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스올의 고통 속에 기도하여야 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되어지는 일들이 잘 된다는 생각들, 그리고 외형적 개념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외형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에서 비로소 교회의 존재적 정체성이나 성도의 존재 및 신앙이 평가되어질 수 있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실체라는 생각은 진정한 경건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막 13:1~2)

그럼 우리가 다시 주목하게 되어지는 히스기야의 이러한 죄악이라고 함을 허락하신 가운데서 읽게 하시는 주의 뜻하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의 권세의 깨어짐이라는 그 종말의 때의 모습과 그 시험의 성격이라고 하는 것을 읽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단 12:7)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성도의 구원받음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욥이 넘어지는 가운데서도 주의 은혜로 회개하며 그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히스기야의 죄로 인하여 넘어짐이라고 하는 것은 주의 말씀하심의 마지막이 아닌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이후에서는 주의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과 메시야의 고난과 구원하심에 대한 예언하심의 실체를 증거하는 말씀 안에서 오늘 본문이 증거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히스기야는 자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그 정당함을 찾는 귀한 자리에 서게 되었지만 개인적인 문제라는 측면에 있어서, 내면적 신앙에 있어서는 자신의 보기에 기뻐하는 것은 주의 판단의 정당함을 받기를 주저하였던 것입니다.

이사야의 책망을 받고도 자신의 시대에는 평안이 있을 것이라는 언급을 하고 있는 히스기야의 모습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고자하는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아직도 주관적인 측면의 실제적인 개념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실제를 자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정당함과 삶의 정당함을 찾는 즉 의롭다 칭함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는 것을 이루는 가운데서 주의 가르쳐주신 기도를 실천하고 힘써 행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 성도들은 바로 히스기야의 모습과 같은 존재적 반열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강압적으로 나타나는 욥의 모습과 달리 아주 순탄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상식적 보편의 판단에 비로소 납득 당위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분별이 있는 가운데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는 종말의 때에 있어서도 주의 위로하심에서 기쁨으로 씨를 뿌리며 결실을 맺는 자들로서 전혀 낯설지 않는 모습으로써, 언제나 함께하시며, 주의 뜻하신 때에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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