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 3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11:17-34
주님의 떡과 잔
지난 세대와는 달리 요즘에는 자녀를 많이 두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너무 귀하게 자라고 그래서 아이들의 교육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자기의 아이들이 원하는 것에 방임하는 경향과 같은 느낌을 종종 받을 수 있습니다. 조금 떠들더라도 소위 기죽이지 않겠다는 측면에서 묵과하고 서비스차원의 기관이나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한마디 하려고 하다가도 참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같은 부모된 입장에서 서로가 이해하기도 하고 그런 가운데서 아이들의 버릇없음에 대한 것에 책망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측면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이일수록 합당한, 경우에 맞는, 책망을 하는 것이 그 아이를 위한 것이고 그러한 가운데서 바른 인성으로 자라게 된다고 함을 말하게 됩니다.(잠13:24 참고)
현대의 사람들보다도 앞선 세대 사람들이 이러한 것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정교육이라고 함을 기준으로 사람의 행함에 대한 판단을 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의 말을 빌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증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의 교회의 질서에 대한 기본단위로써 가정에 대한 인식이라고 함이 오늘날 세대의 사람들 보다는 앞선 세대에서 더욱 잘 의식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질서 안에서의 ‘하나 됨’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주의 떡과 잔에 대한 합당한 분별이 기본적인 가정을 돌아볼 수 있는 자들로서의 성숙함이 없는 것에 비교되어지고 있음을 주목하면서 바른 주의 뜻하심의 합당한 성찬식에 대한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7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3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모임이 유익이 되지 못하고 해로움을 인하여서 칭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들의 생각에 교회의 모임에 편당이 있어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들이 나타나게 될 것을 지적함과 그런즉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고 함을 지적하는데 구체적인 이유로 그 고린도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진술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각자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는 자들로 시장한 사람과 취한 사람이 있고 먹고 마실 집이 없음이 아닌데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것들인데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님께 받은 성찬에 대한 것은 이를 행하여 주님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임을 지적하면서 피로세운 언약으로써의 잔과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으로써의 떡을 마시고 먹는 것을 행함에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음에 대한 것을 지적하면서 판단 받지 않는 자리에 서도록 하고 형제들이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고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도록 해서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도록 함을 말하고 있고 자신이 나아갈 때에 바르게 고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 고린도전서 11장 전체는 두 가지로 나누이게 되는데 하나는 전반적인 지난번 본문의 말씀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라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라고 함을 기억하도록 하고 그 가운데서 남성과 여성의 각기 세워주신 질서라고 함의 사실이라고 하는 실제를 생각할 때에 임의적 전통의 모습만 가지고 교회의 분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찬이라고 함을 행하는 성도들로서 주의 양육을 받을 아이와 같은 자들로서 재창조의 질서에서의 모습에서 읽게 되어지는 가정의 아이들의 모습을 기억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 구체적으로 오늘은 후자의 경우가 주목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하나님을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서의 존경과 순종이 있는 가운데 있다고 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자신의 부모를 진정으로 존중하고 주 안에서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부모와 자식’간의 친근함과 편함이라고 하는 것이 있으면서도 그러한 질서적인 차원에서 존중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없다면 구약에 엘리의 가정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며 그가 가르친 사무엘과 비교되어지는 가운데서 그들이 칭찬을 받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것이 오늘날 편당으로 나누어진 고린도교회의 성도들로서의 모습들로 비교되어질 수 있음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엘리의 아들은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불량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갈고리로 건져가고 하나님께 드릴 제물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 억지로 빼앗고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을 하고 이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고 성추행 성범법자가 되는데도 제사장 엘리는 말하기를 ‘어찌 하여 이런 일이 있느냐 소문이 좋지 않다’는 식으로 그냥 넘어가고 있습니다.
