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6월 24, 2005

가능과 유익에 대하여

2005년 6월 22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6:1-20
가능과 유익에 대하여

한 집단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표현이나 자유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지 못하는 그러한 정황에, 소위 길들여진다는 부적절한 표현이 가능한 정황에, 적응해나가는 것이 삶의 한 모습이 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어떤 가능성을 꿈꾸며 또한 그러한 것을 추구하는 자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에 한번쯤 눈을 돌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역사적으로도 고전적인 측면을 주장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낭만적인 그러한 사조들의 대립적 영향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인생들의 인식적인 일반적인 경향이 그렇다고 함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낭만적인 것을 넘어서 실증적인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고 오늘날에서는 유익을 말하는 이러한 실증적인 것이 일반적인 실제적인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의 주 앞에서 충성된 종으로서의 자리매김하고자 할 때에 그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고심하게 되어지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심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음행이 있음에 대한 것을 책망하는 가운데서 이어지는 말씀으로서 성도의 세상을 판단하는 권한이 있는데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 경히 여김을 받는 자를 세움에 대한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히 여기는 자들에게 송사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그러한 일을 행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바에야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않은가라는 반문을 하면서 그 속이는 자는 너희 형제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불의한 자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음욕과 탐심으로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함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든 것이 사도 바울에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모든 것이 자신에게 가하나 아무에게든지 자신이 제재를 받지 않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몸으로 죄를 짓는 것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으로서 우리 것이 아님에 대한 것을 상기하고 값으로 산 것이므로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이 가하나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며 책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중심이 이어지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서 그 유익의 사실을 말하고 분별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분파적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주를 위한 충성이라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의 분별력이 진정한 사실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먼저 말했던 것입니다. 즉 충성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스스로 행하는 가운데서의 열심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돌적 개념으로 실생활에서 영향력을 끼치게 되고, 견인적 역활을 하거나 반목을 가져온다는 것을 지적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열매로서의 하나인 ‘충성’을 구하는 자들로서 그 실재의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 진정으로 충성을 구하는 자의 기본적인 신실함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고 자기 기만적 충성에서의 임의적 ‘나대로의 충성’이라는 판단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의 연장선에서 사도 바울은 이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생각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이 자신을 판단함에 있어서도 주의 말씀 안에서 판단하는 것을 말하는 것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 자신이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된 것이라는 사실을 받을 때에 음란이라고 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그러한 것을 감추고 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의 유익을 말하는 것 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가운데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분별하고 그것이 진정한 사실임을 받을 수 있을 때에 자신의 명예에 따라서 정치적으로 파당적 지지세력을 말하는 자리에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분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사실규명을 세상의 법정에 세우는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세상의 법정에 전혀 호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을 그러한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상대적인 사회적 법정에서의 규명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도 판단받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할 때에는 일반 법정에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 자들이 아니 가리지 않으려는 자들의 거짓됨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음행이라고 하는 것의 죄가 있으니 그것을 회개하지 않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심판하심의 사실을 기대하고 하나님의 법정에 세울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당하지 못한 일에 대하여서 분별이 있어야 한다는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자신은 그들보다도 더 악한 일을 행한 자로서 판단받음이 가하지만 그러한 제제를 받지 않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그 증거하는 권세는 사도 바울로부터 비로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은 것으로써 말해야 하는 당위성이 합당하며 합당한 유익의 사실을 말할 수 있기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유익이라는 사실이 있을 때에 그 유익의 사실로서 판단의 가치관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유익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유익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능성으로서만 전락되어지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충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나갈 수 있는 것으로서 우리의 몸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할 때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판단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것의 한정적 의미를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사단은 음욕이라는 탐심이라는 개념의 우상으로써 그 충성의 자리를 막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나라의 유업을 얻지 못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믿음의 책망을 함으로써 또한 충성된 자가 어떤 자인가를 보이며 자신을 본받을 수 있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피로써 사신 성도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로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 자신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학적 개념에서의 우리 존재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겸손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소유되어진 것으로서 우리의 것임을 기억할 때에 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일관하고 그것으로 우리 몸을 주장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불법의 사람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당함을 얻는 것이 진정한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면서 이러한 우리 존재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자리에 서며, 임의적 가능성에 따른 자신에 대한 잘못된 변명으로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고 사실분별을 세상적으로 행하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충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되어진 자라는 사실앞에서, 가능성이라는 개념만 생각하여 음욕과 탐심의 자리에, 잘못된 임의적 자신을 변명하며 불법적으로 섬긴다는 거짓된 자리에 서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잘했다 칭찬을 받는 자리에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