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13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25:1-27
야생마
행25:1-27
야생마
정치적 용어로 사용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뜨거운 감자’ 즉 감당하기 어려운 또는 회피하여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가진 현안적인 문제로써 부각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떠넘기게 되어지는 경향의 어떤 문제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라고 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것으로 소란스럽게 하는 사람에게는, 그 기득권적인 특정 사회에서는, 야생마(野生馬)라는 수식이 붙일 수도 있는 경향이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답도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답변하지 못한다는 것과 답변이 없다는 것은 또한 항상 같은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입각한 야생마적인 길들여지지 않는 자가 있을 때에 그를 길들이고자 하는 전문가들이 나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형식적인 표현의 동일함을 말할 수도 있는 말씀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아그립바’ 왕에게 심문 받게 되어지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말씀하심을 또한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3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베스도가 도임하여서 벨릭스 총독을 대신하게 되고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가, 유대인들의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그러한 의도에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려고 하는 유대인들에 대하여서, 다시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사도바울을 심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심문하여도 불의한 일이 없음에 대한 바울의 언급과 가이사에게 바울이 심판을 호소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베스도가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을 비공식적으로 만남과 사도 바울을 심문한 것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큰 위세를 나타내며 천부장들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을 함께 신문소로 들어오게 하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라고 하여 심문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아그립바’왕과 사도 바울의 모습입니다. 특히 아그립바 왕 그의 이름의 뜻은 ‘야생마를 길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자임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더불어서 그와 함께한 버니게의 뜻은 ‘승리를 거둔’이라는 뜻의 증거자들이었음을 주목합니다.
사도행전 17장 이전부터 사도 바울에 대하여서 유대인들의 집요한 비판과 소동과 소송이라고 함을 행하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은 주의 복음을 핑계할 수 없는 것이 기정사실인데 그러한 것을 핑계할 수 있고 배척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합리적 당위성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정치적으로 뜨거운 감자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현안으로써 벨릭스에게서 구류당하고 심판받았던 사도 바울이 베스도와 아그립바에게 심문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정치적인 사범으로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결국 사도 바울을 마치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과 같이 인식되어지는 가운데서 그들의 승리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정황을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벨릭스는 '행복'(happy)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베스도는 페스티발(festival) 즉 '축제'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아그립바는 ‘야생마를 길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하는 세상에서는 사람의 행복이라고 함을 구속함을 받은 자의 행복(롬 4:6~9)이라고 함에서 그 행복을 말할 수 있느냐는 심문과 자신들의 임의적 축제의 기준과 자신들의 임의적인 기득권에서 해석한 야생마 취급이라고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핍박하게 되어지는 경향이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광야교회(행 7:38)의 모습은 정착민들에게 있어서는 때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또는 정착하지 못한 자들로써 야생적인 민족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세례요한의 증거로써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 1:23)와 같은 것이 그 정체성에 대한 세상적 판단을 받을 때에는 야생마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의 기득권적 소유라고 함을 주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임의적 행함이 옳은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을 심문하고 있는 아그립바와 버니게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판단하고 있는 가운데서 그를 길들이겠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것이 승리한 것과 같이 자의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자의 모습이 바로 이들의 존재적 증거가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위세적인 측면에서는 화려할 수 있지만 그 승리의 실제는 불법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을 정죄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으며 또한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부부로서의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사이로써 그 함께함이 허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을 야생마적인 개념으로 잘못되게 임의적으로 규정하고 길들이겠다는 것은 그 승리를 거둔다는 생각이 합당하게 설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말씀하시고 있음으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또는 무엇이 ‘야생’이라는 판단을 받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과 어떤 것이 그와 같은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할 때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받지 못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의 존립적 정당함과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과연 야생이 되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어떤 맛이나 일이나 생각들이 길들여진다는 개념에서는 어떤 자유를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질 수 있는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국한되어진 가운데서도 진정한 자유를 말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의 재가를 받게 되어지는 곳에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어 그의 구속함을 얻는 자로서의 자유가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에서 야생마적인 판단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다고 하여도 진정한 자유와 존재의 구원으로 인한 존립적인 정당함을 받는 자리에 서는 것이 진정한 평안을 주는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것으로써의 버려진 야생의 자리에 심판의 자리에 서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상대적인 것에 길들여진다는 것의 국한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자유를 말하지 못한다는 상식적인 소심함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주의 말씀하심의 국한 속에서도 실로 아름다운 기업과 자유와 생명과 구원을 얻게 되어지는 예수님을 믿는 기쁨이 있어서, 이제는 주의 뜻하심을 나타내는 길들여진 야생마와 같이, 주의 뜻하심을 분별하여서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는 주의 뜻하심을 분별하고 가이사에게 호소하는 지혜로운 자의 모습과 같이, 주님의 마차를 끌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주의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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