자식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범하였다면 책망하는 것이 옳은 것인데 그것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 드리는 그 제사를 멸시하는 자의 모습과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은 십계명을 완전히 범한 자의 모습입니다.(삼상 2:12~24)
그 결과 엘리의 아들들은 전사하였고 그 소리를 들은 며느리는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라는 이가봇으로 그 아들을 칭하고 쾌념치 않게 되며 엘리는 목이 부러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삼상 4:17~22)
이러한 엘리의 가정과 고린도교회의 모습과 비교되어지고 있음을 사도 바울은 의식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편당이 있다고 하여서 여러 편당의 자의적 입장의 실리적 약삭빠름을 지향하다보니 먼저 먹고 나중에 먹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드린 어린양의 화목제물로 자신을 드리신 예수님의 세우신 언약을 위해 준비하고 바쳐진 것을 임의적으로 취하고 있는 것은 엘리의 불량아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 앞서 고린도교회에 음란이 있었던 것을 보면 과연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진정으로 주의 상위에 떡과 잔을 합당하게 받지 못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의 사사이며 제사장인 엘리의 부정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따라서 그 제도속에서 한나의 아들 사무엘이 자라며 그 가운데서 양육을 받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그 이름의 뜻이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로서 주의 말씀을 가르치는 그 질서적 정당함을 따라서 그곳에서 양육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말씀으로 주의 몸된 교회를 주목할 때에는 그 말씀을 전하는 자의 모습에서 비로소 교회의 정체성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르치는 그 내용적 증거적 메시지가 먼저 그 교회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하고 그러한 것을 기억한다면 그 말씀증거자는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아야 하는 것이며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 말씀증거자는 그 목이 꺾이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모습과 여러가지 비판되어질 수 있는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주의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어진다고 하면 교회로서 인정하고 그곳에서 신앙생활함의 당연함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에서 믿음으로 다른 질서를 찾을 수 있고 떠날 수 있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또 그러한 것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떠나는 것이라고 함과 그래도 그 지역교회의 정체성이 주의 말씀하신 바가 선포되어진다면 최종적 판단은 주께 맡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교인들의 믿음의 분량적 차이로 거취문제를 정한다고 하여도 그것의 여부로 교회의 정체성 자체를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서 그 질서를 생각하지 않고 그 창조적 질서라고 하는 것을 읽지 못하는 가운데서 가능성만 따라서 실리적인 것만 따라서 행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에 단호한 책망을 하여야 하겠지만 자신을 보내셔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할 때에는 그는 다소 완곡한 표현으로 말하기를 '이 일로 너희를 칭찬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더욱 한가지 기억하게 되는 것은 고린도교회의 이러한 하나님 안에서 언약의 표현과 증거로써의 성찬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지 못하고 그 앞서 하나님의 몸된 교회의 창조적 재 창조적 질서를 생각하지 못한 가운데서 판단받게 되는 것이 구약의 엘리 제사장의 모습과 비교되어진다고 할 때에 달리 생각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자존의 하나님을 알지 못함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리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 가능성에 따른 기준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교회의 창조적 재창조적 질서를 임의적 가능성으로 재해석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과 이것은 약속을 받지 못하는 세상의 안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애굽의 왕이 말하기를 '여호와가 누구관대.. 이스라엘을 보낼 것인가'(출 5:1~2)라고 함을 말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서 출애굽을 이루셨던 것과 같이 세상은 자존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생활하려고 하는 자들을 어거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적인 입장에서 판단하려고 하며 그들이 의식함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죄악된 것으로 지배하는 사단의 악한 괘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기본적인 불량자로 나타나며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의모습'(삼상 2:12)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러한 모습이 하나님의 새언약의 증거로써의 한몸을 나타내는 주의 상의 성찬에 대한 정당함의 실재와 실제를 받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심의 중심을 마음에 두지 못하기 때문에, 자존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그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리에 서지 않기 때문에 주의 상의 주의 성찬을 정당하게 합당하게 받지 못한 자로서 나타나고 있음을 사도 바울은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은 주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예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써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사실이 진정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자신이 새로운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서 상대적인 한 표현으로써 예수님이 진리라는 사실이 절대적인 진리로서 나타나고 있고 그로 인해서 치유되어지는 사실들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사실들이 진정한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주의 세우신 교회가 이미 창조적 질서 가운데서 그 실재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할 때에 재창조적인 교회의 정체성을 기억하고 그로인한 지역교회의 질서를 정당하게 받아서 그 가운데서 