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12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후1:12-24
아멘 찬송
하나님께서 가정을 돌아보도록 하시며 또 교회를 돌아볼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될 때에, 그 가정에 나타나는 자녀의 성장에서 주의 뜻하심이 얼마나 아름답게 나타나고 있는지 그러한 것을 주목할 수도 있음을 감사하며 기뻐하며 영광을 돌립니다.
아이가 막 태어나서 손이나 발에 ‘누구누구 아기’라는 이름을 달고 자기 이름을 가지고 누워서 칭얼거리는 가운데 몇 날을 잠 못 자게 하더니만 언젠가 밤과 낮을 가리고 뒤집기 한판.. 기어 다니고 일어서서 아빠에게 엄마에게 한 발짝씩 걸어 오가는 시도를 할 때에 얼마나 아름답고 예뻤었는지.. 그 때에 부모의 마음에서는 ‘아이고 내 새끼 다 컸네..’의 말이 울려나고 있었습니다.
물론 아직 구만리 같은 인생여정이 길게 남아 있지만 아직 성장이라고 하는 것이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그래도 부모 마음에는 그러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은 마음에서 사도 바울이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는 말로 고린도교회를 믿어주고 자랑하는 중심을 나타내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3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자신과 디모데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대하고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증거하는 바라고 하면서 이것이 사도 바울과 그와 함께한 자들의 자랑이라고 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강 사도 바울과 함께한 자들을 아는 것과 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고린도교회가 사도 바울과 그와 함께한 자들의 자랑이 되고 사도 바울과 그와 함께한 자들이 고린도교회의 자랑이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말한 것에 대한 사도 바울이 그 확신을 가지고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고린도교회에 이르려고 하였다가 일정을 바꾸어서 가지 않음에 대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었음에 대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만 예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기름 부으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함이라고 함을 말하면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고린도교회를 아끼기 위한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사도와 그 함께한 자들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마음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라고 함과 이는 고린도 교회가 믿음에 섰음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가지 아니한 것에 대한 최종적인 이유로써 고린도교회가 믿음에 섰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를 위한 그러한 이유에 순종하게 되어진 것의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하나님 앞에서의 사도의 순종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표현하여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후 1:20)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어떤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멘이라는 의미와 믿음에 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고린도 전 후서에서 가장 전반적인 측면에서 고려하게 되어지는 것은 무엇이 사실인가라는 의문 속에 부활이라고 하는 것도 마치 하나의 기만적인 사실로써 세월속에 묻혀지는 것인 것과 같이 잘못 인식되고 있었고, 현실에서 비롯되는 실제적인 논리와 실증적 개념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에, 그리고 하나님의 질서의 실재와 그 거룩성에, 그렇게 마음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부활이 사람들의 역사적 상대적인 인식의 판단을 비로소 받는 것이 아닌 것으로 말하고 또한 부활하심에서의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정당함을 입을 수 있는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는 것의 거룩함과 그 사실을 비로소 합당하게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안에서 그 증거되어지는 것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의 절대 정당함이 상대적으로도 나타나는 것으로 절대의 진리로 받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현상적인 상대적 형태의 주관적인 개념으로 나타나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이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의 부여됨에 따라 진정한 사실이 될 수 있기에 상대적인 정황적 형태의 판단과 정당함에서 비로소 비롯되는 여러 가지 정황적 좋은 것으로 아니요라는 그러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고 진실로 아멘 즉 진실로 그렇습니다는 순종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멘'이라고 하는 말이 의미하는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이 상대적인 형식과 형태로 기록되어짐에도 불구하고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을 따라서 그 절대 정당함과 절대 보편성의 부여와 재가로 아주 보편적인 사실임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받게 되어지는 설교 말씀도 주의 말씀의 재가를 받는 것임을 분별하여 받을 수 있을 때에 아멘이라고 주 앞에서 고백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믿음에 