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6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24:1-27
부활, 이 한 소리
행24:1-27
부활, 이 한 소리
어떤 역사가는 역사를 기술하는 가운데서 언어의 생성된 시기를 언급함에 상당한 중요성과 실제성을 부여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언어 말이라고 하는 것이 그릇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가운데서 그 담아내는 것의 실재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또는 없는 것인지 또는 기만을 위한 것인지 유익을 위한 것인지 그러한 것에 따라서 때로는 식상해지기도 하지만 그러한 인간의 삶 속에 언어의 표현으로써의 말은 상당한 의미와 사실 사건을 형성한다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말 못하는 사람의 냉가슴’이라고 하는 것이 표현 못하는 사람의 답답함으로써 종종 사용되어지는 것을 기억할 때에 그 말이라고 함과 그 귀결되어지는 그 내용이라고 함의 여부가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 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동일한 내용에 대한 다른 설명의 대립적인 경우를 주목하게 되는데, 결국 어떤 전달하고자 하는 것의 사실여부와 그 실제적인 판단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까지 주목하도록 하시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더둘로’라는 변사와 사도 바울의 법정적인 대립에서 언급되어지는 그 사실들에서 복음의 중심을 읽게 되어지는데 주목하며 복음의 사실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0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4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대 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함께 변사 더둘로를 데리고 와서 총독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그 고소의 내용은 유대인을 다 소동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요, 성전을 더럽게 하려는 자라고 함의 내용이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이라고 함이 내용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의 내용으로써는 소동이라고 함을 말하기 너무나 짧은 시간이라고 함과 그러한 근거적인 측면에서의 결핍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고 나사렛 예수에 대한 것을 말함에 결국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4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벨릭스가 사도 바울을 지키도록 하고 그에게 자유를 주는 가운데서 그를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들음과 그의 차기 임기까지의 시간 동안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사도 바울을 구류하여 둠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증거와 그것에 대한 불의함을 말하는 자들의 합리성의 재고라고 함을 세상의 법정적인 입장에서 고찰함에 대한 것과 그것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구주이심에 대한 증거에서의 구원과 그로 인한 기쁨과 행복이라고 함의 실제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더둘로 변사가 말하고 있는 것의 내용적인 것 즉 원고 측의 입장은 세 가지로써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삼중적인 질문이라고 함에서 그의 임의적 방향성을 주어서 결국 정치적 사범(事犯)으로써 로마의 법정의 희생자로 예수님을 세우고자 하는 합목적적인 발언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에 대한 직접적인 주목을 하지 않은 가운데서의 현행범적인 개념의 언급으로 일관하는 것은 기각되어질 수 있는 것임을 언급하고 있고, 결국 신앙에 관한 내용인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것임이 그 핵심이라고 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부인할 수 없었던, 핑계할 수 없었던 벨릭스는 사도 바울을 차기 후임자가 올 때까지 그를 구류하고 그의 일상적인 것을 허용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 부활에 대한 것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로마서 4장의 내용적 증거를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롬4:2~25)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3~25)
그리스도 예수 주님께서 기름부으심과 성별을 말씀하시는 자존의 절대자 자신으로서 죽음이라고 함의 실재적 사실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믿는 자를 거룩하게 하셨음과 의롭다 하심에 대하여서,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그 정죄의 당위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당함의 재고를 생각하지 못하고 합리성의 임의적방향성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원고 측과 피고 측의 바뀜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세상이 심판을 받음에 대한 핑계치 못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욱 더둘로의 정치적 사범으로 이익적인 대변을 통한 예수님을 기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판례가 있는 가운데서의 성립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벨릭스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22절 참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미 로마에서도 아레오바고에서의 스토아철학자들과의 변론에서 알 수 없는 신이라는 개념의 로마의 신관에서는 사도바울을 정죄치 못하였고 그러한 것은 에베소에서도 아데미 신에 대한 것에서도 이미 정죄치 못한 판례가 있었음에 대한 것을 총독으로서 알고 있었음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다만 기소함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존중해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것뿐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기소가 승소한다면 벨릭스에게는 손해 보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는 여지도 또한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벨릭스 그의 정치적 민감성이라는 것은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도 바울에게 그만한 예우를 하여서 그를 가두어두나 그의 일상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재량을 보이고 있습니다.