주의 말씀의 사실을 따라서 생활하는 사무엘과 같은 자리에 서게 하심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질서를 임의적 가능성과 필요성에서 비로소 되어진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이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그 재창조적 질서를 따라서 규정되어진 것임을 기억하고 그 사실이 임의적으로 부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진실한 것으로 알아서 그 질서를 말씀 하심 안에서 믿음으로 존중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에 합당하게 배우고 섬기시는 가운데 사무엘과 같이,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와 같이,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성도들로서, 주의 상을 분별하며 주의 떡과 잔을 합당하게 받는 자들로서, 주의 새로 새우신 언약과 주의 죽으심을 주의 오실 때까지 전하시는 자들로서, 하나님앞에서 받으신 바가 되시는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고전11:17-34
주님의 떡과 잔
지난 세대와는 달리 요즘에는 자녀를 많이 두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너무 귀하게 자라고 그래서 아이들의 교육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자기의 아이들이 원하는 것에 방임하는 경향과 같은 느낌을 종종 받을 수 있습니다. 조금 떠들더라도 소위 기죽이지 않겠다는 측면에서 묵과하고 서비스차원의 기관이나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한마디 하려고 하다가도 참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같은 부모된 입장에서 서로가 이해하기도 하고 그런 가운데서 아이들의 버릇없음에 대한 것에 책망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측면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이일수록 합당한, 경우에 맞는, 책망을 하는 것이 그 아이를 위한 것이고 그러한 가운데서 바른 인성으로 자라게 된다고 함을 말하게 됩니다.(잠13:24 참고)
현대의 사람들보다도 앞선 세대 사람들이 이러한 것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정교육이라고 함을 기준으로 사람의 행함에 대한 판단을 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의 말을 빌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증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의 교회의 질서에 대한 기본단위로써 가정에 대한 인식이라고 함이 오늘날 세대의 사람들 보다는 앞선 세대에서 더욱 잘 의식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질서 안에서의 ‘하나 됨’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주의 떡과 잔에 대한 합당한 분별이 기본적인 가정을 돌아볼 수 있는 자들로서의 성숙함이 없는 것에 비교되어지고 있음을 주목하면서 바른 주의 뜻하심의 합당한 성찬식에 대한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7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3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모임이 유익이 되지 못하고 해로움을 인하여서 칭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들의 생각에 교회의 모임에 편당이 있어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들이 나타나게 될 것을 지적함과 그런즉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고 함을 지적하는데 구체적인 이유로 그 고린도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진술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각자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는 자들로 시장한 사람과 취한 사람이 있고 먹고 마실 집이 없음이 아닌데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것들인데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님께 받은 성찬에 대한 것은 이를 행하여 주님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임을 지적하면서 피로세운 언약으로써의 잔과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으로써의 떡을 마시고 먹는 것을 행함에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음에 대한 것을 지적하면서 판단 받지 않는 자리에 서도록 하고 형제들이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고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도록 해서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도록 함을 말하고 있고 자신이 나아갈 때에 바르게 고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 고린도전서 11장 전체는 두 가지로 나누이게 되는데 하나는 전반적인 지난번 본문의 말씀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라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라고 함을 기억하도록 하고 그 가운데서 남성과 여성의 각기 세워주신 질서라고 함의 사실이라고 하는 실제를 생각할 때에 임의적 전통의 모습만 가지고 교회의 분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찬이라고 함을 행하는 성도들로서 주의 양육을 받을 아이와 같은 자들로서 재창조의 질서에서의 모습에서 읽게 되어지는 가정의 아이들의 모습을 기억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 구체적으로 오늘은 후자의 경우가 주목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하나님을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서의 존경과 순종이 있는 가운데 있다고 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자신의 부모를 진정으로 존중하고 주 안에서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부모와 자식’간의 친근함과 편함이라고 하는 것이 있으면서도 그러한 질서적인 차원에서 존중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없다면 구약에 엘리의 가정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며 그가 가르친 사무엘과 비교되어지는 가운데서 그들이 칭찬을 받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것이 오늘날 편당으로 나누어진 고린도교회의 성도들로서의 모습들로 비교되어질 수 있음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엘리의 아들은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불량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갈고리로 건져가고 하나님께 드릴 제물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 억지로 빼앗고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을 하고 이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고 성추행 성범법자가 되는데도 제사장 엘리는 말하기를 ‘어찌 하여 이런 일이 있느냐 소문이 좋지 않다’는 식으로 그냥 넘어가고 있습니다.