섰다고 함을 말할 수 있는 배경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일정을 바꾸게 되어진 가운데서 고린도교회에서 사도를 비방하는 아직 실제라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의 임의적 인식에서는 사도 바울을 비난하며 그의 행함에 따른 신실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그리고 그의 가르침까지도 의미를 상실하는 것과 같이 이해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을 의식하면서 오늘 본문을 사도 바울이 말하였던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사도 바울이 일정을 바꾸어 고린도교회에 오지 않음에 대한 의미없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사도 방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실제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 인도하심을 사실로 받아 일정을 주신 믿음에 따라 바꾸었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적 직접적인 그 이유라는 것은 그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을 주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기쁨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고 또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이 섰다고 하는 것을 고려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가 완벽한 성장을 했음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부활의 사실을 상대적으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세월속에서 비로소 판단받는 것과 같이 바르게 생각하고 있다가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과 주의 부활의 사실은 역사적 판단을 비로소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주의 부활하심에서 그기준에서 진정한 사실을 믿는다는 것이 믿음에 기본이 되어진 점을 사도 바울이 마음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직접 사도를 대면해보기 원했고 그러한 가운데 그가 가르친 주의 말씀이라는 것보다도 사도 자신이 말한 것으로 오해하고 착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사도 바울이 인식한 것으로 주목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 보다도 사도 바울으 더 연모하고 따르는 즉 바울파의 행동과 같은 모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예루살렘의 교회에 연보하는 문제도 있는데 사도 바울을 보아서 억지 연보를 할 수 있는 여지도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두번째 고린도교회에 가는 것은 믿음으로 주 앞에서 정당함을 따라 사실로 받기를 원하는 그 믿음의 기본을 망칠 수도 있는 정황적 모습을 사도 바울은 주목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한걸음씩 막 걸음마를 내딛는 성숙함을 위해 잘 걷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 걷는 아이의 손을 잡아준다는 것은 오히려 방해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사도 바울은 그 신앙의 기본이 되어진 것이 성숙함에 나갈 수 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의 인식이 이 마지막 말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 1:24)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아멘'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또 일부에서는 그러한 것을 훈련차원에서 권하는 모습을 보는데, 다소 지나친 모습을 취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이 습관을 따라서 나타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 습관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고백과 그 중심의 표현으로써 나타나야 하는데 그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는 가운데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경우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아멘'이라는 뜻은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뜻을 가진 말이면서도 명사로 사용될 때에는 '진실'로 '진리'로 주님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이름적 뜻함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멘'이라고 하는 말이 의미하는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이 상대적인 형식과 형태로 기록되어짐에도 불구하고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을 따라서 그 절대 정당함과 절대 보편성의 부여와 재가로 아주 보편적인 사실임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멘이라는 뜻을 잘 분별하고 바르게 사용하며 나타내시는 가운데서 참으로 우리의 삶이 주 앞에 드리는 향기로운 찬송이 되어지는 그러한 영광중에 주 앞에 드린바가 되어지는 믿음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고후1:12-24
아멘 찬송
하나님께서 가정을 돌아보도록 하시며 또 교회를 돌아볼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될 때에, 그 가정에 나타나는 자녀의 성장에서 주의 뜻하심이 얼마나 아름답게 나타나고 있는지 그러한 것을 주목할 수도 있음을 감사하며 기뻐하며 영광을 돌립니다.
아이가 막 태어나서 손이나 발에 ‘누구누구 아기’라는 이름을 달고 자기 이름을 가지고 누워서 칭얼거리는 가운데 몇 날을 잠 못 자게 하더니만 언젠가 밤과 낮을 가리고 뒤집기 한판.. 기어 다니고 일어서서 아빠에게 엄마에게 한 발짝씩 걸어 오가는 시도를 할 때에 얼마나 아름답고 예뻤었는지.. 그 때에 부모의 마음에서는 ‘아이고 내 새끼 다 컸네..’의 말이 울려나고 있었습니다.