벨릭스의 이름의 뜻은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현실적인 실제의 여러 가지 판단을 할 때에 자체적 행복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불안한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도, 사도 바울은 갇히는 현실적인 고통 속에서도 실제적 자유를 말하게 되며 행복의 실제를 누리게 되어지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세상에 보냄을 받은 성도의 삶, 전도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행복하냐는 그러한 질문에 기소되어지는 것이 성도들의 기본적인 모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인해서 세상의 불이익을 말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사실을 말하는 자로서의 진정한 자유와 그 가운데서의 행복의 실제를 말하는 것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롬 4:6~9 참고)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것은 기독교에 대하여서 여러 가지 비판되어질 수 있음의 합리적인 비판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현실적인 당위성을 말할 수 있다고 하여도, 결국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과 거룩함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주의 부활하심에서 비롯되어지는 의롭게 하심과 주의 성도로서의 거룩함과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권세 즉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정당함에서 비롯되어지는 상대적인 언급들 즉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은 상대적인 현실적인 당위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며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그러한 자들의 현실적인 행복의 이의가 있을 수 있고 현실적으로 당위성의 강요로 핍박하게 되어지지만 구속받은 자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 전도자로서의 성도들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의 사실을 말할 때에는 그 또한 구원의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리에 설수 있는 은혜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구원을 기뻐하며, 주의 부활하심에서 주어지는 그 의로움은 예수님을 믿는 가운데서 주어지는 의로움이요 그 사실임을 증거하는 가운데 주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기쁨과 증거로 주의 택한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시는 그 사역을 잘 감당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예를 들어, ‘말 못하는 사람의 냉가슴’이라고 하는 것이 표현 못하는 사람의 답답함으로써 종종 사용되어지는 것을 기억할 때에 그 말이라고 함과 그 귀결되어지는 그 내용이라고 함의 여부가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 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동일한 내용에 대한 다른 설명의 대립적인 경우를 주목하게 되는데, 결국 어떤 전달하고자 하는 것의 사실여부와 그 실제적인 판단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까지 주목하도록 하시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더둘로’라는 변사와 사도 바울의 법정적인 대립에서 언급되어지는 그 사실들에서 복음의 중심을 읽게 되어지는데 주목하며 복음의 사실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0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4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대 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함께 변사 더둘로를 데리고 와서 총독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그 고소의 내용은 유대인을 다 소동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요, 성전을 더럽게 하려는 자라고 함의 내용이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이라고 함이 내용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의 내용으로써는 소동이라고 함을 말하기 너무나 짧은 시간이라고 함과 그러한 근거적인 측면에서의 결핍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고 나사렛 예수에 대한 것을 말함에 결국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4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벨릭스가 사도 바울을 지키도록 하고 그에게 자유를 주는 가운데서 그를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들음과 그의 차기 임기까지의 시간 동안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사도 바울을 구류하여 둠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증거와 그것에 대한 불의함을 말하는 자들의 합리성의 재고라고 함을 세상의 법정적인 입장에서 고찰함에 대한 것과 그것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구주이심에 대한 증거에서의 구원과 그로 인한 기쁨과 행복이라고 함의 실제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더둘로 변사가 말하고 있는 것의 내용적인 것 즉 원고 측의 입장은 세 가지로써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삼중적인 질문이라고 함에서 그의 임의적 방향성을 주어서 결국 정치적 사범(事犯)으로써 로마의 법정의 희생자로 예수님을 세우고자 하는 합목적적인 발언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에 대한 직접적인 주목을 하지 않은 가운데서의 현행범적인 개념의 언급으로 일관하는 것은 기각되어질 수 있는 것임을 언급하고 있고, 결국 신앙에 관한 내용인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것임이 그 핵심이라고 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부인할 수 없었던, 핑계할 수 없었던 벨릭스는 사도 바울을 차기 후임자가 올 때까지 그를 구류하고 그의 일상적인 것을 허용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 부활에 대한 것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로마서 4장의 내용적 증거를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롬4:2~25)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3~25)
그리스도 예수 주님께서 기름부으심과 성별을 말씀하시는 자존의 절대자 자신으로서 죽음이라고 함의 실재적 사실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믿는 자를 거룩하게 하셨음과 의롭다 하심에 대하여서,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그 정죄의 당위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당함의 재고를 생각하지 못하고 합리성의 임의적방향성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원고 측과 피고 측의 바뀜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세상이 심판을 받음에 대한 핑계치 못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욱 더둘로의 정치적 사범으로 이익적인 대변을 통한 예수님을 기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판례가 있는 가운데서의 성립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벨릭스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22절 참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미 로마에서도 아레오바고에서의 스토아철학자들과의 변론에서 알 수 없는 신이라는 개념의 로마의 신관에서는 사도바울을 정죄치 못하였고 그러한 것은 에베소에서도 아데미 신에 대한 것에서도 이미 정죄치 못한 판례가 있었음에 대한 것을 총독으로서 알고 있었음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다만 기소함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존중해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것뿐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기소가 승소한다면 벨릭스에게는 손해 보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는 여지도 또한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벨릭스 그의 정치적 민감성이라는 것은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도 바울에게 그만한 예우를 하여서 그를 가두어두나 그의 일상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재량을 보이고 있습니다.
벨릭스의 이름의 뜻은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현실적인 실제의 여러 가지 판단을 할 때에 자체적 행복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불안한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도, 사도 바울은 갇히는 현실적인 고통 속에서도 실제적 자유를 말하게 되며 행복의 실제를 누리게 되어지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세상에 보냄을 받은 성도의 삶, 전도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행복하냐는 그러한 질문에 기소되어지는 것이 성도들의 기본적인 모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인해서 세상의 불이익을 말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사실을 말하는 자로서의 진정한 자유와 그 가운데서의 행복의 실제를 말하는 것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롬 4:6~9 참고)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것은 기독교에 대하여서 여러 가지 비판되어질 수 있음의 합리적인 비판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현실적인 당위성을 말할 수 있다고 하여도, 결국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과 거룩함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주의 부활하심에서 비롯되어지는 의롭게 하심과 주의 성도로서의 거룩함과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권세 즉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정당함에서 비롯되어지는 상대적인 언급들 즉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은 상대적인 현실적인 당위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며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그러한 자들의 현실적인 행복의 이의가 있을 수 있고 현실적으로 당위성의 강요로 핍박하게 되어지지만 구속받은 자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 전도자로서의 성도들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의 사실을 말할 때에는 그 또한 구원의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리에 설수 있는 은혜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구원을 기뻐하며, 주의 부활하심에서 주어지는 그 의로움은 예수님을 믿는 가운데서 주어지는 의로움이요 그 사실임을 증거하는 가운데 주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기쁨과 증거로 주의 택한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시는 그 사역을 잘 감당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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