자식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범하였다면 책망하는 것이 옳은 것인데 그것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 드리는 그 제사를 멸시하는 자의 모습과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은 십계명을 완전히 범한 자의 모습입니다.(삼상 2:12~24)
그 결과 엘리의 아들들은 전사하였고 그 소리를 들은 며느리는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라는 이가봇으로 그 아들을 칭하고 쾌념치 않게 되며 엘리는 목이 부러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삼상 4:17~22)
이러한 엘리의 가정과 고린도교회의 모습과 비교되어지고 있음을 사도 바울은 의식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편당이 있다고 하여서 여러 편당의 자의적 입장의 실리적 약삭빠름을 지향하다보니 먼저 먹고 나중에 먹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드린 어린양의 화목제물로 자신을 드리신 예수님의 세우신 언약을 위해 준비하고 바쳐진 것을 임의적으로 취하고 있는 것은 엘리의 불량아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 앞서 고린도교회에 음란이 있었던 것을 보면 과연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진정으로 주의 상위에 떡과 잔을 합당하게 받지 못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의 사사이며 제사장인 엘리의 부정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따라서 그 제도속에서 한나의 아들 사무엘이 자라며 그 가운데서 양육을 받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그 이름의 뜻이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로서 주의 말씀을 가르치는 그 질서적 정당함을 따라서 그곳에서 양육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말씀으로 주의 몸된 교회를 주목할 때에는 그 말씀을 전하는 자의 모습에서 비로소 교회의 정체성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르치는 그 내용적 증거적 메시지가 먼저 그 교회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하고 그러한 것을 기억한다면 그 말씀증거자는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아야 하는 것이며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 말씀증거자는 그 목이 꺾이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모습과 여러가지 비판되어질 수 있는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주의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어진다고 하면 교회로서 인정하고 그곳에서 신앙생활함의 당연함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에서 믿음으로 다른 질서를 찾을 수 있고 떠날 수 있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또 그러한 것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떠나는 것이라고 함과 그래도 그 지역교회의 정체성이 주의 말씀하신 바가 선포되어진다면 최종적 판단은 주께 맡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교인들의 믿음의 분량적 차이로 거취문제를 정한다고 하여도 그것의 여부로 교회의 정체성 자체를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서 그 질서를 생각하지 않고 그 창조적 질서라고 하는 것을 읽지 못하는 가운데서 가능성만 따라서 실리적인 것만 따라서 행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에 단호한 책망을 하여야 하겠지만 자신을 보내셔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할 때에는 그는 다소 완곡한 표현으로 말하기를 '이 일로 너희를 칭찬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더욱 한가지 기억하게 되는 것은 고린도교회의 이러한 하나님 안에서 언약의 표현과 증거로써의 성찬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지 못하고 그 앞서 하나님의 몸된 교회의 창조적 재 창조적 질서를 생각하지 못한 가운데서 판단받게 되는 것이 구약의 엘리 제사장의 모습과 비교되어진다고 할 때에 달리 생각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자존의 하나님을 알지 못함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리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 가능성에 따른 기준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교회의 창조적 재창조적 질서를 임의적 가능성으로 재해석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과 이것은 약속을 받지 못하는 세상의 안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애굽의 왕이 말하기를 '여호와가 누구관대.. 이스라엘을 보낼 것인가'(출 5:1~2)라고 함을 말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서 출애굽을 이루셨던 것과 같이 세상은 자존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생활하려고 하는 자들을 어거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적인 입장에서 판단하려고 하며 그들이 의식함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죄악된 것으로 지배하는 사단의 악한 괘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기본적인 불량자로 나타나며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의모습'(삼상 2:12)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러한 모습이 하나님의 새언약의 증거로써의 한몸을 나타내는 주의 상의 성찬에 대한 정당함의 실재와 실제를 받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심의 중심을 마음에 두지 못하기 때문에, 자존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그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리에 서지 않기 때문에 주의 상의 주의 성찬을 정당하게 합당하게 받지 못한 자로서 나타나고 있음을 사도 바울은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은 주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예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써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사실이 진정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자신이 새로운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서 상대적인 한 표현으로써 예수님이 진리라는 사실이 절대적인 진리로서 나타나고 있고 그로 인해서 치유되어지는 사실들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사실들이 진정한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주의 세우신 교회가 이미 창조적 질서 가운데서 그 실재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할 때에 재창조적인 교회의 정체성을 기억하고 그로인한 지역교회의 질서를 정당하게 받아서 그 가운데서 주의 말씀의 사실을 따라서 생활하는 사무엘과 같은 자리에 서게 하심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질서를 임의적 가능성과 필요성에서 비로소 되어진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이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그 재창조적 질서를 따라서 규정되어진 것임을 기억하고 그 사실이 임의적으로 부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진실한 것으로 알아서 그 질서를 말씀 하심 안에서 믿음으로 존중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에 합당하게 배우고 섬기시는 가운데 사무엘과 같이,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와 같이,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성도들로서, 주의 상을 분별하며 주의 떡과 잔을 합당하게 받는 자들로서, 주의 새로 새우신 언약과 주의 죽으심을 주의 오실 때까지 전하시는 자들로서, 하나님앞에서 받으신 바가 되시는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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