물론 아직 구만리 같은 인생여정이 길게 남아 있지만 아직 성장이라고 하는 것이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그래도 부모 마음에는 그러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은 마음에서 사도 바울이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는 말로 고린도교회를 믿어주고 자랑하는 중심을 나타내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3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자신과 디모데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대하고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증거하는 바라고 하면서 이것이 사도 바울과 그와 함께한 자들의 자랑이라고 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강 사도 바울과 함께한 자들을 아는 것과 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고린도교회가 사도 바울과 그와 함께한 자들의 자랑이 되고 사도 바울과 그와 함께한 자들이 고린도교회의 자랑이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말한 것에 대한 사도 바울이 그 확신을 가지고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고린도교회에 이르려고 하였다가 일정을 바꾸어서 가지 않음에 대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었음에 대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만 예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기름 부으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함이라고 함을 말하면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고린도교회를 아끼기 위한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사도와 그 함께한 자들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마음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라고 함과 이는 고린도 교회가 믿음에 섰음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가지 아니한 것에 대한 최종적인 이유로써 고린도교회가 믿음에 섰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를 위한 그러한 이유에 순종하게 되어진 것의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하나님 앞에서의 사도의 순종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표현하여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후 1:20)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어떤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멘이라는 의미와 믿음에 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고린도 전 후서에서 가장 전반적인 측면에서 고려하게 되어지는 것은 무엇이 사실인가라는 의문 속에 부활이라고 하는 것도 마치 하나의 기만적인 사실로써 세월속에 묻혀지는 것인 것과 같이 잘못 인식되고 있었고, 현실에서 비롯되는 실제적인 논리와 실증적 개념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에, 그리고 하나님의 질서의 실재와 그 거룩성에, 그렇게 마음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부활이 사람들의 역사적 상대적인 인식의 판단을 비로소 받는 것이 아닌 것으로 말하고 또한 부활하심에서의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정당함을 입을 수 있는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는 것의 거룩함과 그 사실을 비로소 합당하게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안에서 그 증거되어지는 것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의 절대 정당함이 상대적으로도 나타나는 것으로 절대의 진리로 받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현상적인 상대적 형태의 주관적인 개념으로 나타나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이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의 부여됨에 따라 진정한 사실이 될 수 있기에 상대적인 정황적 형태의 판단과 정당함에서 비로소 비롯되는 여러 가지 정황적 좋은 것으로 아니요라는 그러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고 진실로 아멘 즉 진실로 그렇습니다는 순종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멘'이라고 하는 말이 의미하는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이 상대적인 형식과 형태로 기록되어짐에도 불구하고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을 따라서 그 절대 정당함과 절대 보편성의 부여와 재가로 아주 보편적인 사실임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받게 되어지는 설교 말씀도 주의 말씀의 재가를 받는 것임을 분별하여 받을 수 있을 때에 아멘이라고 주 앞에서 고백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믿음에 섰다고 함을 말할 수 있는 배경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일정을 바꾸게 되어진 가운데서 고린도교회에서 사도를 비방하는 아직 실제라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의 임의적 인식에서는 사도 바울을 비난하며 그의 행함에 따른 신실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그리고 그의 가르침까지도 의미를 상실하는 것과 같이 이해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을 의식하면서 오늘 본문을 사도 바울이 말하였던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사도 바울이 일정을 바꾸어 고린도교회에 오지 않음에 대한 의미없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사도 방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실제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 인도하심을 사실로 받아 일정을 주신 믿음에 따라 바꾸었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적 직접적인 그 이유라는 것은 그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을 주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기쁨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고 또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이 섰다고 하는 것을 고려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가 완벽한 성장을 했음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부활의 사실을 상대적으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세월속에서 비로소 판단받는 것과 같이 바르게 생각하고 있다가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과 주의 부활의 사실은 역사적 판단을 비로소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주의 부활하심에서 그기준에서 진정한 사실을 믿는다는 것이 믿음에 기본이 되어진 점을 사도 바울이 마음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직접 사도를 대면해보기 원했고 그러한 가운데 그가 가르친 주의 말씀이라는 것보다도 사도 자신이 말한 것으로 오해하고 착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사도 바울이 인식한 것으로 주목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 보다도 사도 바울으 더 연모하고 따르는 즉 바울파의 행동과 같은 모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예루살렘의 교회에 연보하는 문제도 있는데 사도 바울을 보아서 억지 연보를 할 수 있는 여지도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두번째 고린도교회에 가는 것은 믿음으로 주 앞에서 정당함을 따라 사실로 받기를 원하는 그 믿음의 기본을 망칠 수도 있는 정황적 모습을 사도 바울은 주목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한걸음씩 막 걸음마를 내딛는 성숙함을 위해 잘 걷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 걷는 아이의 손을 잡아준다는 것은 오히려 방해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사도 바울은 그 신앙의 기본이 되어진 것이 성숙함에 나갈 수 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의 인식이 이 마지막 말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 1:24)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아멘'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또 일부에서는 그러한 것을 훈련차원에서 권하는 모습을 보는데, 다소 지나친 모습을 취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이 습관을 따라서 나타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 습관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고백과 그 중심의 표현으로써 나타나야 하는데 그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는 가운데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경우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아멘'이라는 뜻은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뜻을 가진 말이면서도 명사로 사용될 때에는 '진실'로 '진리'로 주님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이름적 뜻함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멘'이라고 하는 말이 의미하는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이 상대적인 형식과 형태로 기록되어짐에도 불구하고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을 따라서 그 절대 정당함과 절대 보편성의 부여와 재가로 아주 보편적인 사실임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멘이라는 뜻을 잘 분별하고 바르게 사용하며 나타내시는 가운데서 참으로 우리의 삶이 주 앞에 드리는 향기로운 찬송이 되어지는 그러한 영광중에 주 앞에 드린바가 되어지는 믿음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