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0월 11, 2004

인내로 영혼을 얻으리라

2004년 10월 10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21:1-19
인내로 영혼을 얻으리라

상대적인 사회에서 어떤 하나의 개념이라든지 아니면 자신의 주관이라고 하는 것을 고수하려고만 한다면 여러 가지 편협함에 대한 판단과 논란을 불러올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다원화되어지는 사회에서의 부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미련한 고집으로써 미화되어지는 인내로써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독불장군과 같이 세상을 살아감에 대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 상대적이라는 것은 또 하나의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대적이면서도 그 분명함을 말하여야 하고 그 당위성이 있는 것은 또한 있다고 함에 그 판단들에서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당위성이 있는 것을 따르는 것은 그 인내가 비화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의 열매를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핑계되어질 수 없는 것으로써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주의 증거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는 상대적 이의(異意)로 인한 핑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의 사실을 위한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헛된 경영에서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 핑계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헛된 경영을 하는 그 때가 종말의 때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누가복음에서의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심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부자들의 연보궤에 헌금을 넣는 것을 보시고,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모든 사람보다도 많이 넣었음을 말씀하시면서 가난한 과부가 구차한 가운데서도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날이 이르면 다 무너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에 저희들이 예수님께 주님이 말씀하신 그런 일이 이루려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는지 질문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종말론에 대한 강화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님이 종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하심의 시작을 누가복음 20장 45절에서 47절에 나타나고 있는 모퉁이 돌을 버린 건축자들의 모습을 지적하시는 것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때를 묻는 자들에게 그 미혹받게 되어지는 징조가 있음에 대한 것도 말씀하시며, 그 미혹과 핍박에서 인내로 영혼을 얻을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이 됩니다.

오늘본문 첫 번째에서는 과부의 헌금함에 대한 주의 칭찬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약한 자 편들기 식의 해석이 아니라 주의 말씀하시는 종말론의 그 때와 시기라고 함이 주님을 배척한 자들의 악함이라고 함에서 읽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누가복음 20장에 나타나는 즉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와서 예수님이 무슨 권세로써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라고 함에 있어서 결국 그들이 요한의 증거와 그의 정당함에서 볼 때에 상대적으로도 핑계할 수 없는 사실을 말함에 그들의 악함이라고 하는 즉 주를 배척함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라고 함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눅 20:1~7, 17~18)

이것은 더 나아가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음을 말씀하심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고 돌이 사람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의 모습은 누가복음 20장 45절 이후에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고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로써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그러한 판결 받을 자들의 모습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과부의 헌금으로써 두 렙돈은 이와 같은 문맥적 연결선상에서 이루어짐을 주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종말의 때를 말씀하시는 것은 주님을 믿지 아니하는 복음전파시대이며 주의 이름을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힘없는 자들의 헌금을 갈취하는 자들의 모습들이 머릿돌이신 예수님의 심판하심에 대상이 되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오늘 본문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은 그러한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자들의 외적인 수단으로써의 성전의 구색을 갖춘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판함이 예수님을 배척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자신들의 시대인 것을 알고 이러한 일이 어느 때에 일어나는 것인가 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시대와는 무관함에 대한 것을 말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이미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한 칭찬하심과 성전의 규모적인 것에서 그러한 헌금을 받는 자들의 모습이 판단되었다고 할 때에 자신들과 자신들의 시대에 대한 말씀하심이라는 것을 대제사장들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징조에 대한 이야기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종말에 대한 말씀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한마디로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19절의 말씀으로써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동일한 말씀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에 여러 가지 현상적 징조를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8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와서 임의적으로 자신이 구세주인 것처럼 행동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으로 거룩함을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생각하지 않고 임의적으로 거룩함과 하나님의 심판하심에 대한 것으로 자신들의 배를 체우는 이단들이 있을 것과 그것으로 인한 난리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10절 이하에서는 현실적인 실제의 표징들로써 민족의 분란과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고 하늘의 변화적인 것이 있을 것인데 중요한 것은, 하늘의 징조라는 개념에서 시간을 말하는 해와 달의 소임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시간(times)이라고 하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해와 달이 빛을 잃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은 어떤 전란적인 개념의 종말론적 입장이 되면서도 창조 시에 그것으로 시와 연한을 이루라고 하신 말씀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그 해와 달의 소임적 증거가 증거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시간과 시간의 판단을 받는 즉 역사적 사실을 임의적으로 말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적인 역사 속에 오심에 대한 것의 불신임으로 나타나게 될 것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역사적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면 역사적 구속하심을 믿지 못한다면 미혹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많아지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하나의 징조가 되어지는데 오늘날도 하나님의 일상적인 역사라고 하는 것을 바도 받지 못하고 진화론적 개념의 창조설을 말한다든지 성경에 있어서 본문비평을 비롯한 고등비평이라고 하는 것들 소위 오늘날에 있어서 성경을 문학적인 해석을 해야 한다는 자들은 모두 이와 같이 시간이라고 함이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임의적인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그러한 정당하지 못한 모습을 전제로 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것을 행하고 있는 자들의 하늘의 큰 징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이러한 인식의 확산은 사회적 인륜적 관계에 큰 영향력을 줄 것이며 이것은 절대의 상관성을 말하는 가운데서 극단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과 그 미혹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자존의 절대자의 상대적 증거는 자기 자체적 절대 정당함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판단을 받지 않음을 말하게 되며 오히려 일상적인 상대적인 판단들이 판단받아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인하여서 감정적으로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상대적인 것만으로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증거를 함에 있어서 상대적인 판단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은 존재는 상대적 정죄의 실제적인 판단을 받지 않기 때문에 머리카락도 상치 아니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 즉 예수님이 우리 존재의 구원의 모퉁이 돌이 되신다는 것은 상대적인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따른다는 것은 한 가지에 모든 것을 모든 실재와 사실들을 말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상대적인 편협이라는 판단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은 핍박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당한 핍박에서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자의 구원을 받을 때에 그 인내는 우리 존재의 우리 영혼의 구원의 실제를 말하게 되며 누리게 된다는 것, 얻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사실을 전체의 기반으로 받아들인다할 때는 상대적 여지를 두는 것이 상대적인 보편적 생각을 할 수 있는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서 환영받을 수 있는 모습이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모순된 모습을 보는데,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생각과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러한 앞서 언급한 말도 상대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열려진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모습이니 너무나 제정신이 아닌 세상의 인식들을 봅니다.

특히 자존하시는 절대자께서 자신의 절대 정당함으로 구원을 말씀하시면 그것을 상대적인 것만으로 정당함을 고려함 없이 임의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그 모든 핑계에 지나지 않으며 핑계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의 복음은 핑계치 못하는 복음인 것입니다.

임의적인 세상 자신들의 편협한 보편적인 입장에서 편협하다고 말하고 있는 가운데서 상대적인 주의 가르침을 받는 가운데서는 많은 핍박이 있게 되지만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제와 지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라고 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에서 사실을 분별하는 가운데서 참된 주의 구원을 증거하는 가운데 주의 뜻하심과 그 인내의 사실을 말하는 가운데서 영혼의 구원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성령의 은사로써의 인내를 온전히 이루시는 가운데 주 예수이름으로 영혼의 구원을 얻으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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